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순례- 춘천 소양로성당, 죽림동주교좌성당, 곰실공소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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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순례- 춘천 소양로성당, 죽림동주교좌성당, 곰실공소를 다녀와서

20170218(토) 자전거로 달리는 제6차 순례는 춘천교구 중에 춘천시내에 있는 소양로성당, 죽림동주교좌성당, 곰실공소를 순례한다. 

이번 순례길은 중1 둘째 손주 준규와 함께 하는 뜻 깊은 순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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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길이 예상되어 주말이어서 접이식과 카본 MTB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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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7일(금) 저녁 집으로 온 둘째 손주 준규와 함께 라이딩 스케줄과 장거리 라이딩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은 후 잠을 재우고, 

6시30분 도봉역을 출발, 청량리역에서 ITX 자전거 칸에 자전거를 싣고 춘천역에 내려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  

지금까지 20Km 내외 단거리는 달려봤으나 오늘 장거리 80km를 잘 해 낼 수 있을까? 과연 춘천 시내의 차도를 잘 따라 다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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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걱정과 기대가 되는 조손 성지순례 길을 주님께서도 잘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춘천의 랜드마크 소양강 처녀상이 있는 곳부터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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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온이라 아직 영하 6도 내외, 준규의 얼굴에 추위가 엿보인다. 속도 라이딩을 진행해야 몸에 열이 나겠다.

기념 사진을 몇 장 찍고 첫번째로 찾아가는 성지는 호반사거리에서 소양로를 타고가다 모수물길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에 왼쪽에 조그마한 소양로성당 표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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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에서 차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4%쯤 되는 오르막을 오르니 아담하고 소박한 성당이 보인다. 준규도 변속을 잘 하면서 거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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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무렵 죽림동 본당 관할이었던 소양로 지역의 신자수가 그 후 나날이 늘어나자 1949년 1월에 소양로 본당이 설립 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콜리어(A. Collier,고)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설립 당시 신자수는 약 250명이었고, 이때 발산 공소와 금산 공소가 소양로 본당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복사 김 가브리엘과 함께 생포되어 6월27일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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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겸 복사인 김 가브리엘과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 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인민군 병사는 경고 한 마디 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콜리어 신부의 순교 이후 한국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소양로 본당에는 신부가 파견되지 못했다.

그 후 휴전이 되면서 1954년 8월에서야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던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으로 인하여 소양로 본당은 설립된 지 7년 만에 성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즉 1956년 4월에 3대 주임 버클리(J. Buckley, 부) 야고보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 3일 국내외 여러 은인과 교우들의 도움으로 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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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에 배치된 스탬프를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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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으로 들어가 성체조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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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원형 평면 양식으로 제대를 중심으로 신자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는 성당 내부.성당 건축을 진두지휘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버클리 신부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했다. 밖에서 보면 원을 반 뚝 잘라 놓은 반달형이다. 내부는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다. 춘천교구장 퀸란 몬시뇰과 버클리 신부가 흔치 않은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국 전쟁 중에 소양로ㆍ묵호ㆍ삼척 성내동에서 선교하던 신부들이 공산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들의 순교혼이 서려 있는 터에 기념성당을 짓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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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로 성당의 이러한 건축기법은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제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강원도 및 춘천시의 도움을 받아 원형 보존 작업을 시행. 이음매가 낡은 함석지붕과 창호를 보수하고 없어졌던 성가대와 벽제대를 복원했으며, 붉은 카펫이 깔려있던 제단을 나무널판으로 바꾸고 목조 난관으로 그 둘레를 둥글게 감았다. 또한 춘천교구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순교하신 콜리어(A. Collier, 고) 안토니오 신부님을 생각하면서 나오려는데 신부님께서 사제관에서 나오신다.

손주와 인사를 하고 봄 방학을 맞아 첫 자전거 순례길에 대한 우려반, 기대반을 이야기 하니 다음 코스인 죽림동 성당과 곰실공소 가는 길을 자세히도 안내를 해준다. 자상하신 신부님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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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교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춘천로를 따라 내려가다 우회전하여 약사고개길을 올라가니 우측에 성당 종탑이 보인다.

주차장에 이르자 성모상이 우릴 반겨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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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협 건물 쪽 뒤로 올라가서 사무실 앞에 있는 스탬프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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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본당건물로 내려가 보니 "자비로운 아버지의 집"이다.

오늘 유치원 졸업식이라서 준비 하는 분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준규는 순례핸드북에 스탬프를 펴보이며 기념 샷을 멋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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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박해(1791년)와 을묘박해(1795년)에 이은 신유박해(1801년)에 이르러서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교우들이 충청도, 강원도 등의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들 중 경기도의 신태보 베드로가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갖은 고생 끝에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피난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퍼져나간 신앙에 귀의한 초기 교우들 가운데 춘천 신읍리 지방의 

최 요한과 회양 지방의 조신철 가롤로처럼 1815년에 투옥된 이들이 있는데, 조신철 가롤로는 강원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들보다 늦게 1840년에는 춘천에서 신자 아홉 명이 투옥되어 그 중 두 명이 옥사하기도 하였다. 

1880년을 전후하여 종교의 자유가 공인되기까지 강원도의 시골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힘겹게 전교에 헌신한 김 시몬 신부와 최 요한 신부도 울진과 춘천 말고개에서 각각 잡혀 모두 원주 감영에서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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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지 80여 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민 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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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 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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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실 공동체가 바로 죽림동성당의 모체가 되는데, 알고 보니 정말 대단하다.

춘천 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愛煉會, 연령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여 가마니 짜기, 새 끼 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푼푼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藥師里)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어렵게 마련한 성당은 6.25 때 다시 파괴되어 1956년 복구되고, 다시 2000년 교구설정 60주년에 중창, 드디어 

2003년 6월 2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11월 21일 말딩회관 내에 본당 설립 100주년(2020년)을 앞두고 마련한 역사전시실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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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는 6.25전쟁 때에 순교한 분들이 유난히 많다.
1950년 6월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2일, 퀸란 토마스 지목구장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캐나반(Canavan, 孫) 보좌신부와 함께 체포 연행하였다. 소위 이 ‘죽음의 행진’으로 교황사절 번(Byrne, 方)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캐나반 신부도 번 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사람 중에는 퀸란 토마스 신부와 크로스비 필립보 신부도 있었다.

그리고 라 파트리치오 신부, 고 안토니오 신부, 진 야고보 신부는 모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50년 남한에서 피살되었다. 

이렇게 6.25 전쟁 중에 순교하거나 납북되어 모진 고생 끝에 생환한 후 선종한 성직자들의 시신은 죽림동 성당 뒷마당의 성직자 묘역에 모셔져 있다.
춘천교구 성직자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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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동 성당은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가한 곰실 공소의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곳이다.

청년 시절 우연히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구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는 가족과 함께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고은리의 한 폐가를 사서 정착한 후 자선과 모범적 신앙생활로 이웃들을 감화시켜 3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생겼다. 엄주언 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1920년 공소를 건립하고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그 해 9월 김유룡 초대 주임신부가 부임하여 춘천 지역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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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언 마르티노(말딩)의 헌신과 80년 동안 사목자 없이 일궈온 신앙이 유난히 돋보이는 죽림동 주교좌성당을 뒤로 하고 공지교에서 공지천을 따라 춘천 신앙의 요람인 곰실 공소를 향해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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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 본당으로 정식 설립되기까지 풍수원 본당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강당'에 모이곤 하였으나 교우 수가 무려 300명에 이르자 엄주언 마르티노는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왕래하면서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드뎌 1920년 9월 김유룡 필립보 신부가 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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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엄주언의 딸 엄 루치아의 증언이나 1894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중에서 '목' 씨 성을 가진 신부는 없었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브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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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브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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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의 요람이란 표석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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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건물 서쪽에 위치한 성당 현관문이 그 역사 만큼이나 자비스럽다.

현관 신발장 앞에 있는 스탬프를 찍고 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성체 조배를 하고 오늘 무사히 준규와 함께 순례를 마친 것에 감사 기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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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울로 복귀하는 장거리 라이딩 길에도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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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나와 뜰을 살피니 언제 만들어진 종탑일까?

오래된 종탑에 준규의 시선이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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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실 공소를 돌아나오면서 역사만큼이나 주차장에 서 있는 역사가 있어 보이는 승용차 주인이 누굴까 궁금해졌다.

아마도 사제관이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보아 저 승용차의 주인은 곰실공소 신부님이 이용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저절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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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준규가 어른이 되어서 이곳을 순례했다는 것을 추억으로 되새길 기념샷을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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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던 공지천을 따라 내려와 의암쪽 강변길에 오르기 전에 둘이서 또 한 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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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난히 내 손주 폼이 멋지다. 이제 서울로 달려보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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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촌에 이르러 닭갈비 노래를 부른는 손주를 위해 닭갈비를 시켰는데 많이 맵다.

주문할 때 맵지 않도록 부탁했어야 하는데 .. ㅠㅠ d982a2b5d3f60be24497e80ed2d34b82_1487595463_3686.jpg

40km 지점까지는 별로 무리없이 잘 달린다. 비록 3~4m/s 내외 맞바람을 잘 밀어부치면서 ... 뒷따라오는 손주가 대견하다.

대성리에서 눈이 녹은 임도와 밭으로 들어갔다가 진흙이 온통 자전거와 신발을 삼겨 바퀴가 돌아가지 못할 정도다.

강으로 내려가 20여분을 세척한 후에야 다시 ... 엉뚱한 알바까지 시켜서 미안하다. ^^

때문에 더 확실한 추억거리를 덤으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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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60km 지점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준비한 단팟빵으로 허기를 달래준다. 처음 도착지를 운길산역으로 정했으나 업힐이 있지만 편의점이 가까운 경춘선 길을 따라 가다 다시 에너지를 보충하고 마석역에서 마무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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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가 다 소모되어 GPX가 중단되었지만 총76Km 정도를 달렸다.

많이 지치고 피곤 했는지 전철에 오르자 곧장 잠이든다. 안스럽고 대견한 내 손주 오늘 수고 많았네.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싯고 꿀잠을 청하는데 ... 잠에서 깨면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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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성지 3곳 순례를 무사히 마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 첨부 : 성지순례6차 - 춘천교구(1)

※ 경로 지도 보기  https://www.komoot.com/tour/283003321?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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