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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차 순례 - 단내, 어농, 죽산, 안성, 배티, 백곡

201705011 목요일 05:00 아침에 눈을 뜨면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 오늘은 경강선 이천역으로 가는 날!  

축복 받은 살레시안 스승 마신부님(아르키메데 마루텔리), 원선오신부님(빈첸시오 도나티), 노숭피신부님(노베르토)의 제자가 된 덕분에 졸업 후에야 1981년 성인 이름을 덤으로 하나 받았다. 안셀모! 나의 본명이다.  

이순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매일 같이 기발함이 넘치고 사랑으로 행하는 인생으로 초대받고 있음을 깨닫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결혼 40주년 축복장도 받았다.   

 

매주 내가 받은 초대장은 봉투에 담겨 오지 않는다. 

아침 햇살에 실려오는 새소리와 상큼한 공기에 실려오는 커피 향, 때론 24시해장국에 묻어 온다.

인생을 인생답게 살라는 선조 성인들의 초대~

카미노 드 산티에고로 떠나기 전에 우리의 위대한 선조 성인들의 신앙의 길을 알고나서야 비로소 야곱 성인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이고 도리가 아닐까 싶어 버킷리스트에 넣고 시작한게 오늘로 21차 순례, 특별한 방해가 없는 한 매주 두 번씩 떠나는 성지 순례길,

오늘은 단내~어농~죽산~안성~배티~백곡에서 선조들의 믿음과 ♡을 만난다. 안셀모의 초대가 화려하다!

 

회차가 거듭 될수록 새로 맞이하는 순례 길은 한걸음씩 더 경이롭고, 남은 여생에 온전히 몰입하라는 초대임을 느낀다.   

백악관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라는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많다는 알퐁소의 조언데로 ... 

배교냐, 목숨부지냐!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꺼이 죽음의 형벌과 믿음을 선택한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이 경이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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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 찾아갈 곳은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357에 있는 단내 성가정 성지다. 남한산성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안식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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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단천리로 가는 길목에 아침식사 할 곳이 있어서 설렁탕으로 아침을 먹는다.

 

단내성지 앞으로는 단천이 흐르고 뒤에 숲이 울창한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성지는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성직자를 조선 땅에 영입한 주역 가운데 하나인 순교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의 묘가 있는 어농 성지와도 지척이고, 단천리는 또한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주차장 입구에 이르니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숲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탁 트인 성가정 광장과 붉은 빛의 아름다운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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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제대와 위쪽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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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제대 좌측에 이천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 성인 순교비(五位聖人殉敎碑)가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계단을 오르면 말끔하게 단장된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의 묘소가 나온다. 
묘역 주위에는 유난히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마치 순교자의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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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좌측에 있는 성가정상으로 올라가는 정황섭 발렌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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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 묘역 전경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이 마을에도 휘몰아쳤고,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다.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뒷산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작은 할아버지께서 병드신 몸으로 홀로 잡혀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곁을 지켜드리고자 자진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함께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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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를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해 12월8일(음력)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덮어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그러나 정양묵 베드로는 당시 함께 순교한 수 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다. 끝까지 작은 할아버지 곁을 지키다 순교한 정양묵 베드로의 뜻을 기억하고자 2000년 4월 11일 남한산성 동문 밖의 흙 한 줌을 가져와 할아버지 묘 옆에 가묘를 만들어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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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 광장 제대 좌측 위에 설치된 성가정상의 자세한 모습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다섯 명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는 작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 이호영 베드로(李~, 1802-1838년)와 이조이 아가타(李~, 1784-1839년)는 남매 사이,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1782-1839년)와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1780-1839년)는 부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역시 순교 성인의 한 분이다.
성 김대건 신부는 1846년 귀국한 이후 동산 밑 마을을 방문하고 이웃한 단내 마을을 찾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런 다음 현재 정은 바오로의 묘소 앞 오방이 산모퉁이를 지나 배마실 공소를 거쳐 새벽 어스름에 은이 공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렇듯 단내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성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하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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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바오로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던 검은 바위 앞에 성모상이 세워져 있다. 


동래 정씨로 그 조부 시절부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서학(西學)을 접했던 정은 바오로의 집안은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촌형인 정섭과 정옥이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준 바 있다. 신유박해가 지나간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난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에 입교했고, 그의 어머니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 역시 입교하였다. 그들이 살던 단내 마을(단천리) 맞은편의 ‘동산 밑 마을’(동산리)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명인 이문우 요한(李文祐, 1809-1840년)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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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들러 성체조배를 하고 기도를 올린다. "주님 오늘 하루도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고 안전한 라이딩 순례길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당은 의자가 없다. 비닐 장판 바닥에 앉아서 미사를 드리는 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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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 정상에 설치된 예수성심상 앞에 서면 이문우 성인의 고향인 동산리와 성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경로를 조망할 수 있다는데 우리는 갈 길이 멀어서 서둘러 사무실 앞에 있는 순례 확인 스템프를 찍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윤유일 가족의 안식처 어농성지를 향해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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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농성지 입구로 내려가자 우측에 순교복자 윤유일 바오로 상이 나타나고 산 위로 올라가니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 파평 윤씨 가족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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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일 바오로상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하여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년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 해 6월 28일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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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순교자 묘역 입구에 있는 순교자 윤유일 바오로 순교 200주년 현양기념비, 아래는 묘역 입구 우측에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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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농 성지는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 1999년 예수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2002년에는 사제관과 성당을 마련했다. 
그 해 8월 13일 최덕기 주교에 의해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된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3위 순교자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를 현양하고 있다. 
이들 17위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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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묘역. 앞의 동상은 순교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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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에 순교한 밀사 윤유일과 그의 동료들을 비롯하여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등 모두 10명의 순교자들을 모셔 놓은 곳이다. 이 중에서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야고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신이 없는 의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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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일은 양근 대감마을 권철신의 제자로 교회가 창설된 지 3-4년이 지난 뒤에야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무렵 교회 지도층에서는 밀사를 선발하여 북경에 보낼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마침 성격이 온순하며 입이 무거운 30세의 윤유일이 밀사로 추천되었다. 그는 아직 신입 교우였지만 신심만큼은 동료들을 탄복시킬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그러므로 험한 북경 길을, 그것도 천한 상인 신분으로 왕래해야 하는데도 순순히 밀사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였다. 
특히 두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는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서 훗날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 필요한 성작과 제의 등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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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구베아 주교는 포도나무 묘목을 윤유일에게 주면서 재배 방법과 포도를 수확한 뒤 포도주를 담그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이어 1793년 말에는 동료 밀사 지황(池璜, 사바)이 북경을 다녀오게 되었고, 1794년 말에는 윤유일, 지황,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등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영입하였다. 그 결과 1795년 4월 5일에는 주 신부의 집전으로 조선 땅에서 최초로 부활절 미사가 봉헌될 수 있었다.
 
이 부활절 미사 때 사용된 포도주는 5년 전에 윤유일이 가져와 가꾼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땅에서 최초로 가꾸어진 포도나무였고, 최초로 빚어진 포도주였다. 북경의 포도나무가 조선에서 신앙의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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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4처가 있는 십자가의 강을 따라 내려와 소형주차장과 대형주차장 사이의 십자가동산을 지나 성당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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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농 성지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순교 영성과 성소를 불어넣어 주는 청소년 성지로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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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 뒤쪽으로 사제관과 식당, 언덕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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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이미 윤유일과 동료들을 순교의 길로 인도해 가고 있었다. 
부활절이 지난 어느 날 모든 사실이 조정에 밀고된 후 주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밀사 윤유일, 최인길, 지황은 끝내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에서는 이내 그들에게 갖가지 형벌을 가하며 주 신부의 종적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밀사들은 결코 용기와 신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참 천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 보다는 차라리 천만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천상의 기쁨이 넘친 얼굴로 순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로 윤유일의 나이는 36세, 최인길은 31세, 지황은 29세였다. 
순교 후 세 밀사들의 시신은 광희문(일명 시구문)을 지나 왕십리를 거치면 닿게 되는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 부근의 강물에 던져졌다. 이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현재 어농리의 무덤은 의묘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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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동산 (자세히 살펴보니 십자가 하나 하나에는 십자가를 만든 신자들의 기원과 소망이 작은 글씨들로 새겨져 있다.)

윤유일의 순교가 즉시 양근의 본가에 회오리를 몰고 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은 결국 유명한 순교 집안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01년의 박해가 일어나면서 부친 윤장과 숙부 윤현이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았고, 숙부 윤관수(안드레아)는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 사촌 누이 윤점혜(아가다)와 윤운혜(마르타), 운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한편 1801년 4월19일에는 교우들이 그토록 숨기려 애썼던 유일한 목자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한 뒤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5월 23일에는 강완숙 회장 마저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조선 교우들은 주 신부의 순교시에 일어났던 기적을 서로 전하면서 기억했고, 훗날 이를 북경 주교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본래 청명하였던 하늘이 홀연히 어두운 구름에 가득 덮이고, 광풍이 일어 새남터 모래벌판에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군사와 백성들은 이 날의 광경을 보고는 모두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1811년 조선 교우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신미년의 서한'에서)
 
윤유오의 후손들은 이후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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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에 설치된 아버지상과 그 위에 있는 예수성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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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우측에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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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들 가운데 위치한 어농(於農) 성지, 말 그대로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을 뒤로 하고 다시 다음 순례지 죽산성지를 향하여 달리다가 잠시 정자에 앉아 에너지바와 음료수로 목을 축이며 휴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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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상성지로 달리는 길은 중간에 일반도로 좌측 갓길을 따라 200m 정도를 역주행도 해야 하고, 서동대로4거리에서는 가드레일도 넘어야 한다.
가능하면 차도를 피해서 가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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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대로 4거리에서 38번 도로를 따라간다. 우측 밭을 보니 황토밭이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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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성지 입구에는 아주 큰 돌표지석이 있다. 아주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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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에서 우회전하여 종배길을 따라 들어가면 영성관이 나타나고 그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우측에 대형차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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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차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두 팔을 벌리고 우릴 반기시는 예수성심상이 보이는 사무실 옆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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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정문으로 들어가면 아름답게 꾸민 정원과 좌측에 사무실이 있다. 우선 스템프를 찍고나서 성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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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건물 앞에 순례 확인 스탬프가 놓여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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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당과 사제관으로 오르는 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 죽산에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부터 일찍이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인근의 교우들이 붙잡혀 오면 지금은 죽산면 사무소가 되어 버린 이곳에서 참담한 고문 끝에 처형되곤 했다.
 
여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5명에 이른다. 하지만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작통(五家作統,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19세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와 동학의 금압과 교도의 색출을 위하여 일부 집권층에 의하여 강행되기도 하였다. 1884년(고종 21)에는 내무부의 건의에 따라 「오가작통사목」이 마련되었다. 1896년에는 전국의 호적작성에 있어서 열 집이 한 통으로 편성되기도 하였다.)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 무차별적으로 교우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의 몸서리쳐지는 박해의 서슬을 생각해 볼 때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셀 수조차 없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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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당으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에 있는 석문판

 

죽산의 순교 사화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들뿐이다.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김 도미니코의 가족이 교우인 사실을 안 마을사람 십여 명이 작당을 하고 찾아와 열일곱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들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기어이 딸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자리에서 순교했다. 또 여정문은 그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일지라도 부자를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죽산에서는 부자와 부부를 함께 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이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순교한 처형 장소가 '잊은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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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앞에서 우측으로 아름다운 기와담이 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성전이 보이고 그 우측에 넓은 정원이 나타나고 야외 제대가 있다.
제대 맞은편에는 또다른 정문이 웅장하게 기와을 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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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건물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夷陳)터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이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죽산에는 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80여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이 주막거리는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길에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되곤 했다. 포졸들은 줄줄이 묶어둔 교우들을 툭하면 갖은 트집을 잡아 두들겨 패곤했는데 그 연유로 두들기는 두들겨 맞는 곳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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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와 좌우 현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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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 있을 특별한 평화통일 기원미사 현수막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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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대문 현판에는 ‘성역’(聖域)이라 쓰여 있다. 그 글은 마치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기 전 마음가짐을 바로하라는 듯 순례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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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좌우에는 현양탑이 있는데 그 구조가 독특하다. 대나무 모양의 현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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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뒤 쪽에 있는 24기순교자 묘역과 가운데 무명 순교자묘역

죽산 성지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계획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신심 가운데 기복적 요소가 없는 성체 신심, 성모 신심,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 눈에 성지가 전세계적으로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 성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철수 스테파노 신부님의 역작이 아닐 수 없다.
고풍스러운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성지를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커다란 돌 묵주알들이 놓여 있다. 이 묵주기도 길은 바로 성모 신심을 통해 '땀의 순교'를 체험하는 순례 길이다.
 
성지 중앙에는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 모양으로 순교자 현양탑과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가 좌우 12기씩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들 순교자들은 모두 죽산으로 끌려와 순교한 이들로 한치수 프란치스코, 김 도미니코, 여정문 일가 등 25명만 "병인박해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행적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 100여명의 순교자들은 이름조차 알 길이 없다. 순교자 묘역은 순교자 신심을 통해 '피의 순교'를 체험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년)와 오 마르가리타(?-1868년)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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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병인박해 순교자의 묘 25기가 자리하고 있고, 순교자 묘역 바로 위에는 십자가상이 조성되어 있고, 십자가상 위에는 '예수 부활상'(예수성심상)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후광 모양처럼 예수 부활상을 감싸 안듯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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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맨 위편에는 성체조배를 할 수 있는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고, 대성당은 순교자 묘역 옆 돌담 건너편에 건립되었다. 
바로 땀과 피가 한 덩어리가 된 순교의 결정체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기쁨과 은총을 만끽하고 정화되는 거룩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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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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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돌담이 너머로 대성전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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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묵주가 성지 정원을 중심으로 돌담 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산책을 하며 묵주기도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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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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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 위에는 '예수 부활상'(예수성심상)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후광 모양처럼 예수 부활상을 감싸 안듯 꾸며져 있다. 
우리는 대형 주차장의 예수님상을 처다보며 잊은터 죽산성지를 빠져나와 안성성당을 향하여 들판길을 향하여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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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이런 들판길길과 농로를 달리다보면 안성들이 얼마나 넓은가를 실감하게 되고 농촌 풍경에 매료되어 힐링이 저절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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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현 수원교구 소속 안성성당, 

1900년 10월 19일, 충청도의 공세리 본당(貢稅里本堂)으로부터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착한 의견의 모친. 관할 구역은 안성시 동쪽 지역과 보개면 · 서운면 · 금광면 일부이다.

공소 시대  안성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이미 박해 시대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전후해서는 이웃의 죽산(竹山)과 안성군 소촌만면(所村萬面, 현 대덕면)의 모산리와 명당리, 서리면(西里面, 현 안성시)의 계촌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는 박해로 와해되어 버렸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신자들이 모여 새로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다. 

1883년, 당시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가 그 해 안성 지역을 방문하고 ‘바울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馬山里의 岩洞)를 설립하였다. 두세 신부는 이때 죽산과 직산(稷山) 등지에도 공소를 설립하였고, 다음해에는 ‘궁말 공소’(현 충남 천안시 성환읍 安宮里)를, 1887년에는 ‘선바위 공소’(현 안성시 금광면 梧山里의 立岩)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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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공베르 신부가 건립한 옛 안성 성당 외부. 1985년 6월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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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3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초대 주임인 공 안토니오 신부 흉상 제막식, 로고스(Logos) 탑과 미래를 준비하는 십자가 축복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11m 높이의 로고스 탑은 안성 지역에 하느님의 ‘말씀’이 뿌리내린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으로 관련 자료들을 탑 속에 넣어 100년 타임캡슐 봉안식도 가졌다. 100주년 기념성당 옆에 설치되어 본당 설립 200주년을 준비하는 ‘미래의 십자가’는 총길이 18m에 무게만도 13t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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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본당 초대주임 공베르 신부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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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와 좌회전하여 언덕길을 올라 배티성지를 향하여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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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로길을 빠져나와 편의점에서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그리고 이제 배티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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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하이라일트 업힐, 이티재다. 해발 370m 정도이지만 지리한게 5%업힐이니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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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올라온 이티재 정상에서 이제 즐거운 다운힐이다. 속도계는 무페달링인데도 40~50km를 유지하며 부레이크를 잡게 한 간판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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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 성당 및 신학교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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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 계단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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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디자인의 14처가 있는 잔디광장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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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한편에 초가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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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의 성당이다.
이 초가집은 조선대목구 신학교로도 사용되었다. 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 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 잤다는 최양업 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며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두 칸짜리 옛 초가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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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에 있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한 후 최양업 신부 동상도 세웠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후일 제5대 조선 대목구장)가 설립하여 페낭 신학교 유학생을 준비시키는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했었고, 최양업 신부뿐만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의 사제관과 성당으로도 활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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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안방 내부에는 최양업신부님의 성체성사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107b105f49be2fc32a1a8ecac5b3c954_1494631136_967.jpg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 가경자,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복녀 가족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다시 자전거 페달링을 해서 조금 더 내려간다. 드디어 배티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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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안내 표석 앞에서 개인별로 기념 사진을 한 컷씩 한다. 이곳 배티성지는 바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자 순교자들의 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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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5일 축복식을 가진 고딕 양식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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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 좌측 벽면에 있는최양업 신부님의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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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성당으로 들어가 성체 조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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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을 나오니 우측에 새로 건립된 성모상이 철쭉에 둘어쌓여 우리를 반겨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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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맞은편 오솔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성지 입구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순교현양비가 먼저 순례자들을 맞는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성지 입구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순교현양비가 먼저 순례자들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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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성전과 소성당 앞에 있는 매괴의 성모님상


100m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1997년 6월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있고, 그곳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 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순교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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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동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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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전에 우리가 둘러보고 내려왔던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초가집 사제관과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900m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14인 순교자 묘역 입구’라는 푯말이 서 있는데 우리는 빠르게 다운힐을 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이 외에도 배티 성재골에 6인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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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는 최양업신부 동상과 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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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마음에 와서 닿는 알퐁소 성인의 말씀이 휴게소 앞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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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온 형제님께 부탁하여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2014년 축복식을 갖고 개관한 최양업 신부 박물관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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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현관 앞에는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양희진 도미니카의 이콘 전시회 안내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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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둘러 보면서 이콘도 멋지지만 전시관 규모나 데코레이션이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보다 더 화려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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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벽과 천정이 하얗게 디자인되어 사진과 영상으로 3층까지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한 눈에 한국의 천주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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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들도 백옥처럼 하얀 돌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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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으로 가는 길몫, 오늘의 마지막 순례처 백곡공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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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공소가 있는 곳이지만 길가에서 만난 예수성심상이 백곡 공소 입구에서 마을 쪽을 바라보며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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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 성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백곡 공소는 예로부터 깊숙한 산골로, 찾는 사람이 적었고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히 포장된 지금도 그리 인적이 흔치 않은 곳이다.

이 지방은 천혜의 피난처로 박해 시대 때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됐던 곳, 충북 진천군과 충남 천안시 그리고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삼각점에 위치한 이 지역은 우선 그 지세가 험해 비교적 박해의 찬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각 지방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 교통이 편리했기에 박해 시기 은밀한 연락이나 밤을 틈탄 도주가 용이했던 것이 교우촌이 형성되기에 아주 적합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공소 제대 뒷벽에는 가운데 십자가를 중심으로 왼쪽에 성 김대건 신부상, 오른쪽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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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는 문이 잠겨져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고, 순례확인 스탬프도 찾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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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교육관 뒤 공소 건물과 종탑 사이에 순교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공소 앞마당에 안치된 병인박해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윤 바르바라의 묘.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 박씨 성을 가진 바르바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시누이와 올케간이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순교일은 1866년 10월 20일이다.
남원 윤씨 집안은 본래 홍주에서 살다가 21세 손인 윤행윤 때에 박해를 피해 배티 골짜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배티 뒷산 성재골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되어 있던 이들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 초 후손들이 다시 찾았다. 1977년 평택에 사는 순교자의 후손들이 묘를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배티를 찾았을 때 배티와 백곡 공소의 신자들은 후손들을 만나 교회에서 대대로 잘 돌보며 기도드릴 수 있도록 설득하여 두 순교자들의 유해를 백곡 공소 경내로 이장한 뒤 깨끗하게 단장했다. 

순례자들은 순교자들의 자취가 풍부하게 남아 있는 배티 성지를 둘러볼 때 이곳도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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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에서부터 계속되는 내리막 길과 평지를 따라 달려 잠시 백곡공소를 둘러본 후 진천읍에 도착하여 추어탕으로 저녁을 먹고 동서울행 버스에 올라 오늘 순례도 무사히 89km를 잘 마무리 하였다. 함께한 친구들과 안전하게 동행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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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트렁크 한 칸에 접이식 자전거 두 대를 접어서 넣은 모양, 너희들도 오늘 탈 없이 수고 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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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진천에서 서울행 버스는 20~30분 간격으로 막차가 20:45분이다.

 

※ 상단 첨부 : 21차_단내_어농_죽산_안성_배티_백곡_170511.gpx

 

※ 경로 보기 : https://connect.garmin.com/modern/activity/172694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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