제3차 순례- 왜고개, 당고개, 성심교정, 노고산, 삼성산 성지

Bicycle Pilgrimage 자전거 순례
홈 > After Pilgrimages > Bicycle Pilgrimage > 서울
Bicycle Pilgrimage

제3차 순례- 왜고개, 당고개, 성심교정, 노고산, 삼성산 성지

20170126(목) 자전거로 돌아보는 3차 성지순례, 오늘은 서울의 마지막 코스인 왜고개(국군중앙성당)~당고개~성심성당~서강대 가브리엘관앞(노고산)~ 삼성산 성지와 성당을 돌아보고 7호선 신대방삼거리역에서 마무리 했다.
#자바접이식 자전거 덕분에 평일날도 전철로 점프하여 복귀 하였다. 

 

잠수교 북단에서 오전 10시에 경기도 광주에서 전철을 타고 온 초은님과 도킹하였다.

목요일인데도 자전거를 경강선에 싣고 올 수 있었던 것은 1000만원이 넘는 Moots를 해체하여 접이식 프레임으로 이식을 했기 때문이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3197_4725.jpg

한강대교 북단으로 달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강대로로 올라서 용산우체국 뒷쪽에 있는 왜고개 성지에 도착했다.  

70438b12daf115dde50bb9789053db94_1507287302_4457.JPG
3차 성지순례 맵.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3197_6914.jpg

비스듬한 진입로를 올라가면 성지 안내 표지가 보인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3197_9034.jpg

 

박해 시대 순교 성인들의 시신이 암매장 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 왜고개 성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명의 성인 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 서소문 밖 성지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성 최형 그리고 홍봉주 등이 암매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이곳은 예부터 와고개[瓦署峴]라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여기를 와서(瓦署), 즉 나라에서 쓰는 기와를 만드는 곳이라 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중림동 성당, 명동 성당 건물에 쓰인 붉은 벽돌도 여기서 구운 것이다.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도 한강 새남터에서 교우들이 찾아내어 잠시 이곳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미리내로 모셔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朴順集, 1830~1911, 베드로)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와 우세영 알렉시오 등이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군인으로서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몇몇 신자들이 함께 3월 28일(음)에 시신을 찾아내 새남터 부근에 임시로 묻었다가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3198_1185.jpg

또 박순집은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7일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일명 승연, 1811~1866,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3198_3354.jpg

 

왜고개 암장과 박순집의 일곱 도적 이야기

박순집의 왜고개 암장 사실을 오기선 신부는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3232235521_ICh5kWRN_87e84195f2781835ba7a8a6c80cbb73ec119140d.jpg "1866년 3월 7일 병인박해로 장 시메온 주교(張敬一), 유스토 마리아 백(白) 신부 그리고 루도비꼬 서(徐沒禮) 신부 세 분이 순교 후 군문효시하여 시체를 물샐 틈 없이 수직하는 통에 모래톱에 방치한 지 40일 후 즉 1866년 5월 28일에 무인(武人) 박순집 베드로는 다른 교우 여섯을 데리고 암암 칠야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 무시무시한 새남터 모래사장을 두 패로 나누어 암호를 정해 가지고 땅으로 두더쥐처럼 조금씩 조금씩 기어들어 가면서 한편에서 "예"하면 얼마 간격을 두고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수"한다. 합치면 "예수"란 낱말이 된다. 그래서 자기 동지인 줄 알고 마음 놓아가며 세 순교자 시체 절도사건을 벌인 것이다. 장사이요 억척이던 박 베드로가 세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예"와 "수"가 일초 간에 마주쳤으니 일행 거룩한 일곱 도적이 이 세 시체 앞에 모였다는 증거다.
박 베드로가 장 주교, 백 신부, 서 신부의 수염을 함께 합쳐 입에 물고(그러니 세목이 박 베드로 턱 아래 흔들거렸다) 두 시체는 양쪽 옆구리에 끼고 시체 하나는 업고 암암 칠야 극비밀의 어둠을 갈라가며 탈출했다. 이 왜고개라고 불리우는 와서(瓦署) 자리에 고이고이 암매장을 하고 동서남북으로 발로 걸음을 재고 사면에 암호 표식을 하고 구름과 같이 사라졌다. 그 일곱 분 중의 한분 김 요한(흥민, 興敏)의 계씨를 오기선 신부가 중림동(약현) 교회 보좌신부로 1933년 1월 10일 부임 당시 면담한 일이 있고 이 역사담을 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후 20여년이 흘러 민 주교님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시체 찾기 운동을 벌이고 계셨기 때문에 1890년 인천으로 내려 간지 4년이 되던 해에 박 베드로를 유일한 고증인으로 불러 올렸다. 1894년 5월 22일에 박 베드로는 민 주교님을 위시하여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과 이 왜고개로 갔다. 어느새 이 왜고개는 북망산처럼 수많은 무덤들이 즐비하게 누웠다. 동리 사람들이 몰려나와 남의 묘소를 마구 도굴하니 관가에 고소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청천백일에 느닷없이 먹장 같은 구름이 꽉 끼고 뇌성벽력으로 소나기가 빗발치듯하니 동리 사람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다.
그 틈에 박 베드로가 28년 전 암호 표시했던 무덤을 파헤쳐 그전에 자기가 순교자 성명, 연월일을 먹으로 쓴 사기대접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견됨과 동시에 다시 일기는 구름 한 점 없는 청천백일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고 직접 그 일을 같이 한 김 요한 흥민 할아버지는 신기한 듯 오기선 신부에게 일러주고 또 일러주었다. 박 베드로의 딸 박 사베리오 수녀도 똑같은 회고담을 이 왜고개에 대해서 들려 주셨다. 세분 순교자 유해를 용산 성직자 묘소에 임시로 모셨다가 1898년 5월 29일 명동 성당이 낙성된 후 그 지하실 순교자 유해 안치소로 민 주교님이 옮기셨다."
(경향잡지 1971년 11월호, pp40~42)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5182_4061.jpg

용산전자상가로 향하는 굴다리 밑을 통과하여 우회전 후, 청파로 고가도로 시작지점 밑에서 좌회전하여 청파로의 당고개순교성지를 다시 찾았다.

지난번에 미처 보지 못한 현양관도 보고 동행한 분에게 이곳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5182_6261.jpg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9명의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며,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고 거룩한 순교 성지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5181_7862.jpg

사무실 앞에서 우측 통로를 따라가면 현양관과 묵상기도 방을 만날 수 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5181_9942.jpg

 

용산구 신계동 일대, 즉 무악재부터 아현과 만리재를 지나 지금의 용산구청에 이르는 산줄기가 끝나는 부분으로 만초천(蔓草川, 현재 복개된 욱천(旭川))과 맞닿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용산구청 쪽에서 삼각지 방향으로 갈 때 이용되던 고개였다. 이곳은 순교 선열의 피로 적셔진 거룩한 땅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5182_2002.jpg 

이성례 마리아의 모성애와 순교 정신

 

이성례(李聖禮, 1801~1840, 마리아)는 성인 최경환(崔京煥, 1805~1839,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최양업(崔良業, 鼎九,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시다.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 마리아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과 한 집안 사람이다.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는 김진후 비오에게 시집가 김대건 신부의 조모다. 

이 마리아는 18세 때 최경환과 결혼하였고 서울로 이주하였으나 외교인들의 괴롭힘으로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등지로 이주하였다가 경기도 과천(果川) 수리산에 정착,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31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서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고 형조에서도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 1840년 1월 31일(음 1839년 12월 27일) 당고개[堂峴]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정구(鼎九, 최양업 신부), 희정(羲鼎 당시 15세), 선정(善鼎 당시 12세), 우정(禹鼎 당시 9세), 신정(信鼎 당시 6세),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 스테파노였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6352_8709.jpg

당고개 성지를 빠져나와 가까이에 있는 성심여고 교정으로 향했다. 

수위 아저씨에게 순례왔다고 신고하고 교정으로 들어가니 커단란 예수님상이 우리를 반긴다.

예수상 우측에 있는 건물이 바로 옛 용산 신학교 성당, 예수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6353_1154.jpg

 

1902년에 축성된 건물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6353_3594.jpg

115년이 넘은 성당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내부는 정갈하고 아름답다. 앞쪽은 문이 잠겨져서 성당 북쪽문으로 들어가 복도 배치된 스템프를 찍고 성체조배후 나왔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6353_5723.jpg 

 게시판에는 고 김수환추경님의 글이 적혀 있다.

마음 꽃 한송이는 백년의 향기를 내품네!

 

다시 한강 자전거도로로 진입하여 노고산, 즉 서강대학교 교정으로 향했다.

첨부한 gpx파일을 참고하면 진출입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7194_7795.jpg

교정 한 바뀌를 돌면서 현양관을 찾았지만 없다. 잘 못알고 있었다.

이곳 노고산은 단지, 기브리엘관 앞에 있는 세 분의 기념비가 우리가 찾는 전부였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7194_9977.jpg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됐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 모두 이 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낸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대목을 이룬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7195_2378.jpg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7195_4801.jpg

사흘 동안 이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그 동안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노력하다가 몇 명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20여일 만에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몇몇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인 1943년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에 세 성직자의 시체를 다시 옮겨 모시고, 후에 그 사실을 어린 아들 박순집(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서강대 정문을 빠져나와 좌회전하여 길 건너편에 있는 기사들이 자주 찾는 식당에서 뼈해장국과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7195_7162.jpg

순대국으로 허기를 해소하고 ...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7195_9296.jpg 

성산대교 북단 계단을 밀바로 올라가 다리의 북쪽 인도를 타고 양화교폭포 앞에 이르러 안양천 진입로 계단으로 내려가 줄기차게 안양천을 달려서 오늘의 마지막 순교지인 신림동 삼성산으로 줄달음 쳤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8256_8667.jpg

난곡우체국앞 교차를 통과하여 관악산휴먼시아 2단지아파트 쪽으로 매우 가파른 업힐다운 업힐을 제대로 하여 정상에서 좌회전하여 호암로를 따라 다운을 치고 내려가다 표지판을 따라 다시 우측 길로 접어드니 역시 업힐이다. 성당 아랫쪽 입구에는 큼지막한 돌 표지판이 서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8257_08.jpg

삼성산 성지는 눈이 덮힌 산속에 있다.

 

 

 

기해박해 순교 세 성인 성직자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8257_2935.jpg

밀바 끌바를 하면서 2km이상 되는 성지를 향하여 ... 오르다 가져온 간식을 눈 밭 밴치에 앉아서 먹으며 다시 에너지를 보충하고 밀바를 계속한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8256_6125.jpg

미끄러운 길을 무거운 MTB를 들고 매고 드뎌 성지에 도착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8257_7269.jpg

 

3232235521_4qoMjzHy_09c38b4044e30685f976878ebc5d4c5e72c7915e.jpg

 -  삼성산에 안장되었던 세 성인 성직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 

'삼성산'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 의상, 윤필 등 3명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1901년에 위의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8258_2951.jpg

 

* 1836년 이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8월 10일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1839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6099206459752600242376e6fd405e59_1486968258_5348.jpg 

 

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니 순례길 옆으로 사당역에서 삼성산성지를 거쳐 석수역에 이르는 서울둘레길 5코스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다.

다시 올라오던 길로 내려가 성당으로 가서 2층 복도에 있는 스템프를 찍고 빠른 속도로 호암로를 타고 내려와 미림여고 교차로에서 좌회전 하여 일행은 2호선 신림역에서, 나는 7호선 신대방삼거리역에서 전철을 이용하여 각각 집으로 복귀한 뜻 깊은 자전거 순례길이었다.

함께 동행한 초은님께 감사 드립니다. 

 

#첨부1 : GPX 순례길 경로파일

 

※ 경로 지도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3005031?ref=wtd

0 Comments
Category
글이 없습니다.
State
  • 현재 접속자 64 명
  • 오늘 방문자 3,072 명
  • 어제 방문자 2,573 명
  • 최대 방문자 5,379 명
  • 전체 방문자 1,602,248 명
  • 전체 게시물 1,336 개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