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차성지순례-의정부성당, 남종삼묘, 황사영묘, 행주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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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성지순례-의정부성당, 남종삼묘, 황사영묘, 행주성당

20170225(토) 8차 순례길은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부터 시작 했다.

1호선 전철에 자전거를 휴대하여 의정부역 2번출구에서 가까운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찾아가는데 골목에서부터 약간 방향이 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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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성당으로 가는 길목 좌측에 의정부교구청이 보인다. 교구청 골목으로 100여미터를 더 들어가면 주교좌성당의 정문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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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옛날 성당은 2002년 1월 22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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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적지 성당 건물은 의정부 지역에서 가정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을 전후한 시기의 성당 건축은 열주가 사라진 형태가 대부분인데 의정부 성당도 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수직 종탑과 정면 양식 그리고 앱스(성전 뒷부분) 등 세부 모양은 고전적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폭격 등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단한 석재를 재료로 삼았고 높이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성당 건물 자체가 한국 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구 성당 뒷편에 보이는 건물이 2002년 3월에 협소한 기존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 및 유치원 건물 착공식을 가져 
2003년 1월 완공, 8월 31일 봉헌식을 가졌다. 전체 면적 668평, 건물 면적 180평,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로 지하는 교리실, 지상 1-2층은 유치원, 지상 3층은 성당(현 주교좌 의정부 성당)으로 각각 꾸며졌다. 
화강석으로 처리한 외양은 옛 사적지 성당의 석조와 무난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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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성당 내부의 모습은 색다르다. 1인용 테이블이 좌식으로 앉아서 미사를 보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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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성당 현관입구에 게시된 역사적 자료 사진들이 흥미롭다. 한복을 입은 혼배성사 사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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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성당은 성지가 아니어서 스탬프가 없다.

정문 우측 서쪽에 위치한 성모상의 인사를 끝으로 이제 남종삼 요한 성인 묘소가 있는 길음동성당묘원을 찾아가기 위해 호국로를 따라 울대고개를 향해 줄달음쳤다. 울대고개로 가는 호국로는 갓길이 좁거나 부분적으로 없어서 차량 통행이 많을 때는 자동차를 조심 하면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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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대고개 정상 우측에 있는 건물, 그 앞에는 울대리100m 표지판이 화살표로 우측방향을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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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 우회전 하여 2~3% 되는 업힐을 쫒아가면 길음동교회묘원 정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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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안쪽 좌측으로 성모상이 순례객을 반긴다.

자전거에 올라 작은 표지판을 확인하지 못하고 사무실 방향쪽으로 곧장 달리면서 이렇게 수 많은 묘소에서 어떻게 찾을까 염려가 되었다.

더 이상 표지판을 찾지 못하고 뒤돌아 다시 정문쪽으로 내려오니 일 하는 분들이 올라오기에 물었다. 손가락으로 묘원 북쪽 방향의 끝을 가르키면서 성모상 좌측에 있는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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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사진의 좌측길 오르막 3~5%를 자전거로 힘겹게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여 뒤를 돌아보니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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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앞에는 14처가 보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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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큼직한 성인묘소 안내 표지판이 동쪽으로 방향을 가르킨다.

이 길 좌우에 14처가 심어진 오르막을 오르니 또 다시 조그마한 주차장 같은 공간이 있고 동쪽 방향으로 오르막에 표지석이 다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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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쪽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표지석을 지나 동쪽 언덕에 보이는 여러 묘지들을 둘러 보았지만 남종상 성인 묘지는 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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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표지석 쪽으로 내려와 깨달은 것은 이 길은 시멘트 길이 아니라 돌판으로 바닥을 깔아서 비교적 정성을 들여 만들어 놓은 이유가 있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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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돌판길을 쭉 따라 종점에 이르면 성인 묘소를 만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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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과 그 앞에 스탬프가 비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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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3봉이 있는데 우측에 있는 묘소가 바로 남종상 요한 성인 묘소!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1866년 3월1일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남종삼은 국청에서 모두 6회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 나갔으며, 오히려 천주교가 정도라는 호교론을 펴나갔다. 당시 의금부에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그리고 여러 선교사들이 투옥되어 있었는데, 남종삼이 체포된 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국청이 개설되었다. 여러 차례의 신문은 순교 의지만을 굳어지게 해줄 뿐이었다.

남종삼 성인이 모반 부도의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고 동료 홍봉주와 함께 순교한 곳은 서소문 밖 성지다.

(남종삼)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시체는 형장에 3일간 남겨진 채로 있다가 거기서 조금 떨어진 밭으로 끌려가 완전히 보름 동안이나 버려져 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몇몇 용감한 신자가 시체들을 거두어 매장할 수가 있었다. 

 

 

'죄인 남가의 사형 선고문'

 

높은 관직에 올랐던 그 자는 온 마음을 기울여 사교를 따르고 전파했으며 

오래 전부터 그것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참된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교를 그는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교리라고 말했다. 

그의 모든 죄를 생각하면 만 번 죽어도 벌이 가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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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묘소에서 앞산을 바라보니 바로 이곳이 성인의 영원한 안식처인가 싶다.

저 멀리 오봉산 도봉산이 눈 앞에 펼쳐진다. 정남향의 배산 임수의 명당 자리임을 찾는이 누구나 금방 느낄 수 있다.

 

순교한 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이때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처 이소사와 자식들은 각처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였다. 그중 이소사는 유배지 창녕현에서 훗날 순교하였다.

그의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다. 

 

남종삼은 그후 1885년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게 되었고,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복자 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성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남종삼은 103위 성인 중에서 가장 벼슬이 높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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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로 찾아가는 성지는 황사영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 묘소!
호국로를 따라 송추로 내려가다 보면 가마골로 삼거리에서 39번 도로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면 되는데 이 삼거리 버스정류장에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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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대교 다리를 건너 10여분을 달리면 아주 작은 삼거리에 선모텔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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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모텔 좌측으로 가면 뒤쪽에 클래식호텔 간판이 서 있고, 전방에 돌로 지은 건물 앞, 우측 밭 옆에 세워진 표지판이 보인다.

어렵게 이 표지판을 찾았지만 어디에 묘가 있는지 어느 길로 들어가는지???  왔다 갔다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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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지은 건물(동태탕) 우측 정자나무 아래로 갔더니 묘소 두 개가 보이고 그 뒤로 또 묘 봉분이 보인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건물 뒤쪽으로 더 돌아가니 팬스 울타리 사이로 사람이 다닐 정도의 공간이 있고 발자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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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따라 가면 비석이 있는 묘가 바로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임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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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이 온전할 리도 없거니와 가까운 집안사람들도 모두 유배를 당한 터라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다행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한 이들 덕택에 순교자의 유해가 전해질 수 있었다. 

 

오랫동안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황사영의 묘는 180년이 지난 1980년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고,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렵게 찾은 황사영의 묘는 이곳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에 위치해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건물 뒤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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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입구에는 안내판과 스탬프를 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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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보내려 한 백서가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 준 굳건한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신앙의 귀감이 되겠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묘가 하루속히 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묘비가 건립될 당시 황사영의 세례명이 알렉산델로 알려졌었기 때문에 비문에 그렇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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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한 명으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거족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격려했고, 당시 풍속에 따라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을 명주(토시)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간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렀고,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정약종은 황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했다.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 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 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 천에 적었다.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 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였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 간의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당쟁이었음을 피력하고, 세 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돼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다.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황사영의 세례명이 알렉산델(亞肋山)로 알려져 왔으나 1990년대 말 여러 사료들을 연구한 결과 알렉시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사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는 그의 세례명을 ‘알렉시오(亞肋叔)’로 표기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에 작성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에도 그의 세례명을 ‘Alexis’ 또는 ‘Alexius’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황사영의 세례명이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 ‘알렉산델’로 잘못 적힌 것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대로 표기한 데 원인이 있다. 

 

180여 년간 땅에 묻혀 있던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백자합. 2009년 보존 처리를 거쳐 절두산 박물관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한편 황사영 순교자의 18대 종손 황세환(요셉)씨는 2004년 4월 6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백자합을 기증했다. 

이 청화백자합은 지난 1980년 8월31일~9월1일 가마골에서 황사영의 묘를 발굴할 때 출토된 것으로 그간 창원 황씨 판윤공파 종중에서 보존해오다 이날 연구소에 영구 기증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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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황사영 성인 묘를 둘러보고 나니 벌써 점심 시간이 되었다.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서 우동을 시켰더니 홍합을 푸짐하게 넣어준다.

점심을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행주성당을 가기 위해 구파발역을 향하여 북한산로를 줄기차게 달렸다.

대화행 3호선을 구파발역에서 승차하여 대곡역에서 다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하여 능곡에서 하차 ... 5Km 거리인 행주성당으로 곧장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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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교를 자주 건너면서 행주성당이 근처에 있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에야 맘먹고 찾게 된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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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성당은 1899년경 약현(현 중림동약현) 본당 관할로 설립된 행주 공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행주 포구는 한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거주 인구가 제법 많은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899년 당시 약현 본당 주임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는 이곳에 행주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신자수는 52명이었으나 공소 설립 1년 만에 102명으로 증가하였다.

 

 

본당으로 부활된 후 공동체는 활기를 되찾았으나, 얼마 못 가 도시화 현상으로 신자수가 감소하자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는 그 보완책으로 1957년에 수색동 205번지로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이름을 ‘수색동 본당’(현 수색 본당)으로 바꾸면서 행주 본당은 재차 공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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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승천을 주보로 모신 행주 성당은 2016년 1월 25일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를 맺고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해 같은 해 10월 26일 대구대교구 성모당을 모델로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같은 모양의 성모당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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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설립되면서 행주 공소는 그 해 11월 18일 능곡 본당에서 분리되어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행주 본당은 2007년 5월 27일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을 열고 ‘행주 공소 설정 110주년 ·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이 자랑인 행주대첩의 고장이며 교회사적으로 100년이 넘는 고양 지역 신앙 공동체의 중심인 본당의 위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기념사업에 들어갔다. 그 일환으로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식돼 가고 있는 성당을 복원하고, 신자 재교육을 위한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한편 학술대회, 100년사 편찬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2008년 5월 25일 본당 설정 99주년 및 100주년 역사자료 전시관 개관식을 가졌는데, 전시관에는 주요 연보 및 사진 자료 등을 보기 쉽게 전시해 행주 공동체의 역사를 꼼꼼히 챙겨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성당 마당에 조성한 십자가의 길 축복식도 가졌다.

 

2009년 5월 31일 이한택 주교의 주례로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성당 옆 마당에서 ‘100주년 역사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다. 이날 첫 삽을 뜬 100주년 역사 기념관은 재정적 어려움 속에 3년여의 공사를 통해 100년이 넘는 본당 역사를 몸소 느끼고 싶은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소규모 피정의 집과 교구사제 숙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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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신축 때에 봉헌한 교우들의 이름이 모두 깨알처럼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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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성당은 2010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2015년 복원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1910년 소박한 한옥 형태로 지어진 행주 성당은 1928년 인근의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상량 목부재를 포함한 기존 기초 부재를 대부분 재활용했고, 1949년에 증축하면서 기록한 자료 등 변천 과정의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뼈대를 구성하는 목조가구의 경우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어 성공회 강화 성당(사적 제424호)과 함께 대표적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행주 성당은 2010년 2월 19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건물도 낡고 지붕이나 벽도 예전 모습과는 달리 많이 변형되었다. 

이에 행주 성당의 역사적 · 문화재적 가치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2013년부터 정부의 지원의 받아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복원작업은 문화재 전문가들의 역사적 고증과 자문을 거쳐 1950년도 과거 자료를 기준으로 진행되었고, 성당 해체 과정에서 나온 부재 중 사용 가능한 부재들을 재사용하고 낡은 곳은 구조를 보강해 최대한 문화재의 역사적 의미를 보존하고자 했다. 

모든 공사를 마치고 2015년 12월 2일 행주 성당 복원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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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종탑과 한강변쪽에 위치한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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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오른쪽 마당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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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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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성당 역시 성지가 아니라서 스탬프는 없다.

그러나 "근대사와 영욕을 함께한 행주성당 100주년 이야기 (글그림 강종민)" 책자가 배포되고 있어서 한 권을 챙겨오면서 복귀 하는 전철에서 읽으면서 뜻 깊은 8차 순례길을 마무리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교구는 포천성당을 남겨두고 마무리한 것인데 이제 다음 주부터는 갈 곳이 많은 수원교구 성지들을 찾아 보아야 하겠다.

끝으로 능곡역에서 행주성당으로 가는 자전거길 지름길 경로파일을 추가로 업로드 했으니 참고하여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첨부 : 성지순례8차 - 의정부교구 GPX파일 (의정부성당, 황사영알렉시오묘,남종삼요한묘, 행주성당)

※ 경로 지도 보기  https://www.komoot.com/tour/283001789?ref=wtd

※ 능곡역-행주성당 경로 : https://www.komoot.com/tour/283001452?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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