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차 성지순례-미리내,한덕골,은이성지,골배마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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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차 성지순례-미리내,한덕골,은이성지,골배마실 (2/2)

20170309(목) 10차 순례 2부 후기가 이어진다.
모진 박해를 피해 모인 교우들의 보금자리 한덕골!

비록 성지는 아니지만 한덕골(閑德洞)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이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이곳으로 피난 와서, 처음에는 기거할 집이 없어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는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 나무와 산 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서 살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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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과 대형십자가와 좌(김대건 안드레아상)과 우(최양업토마스 상) 

 

원래 한덕골은 윗마을 광파리골과 아랫마을 한덕골을 합쳐서 부르던 이름이며, 그 중 교우촌은 윗마을인 광파리골이다. 

족보에 의하면 성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金澤鉉, 1766-1830)과 숙부 김제철(金濟哲, 1803-1835)의 묘가 한덕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성 김대건 신부 가족들의 한덕골 피난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곳에 와서 중백부(仲伯父 崔榮謙)와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였다. 최 신부는 그 이후에도 가끔 이곳에 들러 성사를 주곤 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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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사적지를 관리하는 천리요셉 성당에서 설치한 파티마의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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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성인 사제들의 순교정신을 생각하며 단체사진 한 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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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있는 성지 소개 안내판을 다시 한번 읽고 나서 다음 성지 은이성지를 향하여 열심히 내달리다 잠시 용덕 저수지 상류 끝부분 민가 옆 도로변에 설치된 표지석이 있어서 이윤일요한 묘를 향해 산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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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에서 3마리의 개가 시끄럽게 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100m 정도를 올라갔지만 자전거로 올라갈 길은 끈기고 표석이 400m나 남았음을 알린다.

400m를 걸어서 올라갔다 오면 너무 늦어서 오늘 계획된 순례를 다못할 것 같아서 뒤돌아 나왔다.

더구나 이곳은 이윤일 성인이 64년간 묻혔던 묘소, 1987년 이문희 대주교에 의해 유해를 미리내에서 대구 성모당으로 옮겨 안치, 대구대교구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다 1991년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1968년 순교 복자로, 1984년 5월 6일 103위 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기에 그 분의 순교사를 되새기며 은이성지로 달려간다.


1812년 홍주(홍성)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1865년 12월 고향을 떠나 경남 상주 갈골로 이주했다가, 부친이 별세한 후에는 문경 여우목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30여 호를 입교시키는 등 공소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 하였다.

병인박해 때 1866년 11월 18일, 포졸들이 습격한 천주교 신자가 누구냐고 묻자, 태연하게 “내가 바로 천주교 신자요”라고 대답한 뒤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3일 동안 심한 형벌을 받은 다음, 다시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2개월간 수 차례의 심한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하는 한편 함께 갇힌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한다.

  

결국 그는 사학의 괴수로 지목되어 1867년 1월 4일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로 압송되어, 그 해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관덕정으로 끌려 나가, 마지막 음식을 들은 뒤 주머니에서 돈 몇 푼을 꺼내 희광이에게 주면서 단칼에 베어달라고 부탁한 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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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들어 앞바람이 3m/s 이상 쎄지면서 달리는데 ... 신앙 때문에 고향과 가산을 다 버리고 이곳에 피난 와서,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신자 본분을 굳게 지키며 사셨던 신앙 선조들의 기도소리가 지금도 바람을 타고 은은히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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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은이성지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솔뫼나 미리내 만큼이나 중요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첫 사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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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 좌측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전시관이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은이 공소터가 교회의 무관심 속에 이쑤시개 공장과 잡초만이 무성한 텃밭으로 한동안 변해있었다. 

그러던 중 1996년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을 세우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은이 마을은 소년 김대건이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로서, "용인 천주교회사"(오기선 신부 감수, 조성희 지음)는 이에 대해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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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전시관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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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전시관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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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 명의 성인은 바로 모방 나 신부

 

 

바로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는 조선 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바로 이곳이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마지막 미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성인으로 추앙받는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풍성하게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은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 명의 성인은 바로 모방 나 신부이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서 조선교구를 맡게 되었다.

 

당시 몽고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이미 모든 사목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했던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러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1836년 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음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낸 모방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에 나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백여 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이때 그의 사목 활동 중심지가 바로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용공에 위치한 은이 공소였다.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2명의 순교자들을 그린 작품.모방 신부는 1837년에 이르러서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함께 사목 활동을 함으로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가 그해 말 입국할 때 이미 조선교구의 교세가 두 배 이상으로 성장하는 등 큰 성과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모방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범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홍주(洪州) 근처에서 스스로 잡힌 몸이 됨으로써 결국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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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개발되지 않은 다른 여러 사적지 및 성지들과 마찬가지로 은이 공소터는 그 땅에 서리서리 얽혀 있는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을 기릴 수 있도록 후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에는 은이 성지 주변 5,200여 평을 매입하였고, 2003년에는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0여 년 이상 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에 난항을 겪다가 2013년 비로소 성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은 장소로 추정되는 은이 공소터의 공장부지 약 6,000㎡를 매입하여 철거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은이 성지는 2015년 8월 22일 진자항(金家港) 성당 복원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 기공미사를 봉헌하였다. 중국 상해의 진자항 성당은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부제가 페레올 고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은 유서 깊은 곳이나 2001년 3월 30일 상해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성지에 들어서면 산 아래에 성 김대건 신부 기념 유물전시관과 성모상, 숙소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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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들어가서 잠시 성체조배를 하고

성지 입구 우측 건물벽에 부착된 스탬프를 찍고 나오니 이 앞으로 지나가는 길이 옛길 영남길 제6길 표지판과 함께 성지 안내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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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 정보 보기 http://ggoldroad.gg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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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길의 마지막 코스 골배마실로 달린다.

은이성지에서 가까이 있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골배마실은 미리 은이성당 사무실에 전화를 하여 열쇠 비밀번호를 알아야 열고 들어갈 수 있고, 나올 때는 다시 잠궈둬야 한다.  
 

이곳은 지도 검색에서도 성지나 사적지로도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사유지 골프장내에 있어서 그런가 싶다.

 

정확한 주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810 

소년 김대건이 한덕골에서 살다가 7살 때에 이곳 뱀마을, 즉 배마실로 이사하여 성장하던 곳으로 지금은 파인리조트 골프장내에 위치하고 있다.

김대건은 이곳에서 살면서 최초의 서양 선교사 모방 배드로 신부로부터 1836년 봄, 15세의 나이로 안드레아라는 본명으로 산 넘어 은이공소에서 세례성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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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곳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이 관헌에게 체포된 곳이며, 사제가 되어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어머니와 첫 상봉한 장소이며, 참수당하여 유해로 돌아와 어머니 고우르슬라에게 마지막 하직 인사를 하게된 장소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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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천의 다리를 건너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성지이름 돌은 옛집터 땅속에서 잠자던 것을 발굴하여 글자를 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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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 표지석과 동상이 늦은 오후 햇살에 은은하게 빛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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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는 제대도 설치되어 있다.

아~ 바로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 신부님이 어린시절에 뛰어 놀던 곳이라니 ...
 

미리내에서 산길로 30리, 찻길로 80리 거리에 위치한 골배마실에서 그 옛날 김대건 신부는 15세 때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에 의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깃든 것은 증조부 김진후로부터다.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한다. 1805년 다시 붙잡힌 그는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한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성장한다. 그러다가 김진후의 둘째 아들이자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3대에 걸진 순교의 역사와 더불어 한국 천주교가 한국 사제에 의해 시작되는 순교역사의 태동지가 바로 은이성지와 이곳 골배마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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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배마실을 끝으로 순례길을 마무리 하고 복귀를 위해 경전철 운동장.송담대역을 향해 양지천에 새로 생긴 자전거 길을 부분적으로 이용하여 안전하게 달리면서 길을 재촉한다.

운동장.송담역에서 분당선 기흥역으로 이동 환승하여 각자 집으로 복귀 할 예정이다.    

접이식 자전거라서 당연히 휴대 탑승이 가능 할 것으로 알고 송담역으로 갔으나 역무원이 제지를 한다. 

규정까지 꺼내 보이며 안된다고 한다. 참고로 인천공항역에서 용유역으로 왕래하는 경전철은 접이식 자전거를 휴대할 수 있다.

이런 경우가 가장 큰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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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km 정도를 달려 지쳐있는 터라 기흥역까지 다시 중부대로를 타고 효자고개를 넘어서 10km이상을 40여분이상 달리기에는 힘겹다.

점심 후 은이성지로 가는 길에서 부터 한 명이 그동안 약 3개월 정도 운동을 못해 콘디션이 좋지않고 모두가 지쳐있는 상태에서 겨우 마무리를 했는데 다시 업힐을 하여 달리기에는 안전사고의 소지가 있어서 5분여 거리에 있는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여 강남터미널행 고속버스를 타고 복귀한다. 

 

비록 접이식이지만 퇴근 시간이라서 서울 전철이 번잡할 것 같아서 많이 지친 두 명은 전철로 각각 귀가 하고,  

다른 한 친구 집이 회기역 근처라 터미널에서부터 다시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을 따라 함께 마지막 귀가 길을 달린다.  

오늘 순례길 거리상으로는 85.7km+터미널에서 귀가길을 더하여 113km 정도지만 자전거 도로가 아니라서 피로도는 훨씬 높다. 

오전에 도로 사정도 불편한 어려운 순례 길을 함께 동행한 세 명의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축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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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스탬프를 찍는 곳은 미리내 성지, 은이 성지 두 곳 뿐이다. 수원교구는 성지가 아닌 사적지는 스탬프가 비치되어 있지 않다.  물론 핸드북에도 소개가 없고 스탬프 찍을 란이 없다.

첨부 : 성지순례10차 -GPX파일 (오산역~미리내성지~한덕골~은이성지~골배마실~용인터미널)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99793?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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