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차 순례 - 풍수원성당, 횡성성당, 강원감영, 원동성당, 박경리문학공원, 용소막성당, 배론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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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차 순례 - 풍수원성당, 횡성성당, 강원감영, 원동성당, 박경리문학공원, 용소막성당, 배론성지

20170514(일) 어제 저녁 본당 성모성월 행사 미사 덕분에 오늘은 주일이라도 22차 순례길을 떠날 수 있어서 좋다.
05시 기상 후 수락산역으로 달려가 7호선 첫 전절에 올라 건대입구 환승 후 강변역 하차, 동서울터미널에서 06:50분 횡성행 첫 버스 트렁크에 자전거를 싣고 풍수원성당으로 향한다. 오늘 순례 코스는 풍수원성당~횡성성당~강원감영~원동성당~박경리문학공원~용소막성당~배론성지~제천역에서 복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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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성당 입구 휴게소 앞에서 버스가 정차한다. 자전거를 트렁크에서 내려서 상태를 점검하고 성당을 향하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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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성당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자 강원도 최초의 벽돌건물로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 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같은 양태로 이루어지게 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풍수원 성당이다. 

1888년 6월 20일 본당이 설립되어 풍수원에 세워진 현재의 성당은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벽돌건물이자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지어진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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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주일미사에 일찍오신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하고 있다.
잠시 성체를 조배하며 오늘도 무사 안전과 순례 길을 함께 하여 주시라고 기도를 올리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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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마당에 한 쪽에 안내판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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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 현재는 유물관으로 사용 중

 

성당보다 5년 늦은 1912년에 완공되어 현재 유물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구 사제관 또한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구 사제관은 원형이 잘 남겨진 벽돌조 사제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유물관에는 초기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앙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역대 본당 신부들이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 등 다양한 역사 유물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다. 


화전(火田)을 일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우들은 처음 풍수원으로 찾아든 이래 무려 80여 년 동안을 목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이룬 채 믿음을 지켜 왔던 것이다.
 
1888년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민 대주교는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르 메르(Le Merre) 이(李) 신부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수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아직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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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쪽으로 돌아가니 서제관 옆에 성모상이 있다.부지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소박한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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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 이때 서울과 경기도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게 된다. 식솔을 이끌고 혹은 혈혈단신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피난처를 찾던 이들 중에서 신태보 베드로는 40여 명의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으로 들어선다. 이들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을 이룬 당사자들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강원도 최초의 본당 설립을 위한 기반을 닦는다.
바람 소리 새 소리가 유난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감히 다가들지 못하는 첩첩산중에서 이들 신앙 공동체는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기도와 생활을 영위한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이 때 교우들은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피난처를 찾던 신자들을 불러 모아 큰 촌락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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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마당에 오래된 풍수원성당 역사를 말해주는 듯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고, 그 앞에 만남의방에 사무실과 그 앞에 성지순례 확인 스탬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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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1905년에 착공해서 1907년에 준공했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열성은 가히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풍수원 성당의 교세는 크게 확장됐고 원주, 춘천, 양평, 횡성, 평창, 홍천 등 주위의 본당들은 모두 풍수원으로부터 분가되어 나온 것이다. 

이처럼 강원 지역 전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풍수원 성당에는 오랜 세월 성숙된 신앙의 유산을 배우고 묵상하고자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풍수원 성당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체 현양 대회가 매년 열리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 25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오랜 역사만큼 30여 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풍수원 성당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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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와 횡성성당으로 가기 위에 언덕을 오르는데 우측에 아침식사가 가능한 식당이 보인다.a1c5e8008a8e872612c8126df99bf965_1494899985_2024.jpg

빠른 메뉴를 찾았더니 산채비빔밥, 흑미와 찹살로지은 밥이 아주 맛좋은 식당이었다.

산마루 정상에 이르니 주변에 몇 개의 식당이 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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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성당으로 향하는 5번국도와 한우로는 계속 내리막길이어서 빠르게 질주하여 횡성교에서 좌회전 후, 문화체육로를 통하여 3.1체육공원옆을 통과하니 좌측언덕에 횡성성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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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성당입구로 들어가니 예수님상이 반기신다. 6.25 전쟁 직후 건립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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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마당의 성모동굴과 성모상. 뒷동산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건축 당시 프랑스에서 수입한 종과 천장 상부 목조 트러스 구조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사각형 평면 위에 팔각형 공간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돔을 얹어 구성한 종탑이 매우 특징적이다. 내부 바닥은 마루이며, 1984년 제대 양측 창에 유리화를 설치했다. 건물 폭과 높이에 비해 길이가 매우 길며, 천장이 가운데는 평평하고 양쪽으로 경사진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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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가톨릭 농민회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농촌 본당으로서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하였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자연 환경 보존과 생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공해 작물과 유기농 재배법 등을 보급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젊은 층의 이농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청년 신자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본당 사목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본당에서는 청년 신자들에 대한 재교육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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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맥마흔 신부가 미군의 도움을 받아 전쟁 때 파손된 성당을 신축하여 이듬해 봉헌식을 거행했다.
2008년 등록문화재 제371호로 지정되었고, 2015년 보수공사가 진행되었고, 1930년 3월 20일 풍수원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천지의 모후다.

 

횡성 지역에는 183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강원도에서 가장 교세가 성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체포되어 교우촌은 와해되었고, 다시 공소가 설정된 1880년대 이후에는 풍수원 본당의 관할하에 있다가 1930년 3월 풍수원 본당 2대 주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 의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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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와 횡성로를 타고 전천교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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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따라 하늘은 유난히 청명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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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로-북원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원주시 접경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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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x전투비행단 앞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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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 들어서니 하천에 자전거길도 나온다. 안전한 자전길로 돌아서 가면 좋겠지만 오늘 거리가 멀어서 원일로를 타고 원주역앞을 통과하여 강원감영으로 향하는데 아풀사 갑짜기 뒤바퀴에 바람이 없이 푹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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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어를 살펴보니 나사못이 깊숙히 박혀있다.

원주시보건소 건물 쉼터 그늘로 들어가 예비튜브로 교체한다. 10여분 가량 휴대용 에어펌프로 열심히 ... 아~ 또 갑짜기 예비튜브 마저도 바람이 빠져버리는 ... 이런 난감한 상황이 없다. 다시 타이러를 해체해서 튜브를 살펴보니 펑크패치 했던 부위가 경화되어 튜브에서 떨어져나와 있다.

펑크 패치 수명의 한계다. 앞으로는 재래의 방법으로 폐튜뷰를 오려서 패치하는 방법으로 바꾸어야 하겠다.

다행히 예비 튜브를 두 개를 가지고 다녀서 다른 튜브로 교체하여 에어 주입까지 마치고 나니 무려 40여분이나 시간을 낭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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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감영으로 가서 포정루를 살피고, 중삼문과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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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형틀과 모형체험 시설이 있는 감영 뜰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다. 원주 일대의 죄인들은 감원감영으로 끌려와 정청인 선화당에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국사범 등의 중죄인은 물론 잡범들에 대한 형도 집행됐는데 박해가 일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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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 1971년 포정루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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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회오리처럼 몰아치던 당시에 전국 각 지방의 감영은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여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온갖 고문을 일삼았다. 그래서 어느 감영이든 대부분 그 때 흘린 순교자들의 피와 고통의 역사가 구전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지곤 한다.

강원감영이 품고 있는 슬픈 역사 역시 동네 어른들의 입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고 때로는 아예 잊히기도 하지만 그 순수하고 굳건했던 신앙의 정신만은 퇴색하지 않고 남아 있다. 

 

우아하게 뻗어 내린 기와의 곡선이 아름답기만 하지만, 수많은 교인들이 단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피를 흘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네 군데 처마 끝에 기와로 구운 보호 장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색적인 선화당은 관찰사의 집무처로 쓰였으며, 포정루와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포정루는 1660년(현종 1년)에 목사(牧使) 이후(李候)가 다시 건립하였고, 6.25 전쟁 때도 손상을 입었으나 다시 복구하였다. 선화당은 1667년에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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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정루와 선화당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박해의 현장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원주교구 순교자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품에 오른 김강이 시몬, 최해성 요한, 최 비르지타 등 많은 순교자들이 강원감영의 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했다. 안타까운 것은 감옥 터에 이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복원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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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감영을 나와 원주 지역 선교의 요람이자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인 원동성당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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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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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의 설립과 발전  부엉골 본당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1895년에 본당을 장호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면서, 그렇게 되면 풍수원과의 거리가 멀어져 서로 방문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그때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르 메르 신부는 1896년에 원주 군청에서 가까운 원주읍 상동리(현 가톨릭 센터 자리)에 소재한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매입한 뒤 그 해 8월 17일 풍수원 본당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공소는 20개였으며, 교우 총수는 1,137명이었다. 원주 읍내에는 몇몇 신자들만이 있었고, 대부분의 교우들은 공소에 있었기 때문에 르 메르 신부는 주로 공소를 순방하면서 사목하였다. 이와 같이 공소를 순방하는 데는 보통 한 달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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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없는 강당형 공간으로 건립된 성당 내부.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본당. 본래 명칭은 원주(原州) 본당이었으나 1957년 6월 1일 원주시 학성동에 본당을 분할하면서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17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에서 분리, 신설되었으며, 주보는 천주 은총의 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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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주임으로 부임한 리굴로(Rigoulot, 睦) 안토니오 신부는 원주 군수가 전임 신부 때와 달리 돌연 천주교를 악의적으로 대한데다가 읍내 사람 가운데 입교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음에 따라 본당을 시골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1900년 3월 장티푸스에 걸려 선종하고 말았다.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브레(E. Devred, 兪世竣) 에밀리오 신부는 해마다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여 주일이면 성당이 좁아 신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02년 사제관 부근의 가옥 열두 채와 그 부지 2,000평을 매입하여 오늘의 성당 터전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이웃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와 협의하여 1904년 4월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하였다.

 

조제(Jaugey, 楊秀春) 요셉 신부가  문맹 퇴치를 위해 성당 부속 건물에 야학을 설치하고 교우들로 하여금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으나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과 함께 일제에 의해 폐쇄되어 학교 설립의 꿈이 무산되었다. 조제 신부는 1913년 건평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완공하여 뮈텔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39년 4월에 춘천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리 · 설정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사목은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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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 성당은 건축사적으로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 공소(등록 문화재 제140호)와 함께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1971년 원주 문화 방송국의 부정으로 야기된 부정부패 규탄대회가 원동 성당에서 열리고,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시국과 관련한 많은 기도회가 개최됨으로써 원동 성당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며 1990년 8월 기념 교육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갖고, 1995년 성당과 수녀원 등을 보수하여 이듬해 10월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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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탬프는 사무실 직원에게 물었더니 서랍에서 꺼내어 준다. 원동성당을 나와 점심을 먹기위해 사무직원이 추천한 로데오거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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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기 순대국을 먹었는데 너무 짜다.

점심 후에 찾아가는 곳은 박경리문학공원이다. 개봉교 입구로 들어가강변의 자전거길을 타고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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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알바를 해서 도착한 박경리문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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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이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잔디 앞 마당에는 앉아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1926년12월2일(음력10월28일)~2008년5월5일)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박금이(朴今伊) <토지>가 대표작이며 이 외에도<김약국의딸들>,<<불신시대>> 등 많은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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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건물이 문학관, 우측 건물이 기념관이다. 

1980년(55세)에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에 정착, 『土地』 3부(삼성출판사) 간행한 이후 이곳에서 4부까지 대하소설을 역작을 한다.

1926년 경상남도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태어났다. 작년에 통영에 갔을 때 박경리 기념관과 묘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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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통영 라이딩 갔을 때 찍은 박경리 기념관

 

그런데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는 작가가 한번도 가본적도 없는 상상속의 마을이었는데 실제로 그런 마을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던 기억이 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였으나 부군은 좌익으로 몰려 한국전쟁 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와의 사이에 외동딸 김영주를 두었다. 김영주는 1973년 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강원도 원주시의 토지문화관 관장직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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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원도에서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성당인 용소막 성당으로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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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길 섭재삼보길 따라가니 라이딩 하는 사람들을 드문 드문 만나면서 금대초등학교가 나온다. 학교앞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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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학교였다.
학교앞 다리를 건너 이제 치악로 5번국도 접어든다. 여기서부터 계속되는 업힐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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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 보니 좌측 산 밑에 치악역에서 원주 방향으로 내려오는 기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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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 넘는 치악재 정상에 이르렀다. 이제부터는 다운힐을 신나게 ...룰루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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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로를 따라가다 용암교를 건너 용소막성당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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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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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박해 때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뿔뿔이 흩어져 그 일부는 용소막에서 멀지 않은 황둔(黃屯)으로 내려와 거기서 얼마를 살았다. 그 후 그들은 1890년경에 황둔에서 멀지 않은 충북 제천군 송학면 오미(五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최씨와 백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곳 신자들의 지도자는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이었다.

 

그는 병인박해 때 이곳저곳 숨어 다니며 신앙을 보존하다가 1893년 제천 길마돈 공소(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에서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를 만나 17년 만에 성사를 보았고,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 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로부터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어 각처로 다니며 전교하였다. 

그러던 중 1893년부터 한두 집씩 오미에서 용소막으로 이사 오기 시작하였으며, 1898년에는 최도철도 용소막으로 이사하였다. 

최도철은 1898년 1월 13일 5-6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짓고 원주 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를 설립한 뒤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았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해인 1899년에 오미에 살던 백(白)씨네와 행주(幸州)에 살던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00년 10월 24일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 경당을 축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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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앞에 비치된 순례확인 스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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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잘레 신부는 그 해 가을에 묘재(山尺,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공소의 이석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공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성당 신축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장티푸스에 걸려 앓고 있던 최도철 회장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모든 신자들이 적극 나서서 성당 신축 공사의 일을 열심히 도운 결과, 착공한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 새로 지은 성당 지붕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게 된 것은 당시 건축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의 길이를 2자씩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총신자수는 2,081명에 달하였다. 6대 주임으로 부임한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신부는 1938년 봄에 학산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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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완 사제 유물관 앞에 세워진 선종완 신부 동상.

 

1988년 11월에는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1976년에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성모 영보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설치하였고, 피정 센터인 두루의 집과 지하 기도실을 새로 준공하여 축복식을 가졌으며, 1989년 5월에 낡고 협소한 학산 공소의 강당을 헐고 새로 지은 뒤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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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긴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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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 언덕 아래 조성된 성모동굴과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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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시잘레 신부가 완공한 벽돌조 성당의 내부, 전형적인 삼랑식 평면 구조를 갖고 있다.

1904년 5월 원주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분리.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전사 및 공소 시대  용소막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병인박해 무렵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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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 성당을 나와서 들판 제방길을 따라가다 제원로로 진입하여 청풍명월 제천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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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교역 앞을 조금 지나가니 GPS가 좌측길로 접어들어라고 알바했다는 신호를 보낸다. 뒤로돌아가 묘제 입구에 안내판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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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남상교, 남종삼 요한 성인의 유택이다.a1c5e8008a8e872612c8126df99bf965_1494907947_7973.jpg

순교자 남상교와 성 남종삼 요한 부자가 살던 유택 입구에 학산 묘재 성지 표지석이 서 있다.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한 배론 성지에서 산 하나를 넘어서면 병인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성 남종삼(南鐘三, 1817-1866년)이 살던 묘재가 있다. 

이곳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종삼 성인과 그 부친 남상교(南尙敎, 1784-1866년) 부자의 뜨거운 신앙과 애끊는 육친의 정이 넘쳐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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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종삼 요한 흉상.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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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이 언제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부친이 일찍부터 입교하여 신앙을 지켜 온 사실에서 볼 때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입교한 뒤에도 자신의 관직 때문에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신앙에만 더욱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로 유배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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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부패된 관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의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고 당연하게도 관리직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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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씨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에 상종하던 이들과의 생활 풍습이 신앙 계명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으로, 남씨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했다. 

그 때에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유택 뒷산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어 있다.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였으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어서 약속 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했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얼마 후 두 주교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 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를 결심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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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 승지는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을 채 못 들어와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부친 남상교는 붙잡혀 공주로, 장자 남규희(南揆熙)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소사와 차남 남명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한 셈이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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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로를 따라 가다 제천9경 중에 하나라고 하는 탁사정에 올라 잠시 구경을 한다.

조선 선조 19년(1568)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이라 명명하였고, 그 뒤 정자를 짓고 팔송정이라 하였다. 허물어진 팔송정을 후손 윤근이 다시 세웠고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하였다. 팔송은 모두 죽고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으나 1999년도 10월에 팔송마을 및 제방 둑에 20그루의 해송을 마을에서 심어 앞으로 해송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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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사정에서 내려다본 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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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로를 따라 배론교에 이르니 다리 건너편에 배론성지를 알리는 예수님고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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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바람이 세다. 은근한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배론성지길을 달리다 보니 반갑게도 살레시오의 집 살림터 표지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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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배론성지에 도착했다. 심산유곡(深山幽谷), 계곡이 깊어 배 밑 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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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표석 우측으로 영성연구소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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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사무실 앞으로 갔더니 순례확인 스템프를 찍는데 신부님이 옆에 서계신다.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물으니 일원동에서 오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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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에 대형버스 여러 대가 보이고 많은 신자들이 모여 있다. 일우너동 본당에서 오늘 성지순례를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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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안내판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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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학당 터이자 최양업 신부의 안식처가 있는 곳이 배론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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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 앞에 연못이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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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의 다리를 건너서 경당 앞으로 계단을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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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에 예수님상이 서양 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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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으로 돌아가니 무명순교자 묘와 성모자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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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신학교와 순교의 요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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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신학교였던 초가집이 보인다. 2003년 재복원된 배론 신학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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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요셉신학교 교수셨던 프티니콜라 교수 신부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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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귀중한 사료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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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성요셉신학교 교수셨던 푸르티에 신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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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장주기 요셉성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세 칸짜리 자기집을 신학교로 제공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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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신학교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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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바라 본 옛 배론 성요셉신학교와 기와집은 성요셉성당, 

신학당은 1978년 복원된 후 2001년 3월 2일 배론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된 후 2003년 재복원되었다.

초가 신학당 옆에는 성 요셉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배론의 두 번째 신앙 유산은 1855년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이다. 

깊은 산골 장주기의 집에 세워진 신학당에는 학생 열 명에 두 신부가 있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형장의 이슬이 됐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신학당 역시 폐쇄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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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 사이로 옹기 가마터가 보이고 우측으로 초가집 뒤로 돌아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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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했던 토굴.

 

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 했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천 3백 84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한 가지만으로도 가히 현양의 가치가 충분한 신앙 유산들이 몰려 있는 배론이야말로 최적의 순례지로 추천할 만하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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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 내부를 살펴보니 백서가 전시되어 있다. 
 

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가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룬 곳이 바로 배론이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또 구워 낸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잃은 가족을 수소문하거나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 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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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 황사영순교현양탑과 황사영 동상이 서 있는데 ... 

지난달에 양주에서 어렵사리 남의 남새밭 옆에서 찾아서 확인했던 황사영 알렉시오의 초라한 묘지와는 대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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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에 성요셉 성당으로 들어가서 성체 조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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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 부근에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동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교우촌이 있던 곳은 바로 점촌배론이었다. 이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기억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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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 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또한 대성당과 소성당 두 동으로 건립된 기념성당은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라 불려온 지명과 어울리도록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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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산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다. 

한국 최초의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 신부는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이곳 배론의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혹자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을 만큼 최 신부의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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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뒤편에 조성된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수려한 자연, 풍부한 신앙 유산 그리고 편리한 교통과 시설로 배론은 최적의 성지 순례 여건을 갖추고 있어 한 번쯤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볼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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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에는 대성당 뒤편에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의 거룩한 삶의 여정을 한 눈에 보고 묵상함과 동시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한 자리에서 만나 기도할 수 있는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을 조성해 봉헌하였다. 조각공원 내에는 고 탁희성 화백의 작품을 오석에 새긴 30개의 조각 작품으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담고 있고, 그 내부는 납골 봉안소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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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길을 정리하면서 마지막 제천역으로 달리기 위해 성지교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생각해 본다.
황사영은 역사적으로 역적인가?

※ 상단 첨부 : 22차_풍수원_횡성_원주_용소막_배론_170514.gpx

  

※ 경로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89072?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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