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차 반주골, 답동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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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반주골, 답동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

20170323(목) 08:30분 1호선 송내역 1번출구로 나와 좌측 골목에 있는 식당에서 4명이 순대국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평일인데도 1호선 지하철 탑승이 가능한 이유는 접이식 자전거라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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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30분 오늘의 인천 성지순례는 반주골에 있는 이승훈(베드로)묘와 답동성당, 제물진두 순교성지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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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후 무네미고개를 넘어 인천대공원에서 부천 쪽에서 넘어온 다른 동료와 합류하여 모두 5명이 장수천을 따라 내려가다 장수교에서 우회전하여 남동구 정수사업소 서쪽 골목 진입로를 타고 올라가 뒷산으로 열심히 업힐을 합니다. 

도로가 끝나는 중턱에 체육공원과 화장실이 나타나는 바로 이곳이 지도상으로 표시된 것과는 약간 다른 위치의 반주골 이승훈 베드로 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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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이 보이는 산소가 이승훈의 묘, 유해는 1981년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이제 가묘만 남아 있지만  인천교구에서 성역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랫쪽 두 개의 봉분은 이 분의 장남 이택규의 묘와 셋째 아들의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 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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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묘에 참배를 하고 안내판과 묘비에 새긴 글들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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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선각자(최초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 묘비와 안내판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의 묘 앞에 서면 1801년 신유박해로 참수되기 직전에 읊었던 한시(漢詩)가 떠오릅니다.

 

‘月落在天 水上地盡(월락재천 수상지진)’

"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 같이’ 내 목숨을 앗아 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아 이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나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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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베드로 묘소 아래 있는 3남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의 묘비.

 

석학 이벽(李壁)과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고,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됩니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종 · 약전 · 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했습니다.  

하지만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 制度)를 주도하였고,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자 이연구.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습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가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고, 반주골의 이승훈 묘는 2011년 12월 29일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 인천교구는 2014년 1월 24일 교구 순교성지 성역화 사업의 중심이 될 성지개발후원회를 발족하며, 이승훈 베드로 묘역 일대를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최종수정 2015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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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를 빠르게 내려와 석바위를 지나 경인고속도로의 고가도로를 이용하여 인천상륙작전기념비를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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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역앞을 지나 개항로로 빠져 두번째 순례 장소, 답동성당에 도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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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 인천 지역 선교의 기초가 된 최초의 본당 답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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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추고 있습니다.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고,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 본당입니다. 

설립 당시의 이름은 ‘제물포(濟物浦) 본당’이었는데, 그 후 ‘인천 본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889년 7월 1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오로.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 그 후 이 지역에서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고,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이 장차 발전할 것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성당 대지를 물색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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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본당의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우선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1889년 7월 8일 첫미사를 집전하였고, 당시 미사에 모인 신자수는 85명이었는데, 신자수는 곧 112명으로 증가하게 되고, 다음해 어렵게 대지 3,212평을 매입한 빌렘 신부는 여기에 성당과 교리실을 건축하려고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부임한 르비엘(E. Le Viel, 申三德) 에밀 신부는 이웃의 야산을 추가로 매입하고, 임시 성당 겸 경리부(經理部) 건축을 시작하여 1891년 7월에 이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럽으로부터 성당 건립 기금을 모금하는 한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고 교세 확대에 노력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홍콩 요양소로 휴양을 가면서 1893년에는 임시로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습니다.

 

성당은 1894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11일에는 정초식이 거행되었고, 1897년 7월 4일 마침내 축성식을 갖게 되었고, 당시 성당의 건평은 396평이었고, 형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춘 형태였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1일 ‘박문소학교’(博文小學校, 현 박문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고, 또 1901년 영종(永宗) 공소(현 옹진군 영종도의 돌팍재)와 대골 공소(현 시흥군 소래읍 富谷里)의 신설 등으로 본당의 교세가 크게 확대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나, 1895년 1월에 일어난 신부 구타 사건, 같은 해 7월의 콜레라 발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수녀원의 불화에 연루되어 1904년에 성직 정지 처분을 받고 영종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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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드뇌(E. Deneux, 全學俊) 에우제니오 신부는 답동 본당의 역대 신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본당의 성장에 노력하였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 부지(현 신흥동) 침입으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전교에 노력하여 1910년까지 새말(현 시흥군 소래읍 大也里) · 고잔(현 김포군 검단면 梧柳里 高盞) · 구월리(九月里) · 부평(富平)에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같은 해에 영종도 공소 강당을 축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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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핸드북에는 답동성당이 나와있지 않지만 스탬프는 사무실에서 직원이 별지에 찍어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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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을 돌아 아래쪽 길로 빠져나와 큰 길건너에 있는 신포국제시장 입구로 들어가 이곳 명물 닭강정을 구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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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시장 위쪽의 언덕을 타고올라 자유공원으로 진입하여 맥아더장군 동상을 참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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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사진도 찍고, 최근 이 동상이 수모를 당할뻔 했던 일과 인천상륙작전 때 장군의 나이가 70세였던 사실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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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휴식장소에서 닭강정을 시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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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에는 그렇게 맛있는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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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공원을 내려와 차이나타운을 한 바뀌 돌아봅니다. 오래 전에 자동차로 찾아와서 걸어다닐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자전거의 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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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문화관 바로 옆에 있는 오늘의 마지막 순교성지 제물진두순교성지를 찾아갑니다.

경당 외관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을 감싸는 두 손 모양을 형상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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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진두는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거점이자 인천 지역 최대 순교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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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기념 경당 입구 

 

 

1800년대 중후반 흥선대원군이 조정을 통치하던 시기, 조선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인천 지역은 서양 세력이 조선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자, 선교사들에게는 선교활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국과의 통상과 이질적 사상의 침투에 완고했던 조정은 외세와 함께 천주교 신자들을 조선 침략의 공범으로 내세워 박해하기 시작,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인천 제물진두(祭物津頭)에서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의 증손자인 이연구와 이균구 등 열 명이 처형되었고, 1868년 4월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에 의해 일어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무덤 도굴사건과 잇따른 서양 세력의 침공과 관련해 조선 정부는 천주교인들에게 책임을 물어 서양 배와 관련된 장소에서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진두(津頭), 곧 나루터에서 신자들을 공개처형함으로써 서양세력의 배척하는 척사(斥邪) 의식을 고조하고 천주교를 금하는 경종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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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진두 성지를 관리하는 인근의 해안 성당으로 올라갑니다. 점심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무실이 문이 잠겨서 성체조배만 하고 자리를 뜹니다. 


1868년 무진년(戊辰年) 4월 부평 읍내에 살던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년)의 이모인 김씨(1810-1868년), 남편 손 넙적이 베드로(1800-1868년), 사위 백치문 사도 요한(1826-1868년),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고 인천으로 압송되어 제물진두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1871년 신미년(辛未年) 5월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李在誼, 1785-1868년, 이승훈의 장남 이택규의 아들, 1868년 5월 28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아들 이연구(李蓮龜)와 이균구(李筠龜) 형제가 미군 함정을 살피다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이어서 인천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 이재겸(李在謙, 이승훈의 3남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의 아들, 1968년 체포되어 1871년 유배지에서 사망)의 부인 정(鄭)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李明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체포되어 이곳에서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1821-1846년)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여 1년 여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본 후,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인근의 포구에서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  또한 1888년 7월 22일에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Joannes Marie Blanc) 주교의 초대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 4명(프랑스 국적 2명과 중국 국적 2명)이 이곳 제물포항을 통해 순교자의 땅인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던 곳으로 이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천교구는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 건립 추진 중인 ‘이승훈 역사문화 기념관’ 건립 사업을 2016년에 완성할 예정이며, 이 같은 성역화 사업이 하나씩 마무리 되면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를 비롯한 인천 지역의 모든 성지를 잇는 성지순례길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해안성당을 끝으로 성지 순례를 끝내고 월미도로 페달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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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으로 여러가지 해물을 허벌나게 많이 준다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감사하게 넉넉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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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료의 질 보다도 양은 분명히 많은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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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에 아직 개통을 못한 인천의 애물단지라는 모노레일 아래를 달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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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입구로 다시 되돌아나와서 북쪽을 향하여 중봉대로를 달려서 원전교 직전에 원창교에서 심곡천 천변 자전거 길로 진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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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호수공원으로 올라가서 공원을 둘러보면서 자전거 길을 달려서 검암역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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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암역에서 공항철도로 점프하여 목요정기라이딩 집결지인 노들나들목으로 들어가 뒷풀이로 저녁을 먹고난 후 중랑천을 따라 귀가하는 길고도 멋진 인천 순례길 하루였습니다. 동행한 일행들에게 깊은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첨부 : 성지순례12차 -GPX파일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98015?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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