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차 예산, 배나드리, 신리, 합덕, 솔뫼, 원머리, 공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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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차 예산, 배나드리, 신리, 합덕, 솔뫼, 원머리, 공세리

20170502 용산역에서 06:23 무궁화 열차로 예산에 08:11에 도착하여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09:00에 순례길 라이딩을 시작한다.
오늘은 3명이 함께 차도를 피하여 예산과 당진의 넓은 평야를 달리며, 성지 근처에 있는 추사 김정희 고택, 김옥균묘도 함께 둘러볼 계획이다.

순례코스는 예산역-예산성당-배나드리-신리-추사김정희고택-추사묘소-여사울-합덕-솔뫼-신평-원머리-공세리-김옥균묘-충무공묘-온양온천역에서 마감하여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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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역에서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마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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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한국인 신부에 의해 건립된 유서 깊은 예산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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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64호(성당과 사제관)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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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가 끝나자 합덕 인근 지역에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81년부터 내포 지역을 담당하게 된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는 이 지역 공동체를 방문하고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며, 이후 7-8년 동안 합덕과 그 인근 지역인 고덕면, 신암면, 예산읍, 당진읍 등에서 매년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이때 신자 공동체들 가운데서 주목받을 만한 곳 중 하나가 간양골(현 예산군 예산읍 間良里) 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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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성당은 전형적인 삼량식(三樑式) 성당 건축으로 외관의 구성은 단순하나 처마돌림 띠, 창 둘레 아치 장식 등의 비례가 뛰어난 근대 성당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 신부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로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으며, 일본의 건축문화를 수용하였으나 혼재하지 않고 서양의 건축문화를 직접 수용하여 토착화한 건축양식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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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정면에 조성된 성모동산과 성모상 

 

1889년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 Pasquier, 朱若瑟) 신부는 이듬해 8월부터 간양골에 거처하면서 내포 지역 중 북쪽과 서쪽(천안, 아산, 예산, 직산)을 관할하였다. 하지만 1894년 동학 농민 항쟁으로 ‘간양골 본당’은 폐지되었고, 이 지역은 양촌(현 합덕) 본당으로 관할이 이전되었다. 

한편 양촌 본당은 1898년 본당을 합덕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본당 이름을 합덕으로 바꾸었다. 1921년 합덕 본당으로 부임한 페랭(P. Perrin, 白文弼) 신부의 사목으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1927년 예산 본당이 분리 ·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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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 성당 왼쪽으로 성모상, 교육관이 자리하고 있다.성당 뒷마당에는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어 있다. 


128년의 성당 역사를 간직한 느티나무와 잘 어울리는 예절의 고장, 예산성당을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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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동행한 친구의 추억이 서려있는 초등학교, 군청앞의 옛집터 등을 돌아보고 우린 배나드리 성지를 향한다. 

 

 

1시간이상을 들판 농로길을 달려 사과밭 옆에 있는 헛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배나드리를 향하여 올라갔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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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 휴식장소로 뒤돌아 와서 보니 휴식하면서 자전거를 세워두었던 바로 그 옆에 있는 연두색 철문 보이는 모퉁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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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철문 옆을 살피니 순례자 확인 스템프 박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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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지였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 사진을 몇 컷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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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형벌을 당한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의 순교사를 읽다보니 가슴이 아프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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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울타리를 살피니 위의 배나드리성지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명칭 또한 바로 이런 지형적 위치에서 연유되었다.

 

1817년 10월 이곳에 밀고자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갔다.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1880년대 초까지도 신자가 한 집도 없었으니 아마도 배교하여 석방된 신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생각되며 또한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하고 철저하였었나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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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황금들녁길 맞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두번째 순례지, 신리성지에 도착하니 예산벌판 만큼이나 성지가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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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녁 논 가운데 세워진 특이한 형태의 성당 건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옥상으로 올라 사방을 살핀다. 위로 올라와 보니 와~ 더 넓다.

가을 벼이삭이 누렇게 익었을 때 다시 한번 찾아와야 하겠다고 저절로 다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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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읍 신리 성지는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되었지만 불과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불구불한 길에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어 택시 기사나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만 했다. 20-30평 정도 됨직한 자그마하고, 낡은 함석지붕으로 인해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공소 건물이 철조망에 둘러싸여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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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손자선 토마스(孫--, ?-1866년) 성인의 생가이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다블뤼 안(Daveluy, 安敦伊, 1818-1866년) 주교가 머물며 내포 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이었다. 마당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와 성모상이 그 허전함을 달래주었었다.

 

말하자면 신리성지는 조선의 카타꼼바라 할 수 있고, 5대 조선교구장 성 다블뤼 주교관과 성 손자선 토마스 생가, 성 위앵 신부, 성 오매트르 신부, 성 황석두 루까 선교 활동지이며, 교우들을 위해 붙잡힌 곳이다. 2km 인근에 성 손자선 토마스와 무명 순교자 묘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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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의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되기 전에 피신한 이곳에는 거의 기적적으로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서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아 1857년부터 새 자료를 발굴해 프랑스어로 옮기고 목격 증인들을 찾아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들이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바로 신리의 주교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연풍 출신의 성 황석두 루카와 함께 신리에서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등과 같은 수많은 교회 서적들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이처럼 신리는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보고이자 최초의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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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손자선 성인 생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 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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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를 뒤로 하고 기왕 이곳에 왔으니 추사 김정희 고택으로 향한다. 도로 사정이 꼭 섬으로 들어 가듯이 시간이 좀 걸리는 곳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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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와 사랑채만 보아도 추사는 명문 부자 집안임을 쉽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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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부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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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을 중심으로 화순옹주와 월성위 김한신의 합장묘가 있고, 그 옆으로 정조가 내린 열녀정문이 있는 일대이다.

그 옆으로는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예산의 백송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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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홍문 우측으로는 추사의 고조 김흥경의 묘가 있다.

추사 고택을 벗어나 다시 세번째 순례지 여사울로 가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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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로에 진입하여 뒤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만 깜박하고 구양로 쪽으로 올라가다 점심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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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공직에서 은퇴 후에 이곳에 살면서 자전거를 타는 분 두 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예산에 고을에 대한 수다까지 ...ㅋㅋ 동병상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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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맛 있다는 한국 커피 한 잔으로 ... 남은 여정을 챙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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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과 두 개의 첨탑을 갖고 1929년에 준공된 충청도 최초의 본당! 덕평로 도로변에서 쉽게 진입한다. 

합덕 본당은 바로 이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20여 년이 넘어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본당이다. 

두 개의 첨탑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하며 고딕 양식으로 1929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합덕 성당의 전신은 1890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설립된 양촌 성당으로, 퀴틀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년)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1899년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 제7대 주임인 페랭(Perrin, 白文弼, 1921-1950년 재임) 신부 때 준공된 것으로, 페랭 신부가 6.25 때 체포되어 순교한 슬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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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왼쪽으로는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성당 정면에서 신자들을 반기는 예수성심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돌면 초가지붕 아래 설치된 본당 주보(主保)인 성가정상과 함께 너른 잔디광장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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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지나 성당 뒷마당으로 내려가면 야외제대와 또 하나의 잔디광장 그리고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1813-1866년)와 6.25 순교자인 페랭 백문필 신부, 윤복수 라이문도 총회장, 송상원 요한 복사의 순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양들을 위해 끝까지 성당에 남은 백 신부는 1950년 8월 14일 고해성사 중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고, 윤 회장과 송 복사 또한 백 신부의 곁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황석두 성인 순교비와 6.25 때 순교한 분들의 순교비와 가묘가 성당 뒷마당에 자리해 있다. 

합덕 본당은 30년간 본당에 재임하다가 6.25 때 순교한 백문필 신부를 기념해 1957년 성당 옆에 ‘백 비리버 문필 신부 순교비’를 건립하였고,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순교비는 2005년 본당 설립 115주년과 순교 55주년을 맞아 그 옆에 나란히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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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평로를 따라 솔뫼로 진입하니 전방에 솔뫼성지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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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반기는 성지 입구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기념해 교황과 성 김대건 신부가 남녀 어린이와 손을 잡고 웃고 있는 토피어리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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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정비된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뫼산(山)자 모양의 정문과 그 옆의 예수성심상이 자애로운 미소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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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지다.


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金澤鉉)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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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고 30년 뒤인 2014년 8월 16일, 나머지 3대 순교선조들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라 4대 모두 복자와 성인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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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성지에는 십자가상과 성모마리아 상이 있는데, 푸른하늘과 매치 되어 더 빛나게 보인다.

특히 야외 대형 십자가 상은 돌무덤 위에 솟아난 십자가 모양인데, 십자가 크기가 장엄하여 엄숙한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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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정면에 조성된 솔뫼 아레나와 생가 사이에는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m 크기의 솔뫼 성모상이 정겨운 시선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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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광장 솔뫼 아레나에는 그 둘레에 12사도들의 조각상을 배치했다.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신해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 전주 ·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내던 중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75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再福)이라는 아명으로 솔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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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을 지나면 소나무 숲속에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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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자리 벽면으로 유리타일로 제작된 십자가의 길 15처와 조각 작품들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가 순례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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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가 수차례 체포되기를 반복하고, 1805년부터 10년간의 긴 옥중 생활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셋째 아들 종한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붙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둘째 아들 택현은 1827년 아들 김제준과 손자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전시관 내부.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성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그 해 10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하였다. 유학 중에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만 대했을 뿐, 김대건 신부 또한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1814년 증조부인 김진후로부터 시작하여 김대건 신부까지 32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1906년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Kremff)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인근의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문필(Perrin)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m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기념탑을 세웠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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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 찍는 곳인데.. 조각상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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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안드레아 기념성당 성전내부 십자가와 제대, 감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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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맞은 편에 있는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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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앞에 있는 여러 초상들 중에서 가장 내 맘에 드는 사진이다. 

 

2004년 복원한 성 김대건 신부 생가.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기념해 앉아서 기도하는 교황 동상이 설치되었다.

2014년 8월 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 성지를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고, 그해 9월 25일 문화재청에 의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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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 속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 순교, 족보에는 漢鉉으로 나옴),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사제품 받고 1년 만인 1846년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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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돌아본 성지 중에서 가장 잘 꾸며진 성지가 이곳 솔뫼 성지가 아닌가 싶다.

주차장 앞 유체밭에서 사진을 찍는 순례객들의 뒤로 하고 우회전 하여 신평로를 따라서 신평성당에 이르니 많이 지친다. 

가까운 슈퍼에서 이온 음료와 아이스크림으로 에너지를 보충한 후 신평성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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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신평성당은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가 머물던 거룩한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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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머리(당진군 신평면 한정리)는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병인박해(1866년) 당시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머리가 변형된 것으로 주로 염전과 논농사를 주로 하며 살던 박씨, 양씨, 조씨, 문 등이 신앙을 받아들여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미 병인박해 때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마침내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현재 한정리(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는 무진년(1868년)에 수원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 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사촌 형인 박태진 마티아와 함께 수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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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외벽의 부조상. 성 김대건 신부를 중심으로 좌우에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가 부조되어 있다.

 

이들 박씨 형제 외에도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원머리(신평) 출신 19분의 순교자들에 대해 치명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 도미니코 회장, 박 회장, 유 서방, 김동 4인이 정묘년(1867년)에 홍주(홍성) 감옥에서 순교하였으며,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 4인이 무진년(1868년)에 홍주에서 같이 순교하였으며, 또 같은 해에 박 요한과 문 마리아가 해미에서 순교하였고, 원씨, 김 마리아 2인이 홍주에서 정묘년에 순교하였고,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닐라, 양정수, 양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 한 마티아 6인이 병인년에 홍주에서 순교 치명하였으며, 같은 해 김백선이 해미에서 순교하였으니, 이곳 원머리에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심 또한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다시 페달링을 하여 원머리성지로 향한다. 묘소와 안내판이 있고 그 옆에 신평성당에는 없던 순례자 확인 스템프가 박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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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현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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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 순교자의 묘소가 있는 성지이며 초창기 박해 시대 때 많은 교우들이 피신하여 정착한 교우촌 지역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말이다.

이곳에는 1784-5년대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주변 내포지역과 함께 삽교천 물줄기를 따라 신앙이 전해져 왔고, 그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의 수기(1791-2년)에 의하면 1790년대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원머리 지역은 아산만의 물줄기와 삽교천 하부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며 당시 밀물이 들어오면 사방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섬의 모양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천혜의 요지인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온 많은 교우들은 주로 염판(불로 바닷물을 지펴서 증유하여 소금으로 만드는 작업)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다.

오늘날 이곳은 제방과 둑을 쌓으면서 논과 밭이 만들어져 과거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공소들뿐이지만,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엿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 지역이다. 

 

1929년 초창기 원머리 순교자 묘.현재 남은 것은 공소의 허름한 건물들뿐이지만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장한 순교자들과 이런 오지에서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황량한 바닷바람과 관아의 눈을 피해 살아온 많은 교우들의 삶의 흔적이 시대의 한파와 변화 속에서 그 참된 가치가 묻혀왔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성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었고 그 해 전대사 성지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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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머리를 뒤로 하고 삽교천로를 지나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공세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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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을 지나 언덕 위에 있는 내포 지방의 신앙 못자리 공세리 성당으로 올라간다.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문의.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되었다가 고종 때 폐지되면서,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1897년 그 자리에 공세리 본당 구(舊)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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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부터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드비즈 신부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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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으로 순교한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 현양탑. 부조상 아래에는 공세리 지방 출신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다.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은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 사바스, 박원서 마르코, 세례명이 알려지지 않은 박익서 3형제가 나란히 잠든 묘소가 있던 곳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우리의 신앙 선조들 중에는 전국 곳곳에 이름도 채 남겨 놓지 못한 채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무명의 순교자들이 많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박씨 3형제는 겨우 그 이름과 몇 가지 행적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 그리 상세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병인치명사적” 제11권에 보면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며 즐거워 …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 …”라고 이들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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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본당 걸매리 출신 박의서.원서.익서 순교자를 상징하는 박물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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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잠자리를 말없이 지켜보는 성모상이 건립되어 있다. 

성당 옆으로는 한적한 오솔길도 마련되어 있는데, 이 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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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리신 예수와 같이 우리 선조들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시대가 가져온 험한 박해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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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성당 옆에는 오래된 거목이 한 그루 있다. 그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그저 무심한 듯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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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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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공세리 성당 앞에서 함께한 친구들과 기념 촬영을 한다. 수고했어 발렌티노, 그리고 아직 부인만 외짝인 계인 ^^

공세리 성당을 빠져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마을 슈퍼에서 마지막 에너지 보충을 이온음료와 빵을 흡입한다.

그런데 발레티노가 단장으로 있는 레오지 주회 날이라서 온양온천역으로 마을버스로 점프를 주선 한다. 다행히 접이식 자전거와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늦었지만 2차주회 시간이내에 세종로 성당에 도착하였다.

 

남은 두 명은 아산로를 따라 달리다 김옥균묘를 향하여 업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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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고,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이 6세까지 살던 생가지와 묘이다.

김옥균은 한말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신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근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 하려던 노력이 대원군의 수구파와 대립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상하이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되고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양화진(楊花津)에서 다시 능지처참 되었다. 

 

김옥균을 존경하던 한 일본인이 효시(梟示)된 머리를 일본 도쿄[東京]의 청산외인묘지(靑山外人墓地)에 묻고 비를 세웠는데, 1914년 9월 11일 의발(衣髮)을 이곳으로 이장,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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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온산로 고개를 넘어 충무공이순신 묘를 가려하는데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땅거미가 ...
더구나 서해로에서 내 차가 펑크가 나서 투뷰를 교체 하는라 약간 지체 하였는데 ... 충무공묘는 다음에 현충사 포함하여 다른 기회에 찾기로 하고 응봉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또 다시 계인 자전거도 뒤바퀴에 바람이 다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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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튜브를 교체한다. 타이어에 얇은 유리조각이 박혀 있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장거리 차도를 투어 할 때는 캐브라 타이어를 빼고 무거워도 와이어로드용 타이어를 장착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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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날씨가 덥지 않기에 그래도 수리하는데 큰 지장이 없지만 기온이 높을 때는 라이딩 중에 멈추어 수리를 하면 땀은 비오듯 하고 그늘마저 없는 곳에서는 정말 괴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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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에 석양 물드는 것을 처다보며 마지막 남은 거리 7km를 달려 온양온천역에서 저녁을 먹고 무궁화호 예매한 20:46 기차에 오르니 피곤이 업습하지만 마음만은 상쾌한 하루였다.

함께한 두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 상단 첨부 : 19차_예산배나드리신리솔뫼공세리.gpx

 

※ 경로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90830?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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