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차 순례- 서산동문동성당, 상홍리공소, 해미성지, 해미읍성, 홍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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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차 순례- 서산동문동성당, 상홍리공소, 해미성지, 해미읍성, 홍주성지

20170527 26차 순례는 코스는 서산동문동성당, 상홍리공소, 해미성지, 해미읍성, 홍주성지이다. 중도에 김좌진장군사당, 생가지 및 기념관, 만해한용운 생가지, 성삼문사당 및 최영장군사당을 둘러보는 멋진 코스이다.

06:30분 남부터미널에서 버스 트렁크에 자전거를 싣고 정그레고리오와 둘이서 서산버스터미널 맞은편 골목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하고 10시가 되어서야 순례길을 출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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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 찾아가는 서산동문동 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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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 건너 골목에 있는 전통방식으로 직접 재료를 70대후반의 할머니가 직접 손질하여 끓여내는 순대국 맛은 일품이다. 

다시 찾고 싶은 순대국집의 하나로 강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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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들어서자 신부님.수녀님이 다른 분들과 오늘 무슨 행사에 대하여 이야기 중이시다. 

서울에서 온 순례객이라고 인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순례 확인 스템프를 받고, 게시판을 보니 초기역사를 이끄셨던 폴리, 라리보 신부 등의 사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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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동 성당은 해미 순교자에 대한 신심으로 가득 찬 유서 깊은 성당으로 성당 건물은 2007년 등록문화재 제321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인 합덕 본당 산하 공소로 출발하여, 1908년 이 지역을 이관 받은 폴리(D. Polly, 沈應榮) 데시데리오 신부가 서산 지구 본당을 홍성군 구항면 공리에 설립.운영하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자, 다시 합덕 본당으로 합병되었다. 

1917년 안학만(安學滿) 루카 신부가 서산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본당을 팔봉면 금학리로 옮겼다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본당에 복귀한 폴리 신부가 다시 주임으로 부임, 1919년 10월경 현재의 상홍리 공소 자리에 강당 및 사제관을 신축하였으나 얼마 후 서산 군 소재지에 가까운 음암면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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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P.Barraux, 范,1903-1946년) 동산에 있는 바로천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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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좌측의 성모상과 우측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성당 역사를 말해 주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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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마당의 해미 순교자 기념비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비.

 

1987년 8월에는 석림동 본당의 설정으로 본당명을 서산 본당에서 서산동문동 본당으로 개명하고, 10월 28일에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49평의 조립식 교육회관을 증축하였다. 

박해를 무릅쓰고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후손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서산동문동 본당은 일찍부터 순교 성지 성역화에도 관심을 쏟아 왔다. 

1935년 4월 해미면 조산리 해미 하천변(현 해미 순교탑 터)에 생매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증인들의 고증에 따라 발굴하고, 유해 및 묵주 등을 다수 발견 수습하여 상홍리에 있는 순교자 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55년 4월에는 천묘(遷墓) 2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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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며 꾸밈이 없는 성당 내부 모습

성체조배를 하면서 오늘도 우리 순례길에 안전하게 동행해주실 것을 기도를 하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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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본당 설립 9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던 서산동문동 성당은 2008년 10월 10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1년 만에 1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 이유는 본당의 설립 시점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반영된 것으로, 기존에 안학만 신부가 금학리에 부임한 1917년을 설립 연도로 지내오다가 1908년 5월 9일 공리에 설립된 수곡 본당이 본당 역사의 시작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2008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성당 소제대에 안치하고, 1937년 현 성당 준공 당시의 옛 제대와 옛 감실을 복원하여 축복했으며, 100주년 기념비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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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로를 따라 유서 깊은 상홍리 공소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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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홍리공소는 병인년 해미 생매장 순교자들의 첫 안식처를 품은 곳이다. 상홍리 공소는 서산 본당의 세 번째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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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마당 서쪽에 있는 기와를 올린 정자에 앉으면 저절로 공소에 대한 옛 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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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졌듯이, 내포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의해 신앙이 전파된 후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던 지역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지역에는 오랜 역사를 이어온 본당과 공소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산 상홍리(上紅里) 공소도 그러한 곳 가운데 하나다.

 

상홍리 공소는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소재로 과거에는 ‘가재 공소’라고 불렸다. 가재는 갈재 밑에 있는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이 마을에 공소가 세워진 것은 적어도 1884년 이전의 일이었다. 1880년대 초, 충청도의 중앙과 서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C.-E.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의 1883-1884년도 교세 통계표에서 가재 공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공소 이름만 있을 뿐, 신자 수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자 수는 1884-1885년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나오는데, 당시 81명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102명으로, 서산에서 가장 큰 공소였다. 그러나 1886-1887년도에는 신자 수가 52명으로 급감하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1890년대에는 30명 대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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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보수공사를 마친 구 사제관. 바로 오른쪽에 상홍리 공소 성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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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동문동 성당의 세번째 자리,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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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지붕과 십자가 안에 있는 종탑, 천주당이란 한문 현판이 옛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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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쪽에서 본 공소 종탑과 현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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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앞마당의 성모상


상홍리 공소는 전통적 한옥 목조 건축양식을 비교적 온전히 갖춘, 보기 드문 근대 건축물이다.  

문화재청은 상홍리 성당이 ‘서양의 종교 공간에 한옥의 구법을 활용한 귀중한 자료’임을 인정하여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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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홍리공소를 뒤로 하고 해미성지를 향하여 페달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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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로 달리는 제방과 농로 길은 한가하기 이를데 없고 저절로 힐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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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성지에 도착하니 도로에서 처다보는 성지내의 종탑과 성당 건물이 아름답고 웅장함을 바로 느낄 수 있다.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을 기념해 원형구조로 건립된 무명 순교자 성당 외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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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 관광홍보 게시판에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들어 있다. 해미는 가톨릭성지의 도시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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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도 아라메길이 있어서 관광안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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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조각작품으로 만들어 성지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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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순교성지 대형 표지석 앞에서 동행한 정글레고리오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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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 통로를 이용하여 성지안으로 들어가니 우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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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실제 인물과 매우 흡사하게 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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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상 옆에 서서 잠실 본당에서 순례를 온 부부에게 촬영을 의뢰하고, 우리도 두 분에게 기념촬영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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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들어가 순례확인 스탬프를 찍고, 대전의 어느 본당에서 바자회를 나온 어머니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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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당으로 들어가서 성체조배를 한다.

 

2층 대성당으로 올라가서 들어가려 했더니 미사가 진행중이라 방해를 할까봐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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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앞에 있는 성모님상과 벽면에 있는 그림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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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교지나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과 숨결이 느껴져 후손을 자랑스럽게 하지만 이곳은 폐부를 찌르는 깊은 신음과 함께 서려 있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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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 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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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 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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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에 있는 이름 없는 집 

 

해미 성지는 3,0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새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소성당과 대성당은 무명 순교자들의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구조로 건립되었고, 실내 장식과 외부 건물 또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이른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쉼터의 이미지를 갖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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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뒤편에 있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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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 되었다. 

이를 위해 우선 순교자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한 뒤 매장되는 과정을 복원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읍성 곳곳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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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부에 있는 묶여서 끌려가는 순교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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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언민 마르티스,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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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형태로 건립된 해미 순교성지 기념관과 해미 순교자(인언민 마르티스,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3위 시복 기념비. 

 

2014년 8월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 순교성지 기념관 앞에서 전날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올린 해미 순교자 3위(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시복 기념비 제막식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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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 맞은편 광장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해미 순교탑, 야외제대, 2014년 8월 16일 시복된 해미 순교자 3위 복자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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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기념관에서 북쪽에 있는 여수골 표지석, 진듬벙, 순교자탑, 복자 3위상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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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마음으로 내목숨 천주님께 바치는거야!" 인언민 마르티노 유언이 뭉클하게 가슴에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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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골 대형 표지석, 뒤 쪽으로 단체로 관광 버스를 타고 순례를 온 개신교 신자들도 담소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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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바로 진둠벙~~물속에는 기도하는 석상과 동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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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순교자들의 생매장 터인 진둠벙.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참수.몰매질.석형. 백지사형.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 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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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오 베드로 시인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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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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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 각처의 조형물은 죄수의 목에 채우던 족쇄형 큰 칼의 모형을 본딴 것이다. 재료는 하강석, 큰 칼 구멍에 원형의 돌을 깍아 끼워넣고 그 표면에 그림을 조각하였다. 그림의 한 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고, 다른 한 면은 순교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한국식 판화로 묘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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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14일 진둠벙 옆에 대전교구 신학생들이 세운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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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해미 순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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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절도사의 읍성이 있는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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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시복한 해미순교자 3위 복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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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정에서 순교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와 문초를 받다가 장형(杖刑)에 못 이겨 순교한 경우도 많았다. 교수형은 일반적으로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 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멍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1866년 11월에 홍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 형벌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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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순교탑을 참배하고 해미성지를 빠져나와 다리를 건너 제방길을 따라 가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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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해미성당을 앞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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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읍성의 진남문과 성벽 모습

다음 순례코스가 바로 이곳 해미읍성, 진남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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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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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을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 수비를 명목으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시기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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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명을 처형했던 이 슬픈 역사의 현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 지금은 관광객들과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들로 휴식공간이 된 성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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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해미 진영의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70여 평의 좁은 순교성지에 자리개질에 이용되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에 서산 성당(현 서산동문동 성당)으로 이전 · 보존되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현재 서문 밖 순교성지에 있는 자리개 돌다리는 모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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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묻었다는 증거이다.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의 지도 하에 해미 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 대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발굴한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 성물들은 그해 4월 2일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원래 순교터로 이장되었다. 이때 순교자들의 유해 일부는 별도로 보존 처리하여 모셨다가 현재는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내의 유해참배실에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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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옥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신자들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즉 오늘도 이 호야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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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의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갔던 감옥은 발굴 작업 및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복원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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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를 벗어나 갈산으로 달린다. 지름길을 포기하고 갈산에서 밴댕이조림으로 점심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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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방에는 우국충절의 인물들이 많이 나온 고장이다. 갈산으로 달린 이유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를 둘러보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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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사 주차장 마당에 있는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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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생가지는 크게 김좌진 장군 생가, 백야기념관, 백야공원, 백야사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백야사당과 공원을 둘러본다.

흉탄에 돌아가시면서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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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의 총탄에 41세에 순국 하셨으니 ...

30여명의 노비들을 모아두고 노비문서를 태우고 땅 문서를 나누어주었던 선각자를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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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내에는 김좌진 장군의 영정이 있다. 참배를 마치고 나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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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 있는 백야공원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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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성장과 자주독립 유업이 새겨진 동상들을 둘러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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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공원 표지석이 홍성군수가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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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m 쯤 더 내려가면 생가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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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기념관은 들어가보지 못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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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계몽사상과 독립운동, 청산리전투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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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선생 사당 앞에 도착해서 계단으로 올라간다.

한용운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시인으로 고종 16년(1879)에 이곳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6세에 방랑하여 여러곳을 유랑하다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이후 1905년 인제 백담사에 가서 연곡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었다. 

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이며, 법호가 만해(卍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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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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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선생의 생가지 초가집,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 재 75호로 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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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의 침묵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 

푸른산 빗을  깨치고 단풍나무숩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거러서 참어 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 꽃가티 굿고 빗나든 옛 盟誓는 차듸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키쓰>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 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맛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녀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 일이 되고 놀난 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것잡을 수 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希望 의 정수 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 때에 떠날 것을 염녀하는 것과 가티 떠날 때에 다시 맛날 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 갓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얏슴니다 

제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돔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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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선생 동상 앞에서

 

1908년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으며,

1919년 3.1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작성하였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일깨우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의 일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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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비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ㅇ니생의 행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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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선생은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으로 삶을 마칠때까지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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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관 내부는 둘러보지 못하고 다음 순례지인 홍성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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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외곽 모습

 

내포 지역 정치, 행정, 문화, 교통, 체신의 중추이자 군사적으로도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홍성은 그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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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 흉상과 성삼문 선생 흉상이 우리를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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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달려서 홍주성 안에 있는 홍성군청 앞에 이르니 수령이 오래된 수령의 느티나무,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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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 건너편에 세워진 홍주성 순교터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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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청 맞은편 도로변에 설치된 순례지도가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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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맵도 자세히 게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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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의 아문 모습, 지금은 내부에 홍성 군청이 자리하고 있다.

 

홍주 아문을 돌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그 안이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장소이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 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 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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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 안 관아시설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이 집행되었던 곳으로 구체적인 순교터로는 목사나 진영장의 동헌 앞, 옛 저자거리, 홍주 옥(현재의 검찰청 및 법원 자리)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북문 밖, 생매장 터로 사용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부근도 있다. 

이렇듯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홍주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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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 안에들어가 뒤뜰에서 만날 수 있는 옛동헌 안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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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역시공원 내에 있는 감옥 앞의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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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내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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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구에 대한 설명 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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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내에는 죄수 모형으로 실제 모습과 흡사하게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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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입구에 서있는 순교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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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가 건물을 임대하여 신부님이 부임하여 개설된 홍주순교자 성당 내부모습,
이곳과 바로 옆에 있는 사무실에도 순례확인 스탬프가 비치되어 있다.


한편 홍성성당은 2011년 6월 18일 40년 넘게 사용한 옛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새 성당은 원시장
베드로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 순교자 212위와 무명 순교자까지 700여 명이 순교한 홍주(홍성의 옛 지명)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려 홍주 순교자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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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으로부터 북쪽으로 100m에 위치하고 있는 조양문 옆 KT 건물 화단에 설치된 홍주 진영의 동헌 터(경사당)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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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 시가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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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터 앞에는 조양문이 옛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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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성외곽 주차장에 위치한 옛저자거리 신앙증거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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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면 이곳이 순교자들의 참수터인데 안내판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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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홍성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의 시복시성이 추진되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중기 박해(1812-1839년)에는 이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해 교회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 기록상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한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를 감안하면 실제 순교자는 7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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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순교성지 생매장터에는 천변으로 십자가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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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지의 야외 미사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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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매장 순교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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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에 설치된 생매장 터의 순교성지비

 

순교비 앞면에는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뒷면에는 ‘이곳 홍주골은 믿음을 지킨 성지로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이 숭고한 넋은 평화의 빛이 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2004년 홍성 본당과 홍성군에 의해 지역 천주교 순교사가 공론화되고 순교성지 발굴이 본격화된 지 4년만인 2008년 3월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함께 홍주의사총 옆 홍주 순교성지 공원 터에 순교비를 세워 성역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순교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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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둘이서 빠르게 달려온 덕분에 복귀하는 기차시간은 여유가 있어서 성삼문 선생 유허지(成三問 遺墟址)와 최영장군 사당을 둘러보기 위해 약간의 경사가 있는 충서로을 따라 올라가다 산길을 따라 농로를 이용하여 매죽헌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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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로 한솔기 마을인데 매축헌 성삼문 선생 유허가 있다. 성삼문(1418~1456)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외할아버지 고택이 있던 곳으로, 선생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 번 물은 일이 있어 이름을 삼문(三門)이라고 하였다.  
성삼문 선생은 세종 때의 학자로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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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에 대한 안내판이 도로변에 있다.

유허란 유지(遺址)·유적(遺蹟)·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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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각(成三問 先生 遺墟碑閣) - 충남 문화재자료 제164호 


성삼문 선생 유허비(成三問 遺墟碑)는 성삼문 선생 유허지(成三問 先生 遺墟址)에 대하여 기록한 비로 전면에는 선생이 홍주 적동리(현 홍북면 노은리 상리부락)에서 태어났으며, 사육신을 기린 후 유허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유허비는 1668년(현종 9 )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이 홍주관찰사로 왔다가 선생의 유허를 돌아보고, 선생을 추모해 세웠으며, 후면에는 1672년 성삼문 선생의 신주(神主)가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되어 유허지로의 봉안, 사당 건립, 사육신 위패의 봉안, '녹운'의 사액과 '노은'으로의 명칭 변경 등의 

과정이 기록되었다. 

 

비문의 전면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상(金鎭商)이 글을 쓰고 유척기(兪拓基)가 전(篆)하였고, 후면은 윤봉구(尹鳳九)가 글을 쓰고, 이기진(李箕鎭)이 글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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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 뒤쪽으로 성삼문 선생의 사당인 충문사의 삼문(충절문)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으로 올라가서 성삼문 선생의 사당인 충문사 아래에 세워진 유명한 단심가 비를 만난다. 


단심가(丹心歌)   /  成三問

 

이 몸이 주거가셔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 장송 되어서

백설이 만건곤 할 때 독야 청청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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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단(魯恩壇) 

노은단(魯恩壇)은 성삼문선생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제단.
유허지의 위쪽 언덕에 위치 한다. 1676년(숙종 2)에 이량(李?)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노은사(魯隱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1692년 녹운서원(綠雲書院)으로 사액하였고, 1709년 노은(魯恩)서원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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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단을 들어서면 매죽헌 선생의 묘지 앞에 이른다. 봉분이 크지는 않지만 묘 앞에서 지맥을 살피니 잘 짜여진 좌청룡 우백호와 안산을 제대로 갖춘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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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왼쪽에 있는 충문사로 들어간다. 단종복위를 꾀하다 멸문지화를 당한 성삼문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그의 시신은 일부는 서울 노량진에, 한쪽 다리 부분은 논산 가야곡면에 안장 되었고, 숙종때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이 되었고, 1970년대에 생가 근처에 선생 본부인의 묘소와 아버지 성승 장군 및 생모의 묘소가 모두 성역화 되었다.

성삼문 선생의 과거급제를 알리기 위해 오동나무에 북을 매단 그의 아버지 성승장군은 아들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참살을 당했다. 


이 동네는 고려말 명장인 무민공(武愍公) 최영장군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奇峰祠) 

성삼문 선생 유허지에서 약 1.2km 정도 떨어진 홍북면 대인리 마을앞을 지나 언덕 하나를 넘어가면 닭재산(해발 165.7m) 기슭에는 최영장군의 사당인 기봉사(奇峰祠)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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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기봉사는 자전거로 도저히 오를 수가 없다. 10~15%가 넘는 가파른 길이다.

최영장군 사당인 기봉사(奇峰祠)는 주차장에서 가파른 오르막 산길을 200m정도 걸어서 올라가니 사당도 기단을 높이 쌓아 올려 앞이 휜히 트인 곳에 위치 한다. 갑짜기 왜 이리도 높고 가파른 곳에 사당을 지었을까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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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지역은 역사적으로 의인(義人)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구한말 일제침략이후 민족의식이 강해 최초의 의병운동과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태어난 고장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사육신인 성삼문(홍성), 박팽년(대전)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의 성웅 이순신(아산)과 북벌론을 주장한 송시열(대전)등이 있다.

또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홍성)과  3·1 만세운동의 유관순(천안), 홍구공원의 윤봉길(예산),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이종일(태안), 민족사관을 정립한 신채호(대전),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한용운(홍성), 손병희·신홍식·권병덕(청원), 권동진(괴산), 신석구(청주)등과 미주방면의 임병직(부여), 신간회의 이상재(서천), 임시정부의 이동녕(천안)과 신규식(청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애국선열을 배출한 고장이다. 

 

오늘도 축복 받은 순례길 은총에 감사 드리고, 동행한 친구에게도 감사하다.

 

 

※ 첨부 : 26차_서산_해미_홍성_170527.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86866?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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