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차 강화 진무영성지, 관청리 형방(외규장각), 황사영 출생지, 갑곶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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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차 강화 진무영성지, 관청리 형방(외규장각), 황사영 출생지, 갑곶순교성지

관리자 0 8631 0

20170506(토) 20차 순례 코스는 강화도에 있는 진무영성지, 관청리 형방(외규장각), 황사영 출생지, 갑곶 순교성지이다.

05:20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06:10 집을 나서 서울역에서 공항 철도를 타고 집결지인 청라국제도시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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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에 모두 8명이 모였다. 

오늘은 알자연(ROTC자전거전국연합) 회원들과 15기굴렁쇠 회원들의 정모를 병행하여 라이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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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하면서 날씨 이야기, 코스의 위험구간에 대한 주의를 공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미세먼지가 6배나 높다는 기상예보와 5월 첫주 연휴가 많이 끼어서 참석 신청을 했다가 불참을 알려온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다행히 생각보다 미세먼지 농도가 크게 느끼지지는 않을 정도여서 역앞 광장을 돌아서 동쪽 환경로로 출발한다.

대부분 검암역에서 시천교를 건너서 출발하지만 오늘은 청라역에서 경명대로를 따라가다 좌회전하여 환경로-경인항대로-거첨로 -청운교를 넘어서 약암로 좌측에 분리된 자전거 도로를 타고 가다 자전거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건널목을 건너 약 2km를 편도 1차로 차도를 주행하다 우측 농로길로 진입하여 SK주요소에서 다시 약암로에 합류한다. 4회 정도 이 길을 이용하여 자전거로 초지대교를 건너갔지만 매번 갈 때 마다 대형 트럭들과 과속 차량들이 많아서 위험을 느끼는 도로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 제발 빨리 이 길의 확장 공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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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대교 서단에서 우회전하여 해안동로의 자전거 도로를 따라 광성보 입구에서 휴식을 한다.
오는 도중에 불행하게도 약암로와 학운산단1로 삼거리 앞에서 좌회전 하려는 트럭을 늦게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잡는 바람에 낙차하여 얼굴에 찰과상을 입고 119 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간 일행 중 한명의 건강 검진 결과를 확인 하는 통화를 듣고 불행중 다행이라 남은 구간에서 돌발 상황에서 보다 안전 라이딩을 다 같이 재차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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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강화 나들길 안내판도 보이고, 미세먼지 때문에 시계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바닷가 풍경이 낯설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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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갑곶까지 가서 강화시내로 진입하려 했지만 강화교를 건널 때에 다시 갑곶 쪽으로 돌아 나와야 하기 때문에 해안동로에서 좌회전하여 연리마을 앞의 넓은 농로를 타고 강화동로를 만나 신원파출소 앞을 통과하여 대원고개를 넘어가는 것이 빠른 길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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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힐을 염려하는 일행 때문에 선원초등학교 앞을 통과하여 중앙로로 진입하여 달리다... 다시 농로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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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된 4대문 중 하나인 남문에 도착하여 기념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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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에는 강도남문(江都南門)이란 글자가 있는데 고려시대 몽고를 피해 개성에서 이 곳으로 천도를 하며 강도[江都]라는 표현을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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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쪽에 새부리 처럼 뛰어나온 시설이 보이는데 이것은 적이 성을 공격할 때에 적에게 기름을 부어 흘어내리게 하는 용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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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남문을 통과하여 뒤쪽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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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이 다시 다른 글자이다. 안파루[晏波樓]라고 쓰여 있다.

몽고의 2차 침략에 대비해 무신정권의 최우(崔瑀, 후에 崔怡로 개명)는 고종을 종용해 1232년(고려 고종 19년) 강화로 천도했는데, 이듬해인 1233년부터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을 쌓아 나갔다.

그 때의 내성 자리를 기준으로 해 조선조 숙종 때 쌓은 성(城)이 대체로 지금의 강화성에 해당한다. 지금 복원한 남문도 그 때 중수한 남문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곳은 병자호란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년) 1월 기사를 보면 ...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임금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 

적의 세력이 이미 밀어닥치니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놓고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는 불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타죽었다.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도 따라 죽었다.


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一僕從死.

 

김상용(金尙容)은 누구인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이렇게 읊으며 청나라로 잡혀간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형으로 척화파(斥和派)의 선봉에 선 분이다.
그는 본래 인왕산 아래 청풍계(淸風溪)에 살았는데 겸재 정선은 그의 고택이 남아 있는 청풍계 그림을 여럿 남겼다.
기회 되면 국립박물관, 간송박물관, 고려대박물관에 남아 있는 겸재의 그림을 통해 선원 선생의 고택을 만날 수 있다.

 

이 선원 선생이 뜻한 바 있어 지금의 강화 선원면 선행리(仙源面 仙杏里)에 집을 짓고 은거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종묘(宗廟)와 세자빈, 세손을 모시고 강화로 왔는데 강화가 함락되자 스스로 자결한 것이다.
나라가 힘 없으면 슬픈 역사만 남는다.

 

남문을 떠나 길을 건너면 강화군청이 나오고 좌측 골목길을 200m 정도 가면 용흥궁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 좌측 끝에는 비각이 하나 서 있는데 김상용 순절비(殉節碑)가 두 개 서 있다.
강화유수를 지낸 공(公)의 종증손 김창집(金昌集)이 세운 비와 7세손 김매순(金邁淳)이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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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가 되어 지나던 주민에게 물어 맛집을 찾았다.

간판은 송해식당인데 송해는 안보이고 여주인 남편이 75세인데 자전거를 탄다고 한다. 김치찌개와 쭈꾸미 비빔밥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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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니 한결 바람이 더 세어졌다. 가까이 있는 강화성당내에 있는 진무영성지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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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섬이자,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섬 강화도.
궁지로 가는 길에는 한옥으로 유명한 ‘성공회 강화 성당’이 보인다. 오르막길 우측에 강화초교가 있고, 그 맞은편에 ‘천주교 강화 성당’이 있다.
성당의 정문에서 왼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제대와 십자고상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진무영 성지이다.

 

진무영(鎭撫營)은 숙종 4년(1678년) 강화도와 주변 지역의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軍營)이었다.
이러한 방어 체제를 구축한 이유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 서울과 가까워 물길로 아침에 떠나면 해질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해도와 삼남(三南) 지역을 연계하는 수로와 한강 하류가 연계되는 요충지에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화도는 일찍부터 중요한 군사 방어기지로 간주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가 조선에 압박을 가하면서 강화도의 군사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강화도는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국왕 일가와 조정의 신하들이 피난할 수 있는 지역인 보장처(保障處)로 지정되었고, 행정단위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비상시, 경기 · 황해 · 충청 · 전라도의 연안 읍들이 강화유수부를 중심으로 군병과 군량을 지원한다는 해안 방어 체제의 기조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방어 체제는 인조(仁祖) 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정비 되었고, 그 일환으로 진무영이 창설되었다. 이로써 강화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인 경기도와 황해도 연안 읍을 통솔하는 하나의 해안 방어 체제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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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영 성지 안내판 

 

그런데 영조(英祖) 대에 이르러 진무영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방어 체제는 변화를 맞게 된다. 

청나라와 조선의 긴장관계가 완화된 것이 한 원인이었다. 또한 국방정책도 비상시 수도를 버리고 안전한 장소로 피난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를 사수하는 ‘도성수비론’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강화유수부의 전략적 기능은 서해안 지역의 중요한 요충지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무영의 군사 활동도 이전보다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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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성당 내에 마련된 진무영성지, 가운데 야외제대가 있고 입구 쪽에 성모성심상이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진무영의 기능이 다시 확대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866년에 발발한 병인양요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데에 대한 보복과 통상을 목적으로 프랑스 극동함대가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10월16일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점령하고, 대량의 서적과 무기, 금은괴(金銀塊) 등을 약탈했다. 그러나 11월9일,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패퇴했고, 이를 계기로 11월11일 강화도로부터 철수했다.

 

이처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가 손쉽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중앙 및 각 지방의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그러한 가운데 진무영도 다시금 해안을 지키는 최대의 해방(海防) 기지로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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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심상이다.

이제 진무영의 순교자들을 살펴보자.  
1868년 5월(음) 장치선(張致善) · 최영준(崔英俊) 등이 진무영에서 효수(梟首)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

의정부가 아뢰기를, 

“지금 우포도청이 보고한 바를 보니, ‘사학(邪學) 죄인 장치선(張致善)과 최영준(崔英俊)은 양인(洋人)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의 진상을 모두 자복했다’고 합니다. 치밀하게 일을 꾸며 화응한 죄는 흉악하고 패역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천지간에 이보다 심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잠시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인 장치선과 최영준을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군민(軍民)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5년 5월 22일). 

 

장치선과 최영준의 죄목은 ‘서양인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이었다.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였다? 이것만으로는 장치선과 최영준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장치선은 1830년생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다. 

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吳子賢)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명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는 장성한 후에 많은 기도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과도 만났다. 

 

그는 충청도 제천에서 살고 있을 때인 1866년 봄에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가 붙잡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3월경(음)에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오던 길에 지자익(池子益)을 만났다. 이때 지자익은 박해의 사정을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고 나아가서는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는 것을 꾀하였다.
이를 듣게 된 장치선은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연락의 책임을 맡아 적극 도왔다. 그들이 서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배를 구입하여 출항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리델 신부(F. C. Ridel, 李福明)와 연락이 닿았다. 마침 리델 신부도 중국으로 가서 조선의 박해 소식을 전하고자 할 참이었다.
장치선 등은 리델 신부를 피신시키기로 하고, 출항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5월(음) 장치선은 리델 신부와 최영준 · 최선일(崔善一) 등과 함께 충청도 신창 용당리(현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포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일행은 중국 산둥 반도의 연태(沿台, 즉 煙台)에 얼마 동안 머물다가 리델 신부와 조선인 3명은 남고 장치선 등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1866년 10월 프랑스 함대가 제2차 조선 침공을 단행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패퇴하였고, 이를 계기로 철수를 결정하였다. 퇴각하기 전, 장치선은 김계쇠(金季釗) · 박복여(朴福汝) 등과 함께 프랑스 함대로 가서 리델 신부와 만났다. 리델 신부는 통역으로 프랑스 군함에 승선하고 있었다. 장치선 등은 리델 신부에게 박해의 상황, 조선에 남아 있던 페롱(S. Feron, 權)과 칼레(A.-N. Calais, 姜) 신부의 소식 등을 전하였다.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은 군함을 타고 중국 상해로 가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러다가 1867년 장치선은 김계쇠 · 최영준과 함께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 귀국할 때 칼레 신부는 은자(銀子) 70량을 주며 신자들의 상황을 잘 살펴 속히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했다. 덧붙여 신부 1명을 보낼 것이니 영접할 방법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귀국 후, 장치선은 1867년 10월(음) 백동(현 혜화동)으로 이사하여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가 1868년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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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외부 모습, 좌측에 굴뚝 처럼 특이한 탑과 꼭대기에 예수상이 있다.

 

최영준(요한)은 1811년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최인서(崔仁瑞)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39년경에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서울 아현에 거주하면서 회장직을 수행했고, 선교사들과 지도급 신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서상기(徐尙基, 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1866년 5월(음)에는 장치선 등과 함께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최영준은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프랑스 함대가 철수할 때에 장치선 등과 함께 중국 상해로 갔다가 1867년 장치선 · 김계쇠와 함께 귀국하였다. 서울 산막리에서 쌀장사로 생활하던 최영준은 1868년 4월 10일(음)에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리델 신부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박해의 상황을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려고 했다.
더 나아가서는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했다. 장치선은 4월 18일(음) 포도청에서 있었던 문초에서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진술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인 흉악하고 패역한 일’로 규정했다.
그리고 장치선과 최영준을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처형하도록 했다. 5월 22일(음) 장치선과 최영준은 진무영에서 효수되었다.
진무영으로 보내 처형한 이유는 강화도의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서 처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양화진과 같이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강화도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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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모습

 

한편 진무영 순교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순교하였다. 박 서방은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박순집은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그들의 유해 발굴에도 큰 공을 세운 이였다. 하지만 박 서방의 신앙생활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 서방도 마찬가지다. 조 서방은 조 참봉(參奉)의 부친이고, 나이가 50여 세라는 점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최영준과 함께 잡혔다는 점을 볼 때, 최영준과 어떠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976년 강화문화원에서 간행한 “강화사”(江華史)에는 강화 농협이 있던 자리로 추정했다.
성지 연구가인 한종오(베드로)도 문헌과 구전을 근거로 같은 결론을 내렸다.
현재는 옛 강화 농협 자리에 있는 은혜 교회부터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강화 성당까지를 진무영 터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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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병인양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던 신자들을 총융진(總戎陣)이 있던 양화진에서 처형하도록 했다.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오늘날에는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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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성당 입구에서 올라가면 강화고려궁지의 정문인 승평문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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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안내판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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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채 100미터가 안 되는 곳, 이곳이 조선 시대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의 현장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 1232년 고려 고종 때 강화천도와 함께 세워진 궁궐터는 1964년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 보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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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고려궁지 내에 있는 이방청. 

조선시대에 건립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강화유수부 동헌과 유형문화재 제26호인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 동종(1999년에 만든 복제품,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이동 전시) 등만 남아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약 2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비롯해 단군 신화의 유적인 참성단과 삼랑성 그리고 고려 시대 항몽의 역사, 팔만대장경 및 금속활자와 고려자기 등을 꽃피웠던 곳이 바로 강화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강화도 조약 등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강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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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2003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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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숨결이 서려 있고 고려가 환도할 때까지 39년간이나 슬픈 역사가 서린 승평문을 빠져나와 이제 장무공 황형장군 유적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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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형장군은 52세 때 삼포전쟁 당시 외세의 도움없이 순수 조선군 선봉장군으로 왜군을 섬멸시켜 승리로 이끈 명장!

506년 전 일본과의 전쟁인 삼포왜란을 승리로 이끈 영웅!
장무공은 육지에서 기마병(騎馬兵)을 이끌고 당시 무사(武士)들이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칼날에 깃털을 달은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로 예도(銳刀)처럼 허리에 찬 왜검(倭劍)으로 무장한 왜군 5000여명을 “40일 동안에 마치 볕집을 베듯이 300명 이상을 사살하고 수십 척의 배를 제압을 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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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임금은 삼포전쟁 승리의 공으로 황형 장군 등 188명은 1등으로, 현감 백사만 등 326명은 2등으로, 감사 권영생 등 359명은 3등으로 “모두 873명은 역사에서 잊혀진 영웅들이었다” 

“조선의 4대 전쟁인 삼포왜란, 임진왜란, 병자호란, 정묘호란은 역사의 거울이다” 임진왜란은 왜군 15만여명이 조선을 침공한 전면 전쟁이다.
1510년 4월 4일은 삼포왜란 때 일본과의 전쟁에서 장무공 황형 장군이 40일 전투에서 이긴 날이다. 

조선은 늘어난 밀교역(密交易)을 엄중히 단속하게 이르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왜인이 삼포에서 난(亂)을 일으키게 되었다. 

1510년 삼포(동래, 울산, 창원)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잦은 학대와 웅천 현감의 왜인 세금 징수 등에 불만을 품고 대마도의 왜인난도(倭人亂徒)들은 4000~5000여 명이 오바리시(大趙馬道)와 야쓰코(守長) 등이 대마도주 아들 종성홍(宗盛弘)을 대장으로 삼고 수백 척의 배를 몰고 부산포에 침입하여 첨사(釜山僉使) 이우증(李友曾)을 죽이고, 부산부사(釜山府使) 이우회(李友會)와 제포부사 김세균(金世均)을 사로잡고 마침내 병사를 풀어 사방으로 노략질하고 더 나아가 웅천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동래 부사 목을 치는 등 270여명을 살상한 대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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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사용한 조선 최고 武士! 
검사복 발탁, 공조판서 두 번, 북방 여진족을 두 번이나 토벌한 영웅! 
황형 장군은 문무(文武)를 겸하여 정조 때 공조판서를 할 때는 조정에서 조선시대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개혁에 앞장섰다.
21세 때인 1480년 성종(成宗) 11년에 무과 급제한 이후에 대부분 북변(北邊)을 자주 침범하던 여진(女眞)을 토벌에 공을 세운 영웅이었지만, 의주 목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 변방의 요직을 맡아 날로 위명을 떨치던 황형에게 당시 무반의 지나친 세력을 꺼려하는 조정 문신들의 모함이 끊이지 않아 관직을 삭탈 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조선의 영웅 명장록(名將錄) 19인 
황형 장군은 남서북 국경을 침략하는 왜군과 여진족을 제압하고 1514년 서북방 국경을 침략하는 여진족을 두 번이나 제압한 공으로 "조선 명장록(名將錄)"에 제수되었다.
“최윤덕(崔潤德), 이준(李浚), 허종(許琮), 황형(黃衡), 신립(申砬), 변협(邊協), 김여물(金汝岉), 곽재우(郭再祐),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김경서(金景瑞), 유림(柳琳), 정충신(鄭忠信), 심총(沈摠), 임경업(林景業), 이원(李浣), 정봉수(鄭鳳壽), 신류(申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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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이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 알렉시오의 생가 터가 사당 재실 뒤편 공터로 추정 되고 있다.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황현장군의 유적지가 황사영 알렉시오의 생가 터라는 사실도 아이러니 하다. 장무공 유적을 뒤로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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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북로 철책을 따라서 순교자의 피로 물들었던 강화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갑곶성지를 향하여 옆바람과 뒤바람을 맞으면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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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북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강화대교 교각이 나타나고 그 뒤로 갑곶성지 표지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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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안으로 들어가니 조선시대의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격인 통제영학당 옛터 표지석과 안내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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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옆에는 예수님상, 성모상이 우릴 반겨주신다.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때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 온 역사의 현장인 강화는 그래서 호국의 기상이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서 혹독한 박해를 겪어야 했던 신앙 선조들의 믿음과 순교에 이르는 열정도 함께 지니고 있다.

 

강화 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이에 이은 병인박해 때, 어느 박해보다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던 병인년의 교난을 야기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이 바로 강화도,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강화대교 서쪽 끝에 있는 갑곶돈대(甲串墩坮, 사적 제306호)에서 일기 시작했다. 

갑곶돈대는 1679년에 축조되어 8문의 대포를 설치한 포대를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6년) 강화에는 모두 5진(鎭) 7보(堡) 53돈대(墩坮)의 국방시설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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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丙寅)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회장과 천주교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鎭撫營)으로 호송되어 효수(梟首)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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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갑곶진에서 순교한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순교자 삼위비.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박해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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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성지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표명하는 우리나라 중요한 성지 중 하나인 곳이다.

  

갑곶성지의 유래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초기인 1795년,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철종(哲宗)의 조모(祖母)인 송(宋)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申)씨를 각각 마리아로 영세를 준 것이 조정에서 알려지게 되어 왕족인 고부(姑婦)가 함께 1801년(辛酉迫害)에 순교하게 되자, 이러한 연유로 1786년(정조 10년)부터 자식 상계군(常溪君)의 역모 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여 살던 은언군(恩彦君, 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에 배소되어 처형되었고, 또한 신유박해의 순교자요 백서(帛書)를 쓴 황사영(黃嗣永)의 탄생지가 이곳 대묘동에 있어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시기부터 인연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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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고(高)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로 입국시키는 해로(海路)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甲串)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에게 잡혔다. 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가 되었고, 1856년 베르뇌 장(張) 주교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1857년 페롱 권(權) 신부가 비밀리에 입국한 요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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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은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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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 길을 따라 올라가면 갑곶 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좌측은 차량이 오가는 강화대교 우측은 자전거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강화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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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교의 모습, 네이버 지도에는 나타나지도 않은 다리이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다리인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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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교를 건너 김포대학로-애기봉로를 따라 애기봉 전망대로 향하였지만 초소 입구에서 초병에게 전망대 출입은 아쉽게도 통제 되었다. 2018년말까지 공사가 진행 중이이라서 출입이 통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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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이 이쁜 가금로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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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를 하기 위해 정리된 논 건너편에는 잘 가꾸어진 별장지대 집들이 보인다. 가금로를 따라 월하로 금포로 김포레코파크 정문 앞까지 달려서 굴다리를 건너 좌회전 하여 일산대교로 올라가는 인도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쳐서 한 참을 오락가락 했다. 3호선 대하역으로 마지막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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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대교 인도길은 자전거로 건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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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대교 위에서 올림픽대로를 바라보며 오늘도 무사히 89.7km의 순례길을 마무리 하며 시계를 보니 16시37분이다.

미세먼지가 좀 있었지만 서풍 덕분에 오후에는 비교적 빠르게 달릴 수 있었고, 큰 탈 없이 마칠 수 있어서 함께한 벗들과 후배에게 감사 인사 드린다.

 

※ 상단 첨부 : 20차_강화진무영_갑곶.gpx

 

※ 경로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90223?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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