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순례- 수원교구 구산성지, 의정부교구 마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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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순례- 수원교구 구산성지, 의정부교구 마재성지

[20170209(목) 4차 성지순례는 수원교수 구산성지, 의정부교구 마재성지]
영하 6도의 추운 날씨에도 집결지 잠실철교 남단으로 10시에 도착하기 위해 중랑천을 달려 성수대교 앞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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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차지만 시계도 좋고, 햇볕은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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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철교 남단 아래 성내천교에서 7명이 집결하여 응원나온 늘푸른님과 함께 찰각 하고 구산성지를 향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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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동 업힐구간 구암서원에서 일행중 한 명이 뒷드레일러 트러블로 지체하기에 다시 내려가 확인해보니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복귀해야 할 상황 ...

선두가 기다리는 고덕천교 입구에서 합류하여 강일교 위로 올라가 임도와 차도 갓길을 이용하여 미사 강변북로 방향을 잡아 구산성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성지 입구의 출입문이 유난히 이색적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돌과 기와 조각으로 정성들여 쌓아올린 정문이 작품이로세 ~작품이로세 ~ 절로 감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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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한 여성 분들도 정문에서 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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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찰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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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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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입구 들어서면 바로 성모상이 보이는데 둘레의 담장 역시 너무 정성스럽게 성지로 꾸몄다.

아마 그래서 이곳이 여러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 동네가 미사 강변도시로 개발 되면서 작년에 건물을 통째로 들어올려 옮겨놓는 ‘원형 이동 복원’을 한 성당이다. 1956년 6.25 전쟁의 상흔 속에서 신자들과 주민들이 인근 한강의 모래와 자갈을 옮겨와 벽돌을 쌓아 올려 함께 지은 성당(면적 199m²)을 해체하지 않고 기존 위치에서 약 200m 떨어진 새 부지까지 레일을 깔고 그 위로 건물을 끌어당겨 옮겼다. 60년이나 된 건축물을 통째로 이동해 보존하는 시도는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180톤의 건물을 레일위로 올려 하루에 15m씩 200m를 이동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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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이 이전 당시 기록으로 남긴 위성사진을 보니 본래의 위치와 이전 위치가 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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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 성지는 박해 시대 이래로 유명한 교우촌이자 전통적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순교자들을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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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을 처다보니 바로 전통적 신앙 공통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고향 자비의 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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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성 김성우안토니오 호를 붙여 안당문이라 하였는데 2016년에 특별희년 성지로 지정 되면서 자비의 문으로 바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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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성스러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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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도열해 있다.

나무를 세워 만든 십자가의 길 14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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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문 좌측으로 순교성인들의 업적을 글로 적어 순례객들이 쉽게 읽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구산에서 배출된 순교자는 1841년에 4월 29일(또는 28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김성우(金星禹, 禹集, 1795~1841,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그의 첫째 동생 덕심(德深, 萬集, 1798~1841, 아우구스티노), 둘째 동생 윤심(允深, 文集, 1801~1868, 베드로 알칸트라)과 김성우의 아들 성희(金聖熙, 1815~1868, 암브로시오), 덕심(만집)의 아들 차희(金次熙, ?~1858) 윤심(문집)의 아들 경희(金敬熙, 1823~1868), 사촌인 주집(金胄集, 스테파노)의 아들 윤희(金允熙, 1834~1868)와 최지현(崔址鉉, 揮斗, ? ~1868), 심칠여(沈七汝, 1832~1868, 아우구스티노) 등 모두 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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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조형물들 ... 신부님이 예술성이 있는 분인 것을 직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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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처 앞 마당에는 현양비와 묘지가 보인다. 

이 묘지가 바로 성 김성우 안토니오 현양비와 가족묘지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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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당 기념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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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화를 위해 나도 기와 한 장을 들어 "+ 찬미예수 박셀모"라고 적고 지폐 한장을 봉헌함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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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성우 안토니오는 1833년에 유방제(劉方濟, 본명 余恒德, 1795~1854,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 때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유수(廣州留守)가 있던 남한산성으로 끌고 갔다. 

그중 덕심(만집)은 체포된 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옥사 獄死). 

반면에 윤심(문집)과 사촌은 19년 5개월만인 1858년 철종(哲宗) 임금의 원자 탄생을 경축하는 특사(特赦) 때 배교 없이 석방되었다. 

그후 윤심은 1868년 3월 8일(음 2월 15일), 그의 조카들 성희, 차희, 경희, 윤희 등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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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무실에 들러 스탬프를 찍고 우리는 다시 팔당대교를 향해 출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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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경로는 미사조정경기장을 거쳐 바로 팔당대교 남단으로 가려고 했는데 선두가 뚝방길로 진입하기 위해 비닐하우스 길로 들어가는 바람에 약간의 알바를 한 후에야 자전거 길을 찾아서 사진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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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대교를 건너 건널목 직전 우측 강변에 있는 식당에서 다양한 메뉴를 시켜서 나눠먹는 재미를 느낀다.

섬세한 여성 두 분이 있어서 가능한 입이 호강한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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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공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4계절 언제 와도 마음이 편안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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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생태공원은 입춘이 지나서인지 푸른 하늘 아래 수목들도 서서히 봄이 오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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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으로 싸온 사과 한 조각으로 목을 축인 후 오늘 마지막 코스 마재성재를 향해 달린다. 

아쉽게도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다산생가 및 묘지는 들러보지 못하고 바로 성지로 향한다. 시간이 넉넉하신 분들은 꼭 들러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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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성지는 나주정씨 집안 형제 정약종, 정약용, 정약전, 정약현 등 4형제 성가정의 표본이다.

천주실의(마테오 리치 신부 저술)를 읽고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 천주교의 요람이자 못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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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들어서면 길 우측에 있는 현양탑, 성모상,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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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목재 예수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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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정약종(아우구스티노)와 그보다 앞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그의 아들 정하상(바오로)과 딸 정정혜(엘리사벳)도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다. 

정씨 부자(父子)가 한국교회사에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 1779년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하는 등 초기 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한 정약종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을 위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펴냈으며,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당시 사제와 교우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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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길 14처 마직막 끝에 있는 못자국이 박힌 발 조각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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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좌측편에 있는 한옥성당이다.

이 성당 마당 입구에 비둘기집 처럼 만들어 세워 놓은 조그마한 함이 있는데 여기에 스탬프가 있다. 처음 찾는 분들은 스탬프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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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성물방) 앞에 있는 예수님상 앞에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 부자상을 보노라면 마음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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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형 정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天壽)를 다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心書)”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성물방(휴게실)에 들어가 무료로 제공되는 셀프 커피머신에서 한 짠씩 빼들고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세상 이야기를 하다 마재성지 순례를 마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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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동지들은 먼저 복귀하고 남은 세명은 양수리 물의 정원까지 더 라이딩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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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겨울 숨을 토하고 있는 북한강변의 봄을 움티우며 길을 재촉하여 팔당역으로 와서 전철로 점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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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에 함께 동행한 햇살지기님, 자미녀님, 자주 순례길 곁에 있는 정글레고리오, 부인은 신자인데 아직 세례를 못한 권우 친구, 자전거 트러블로 중도에 포기한 재수 친구, 응원 나와서 절뚝거리는 상태로 페달을 돌려 뒤늦게 홀로 구산성지 까지 다녀간 늘푸른님의 열정에 박수와 감사를 드리며, 후기를 마칩니다.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3004519?ref=wtd 

# 첨부 : 4차순례 gpx 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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