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차 순례 - 포천성당과 문화 역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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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차 순례 - 포천성당과 문화 역사유적지

20170603(토) 월례 정기 라이딩 날이라서 5명이 동두천중앙역 3번출구 앞에서 09시 출발하여 경로 주변에 있는 역사문화유적지를 둘러보는 코스이며, 특히 다른 성지와 묶어서 찾아가기가 어려운 춘천교구 관할의 포천 성당이다. 

동두천중앙역을 출발 첫번째로 찾은 곳은 생연초교사거리를 통과, 삼육사로, 탑신로 왕방계곡의 동점마을 입구로 들어가 찾아간 어유소장군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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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중앙역 3번출구 편의점 앞에서 간식을 가져온 친구가 가져온 견과류를 감사히 먹고 안부를 물은 후 부암동 집에서부터 북악스카이웨이를 타고 월계에서 중랑천 자전거도로를 타고 동두천으로 올라오고 있는 친구를 중도에 도킹 하기로 하고 4명이 먼저 출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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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방계곡 동점마을 입구 좌측에는 남과 북의 중심지 표석이 탑동동 330번지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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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북의 중심지 표석의 좌측길로 경로를 이탈하여 마을로 올라갔던 두 친구가 다시 우측으로 진입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
우측 도로가 끝나는 언덕을 오르면 조선 전기 무신 어유소의 사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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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8일 동두천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된 어유소장군 사당

 

조선 세조에서 성종 대까지 무신으로 활약했던 어유소(魚有沼 1434~1489)를 배향하는 사당이다. 

어유소의 시호를 따서 이름 지은 정장사우(貞莊祠宇)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오동나무로 만든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두천시에 있는 어유소 관련 유적들은 어유소장군 사당 외에 지행동의 어유소장군생가터, 상봉암동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의 사패지경계석, 광암동의 어유소장군묘와 신도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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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성종대의 탁월한 무인 어유소(1434∼1489) 장군의사당은 본래 광암동(좌기골) 묘소 아래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의 수탈이 심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당시 사당이 불타 없어져 근래에 들어 목조건물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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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소(1434∼1489)장군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자유(子遊), 본관은 충주이다. 

1434년(세종16)에 양주(현 지행동)에서 병마수군절제사 어득해의 아들로 태어났다.
1451년(문종1)에 내금위에 선보되고 1456년(세조 6)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회령부사를 지냈다. 

1467년(세조13) 5월에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좌대장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그 해 겨울 명나라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좌대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1469년(예종1) 함경북도 절도사, 1471년(성종2) 좌리공신(左理功臣) 4등이 되고 두 차례나 영안북도(永安北道) 절도사를 지냈다. 시호는 정장(貞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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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세조 2년 (1456)무과에 1등으로 장원

ㅇ 세조 6년 (1460)여진정벌의 공을 세움

ㅇ 세조 13년 (1467)이시애의 난을 평정

ㅇ 어유소는 당시 무인 강순, 남이와 더불어 여진정벌에 많은 공을 세워 성종7년(1476)에 병조판서에서 우찬성에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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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장거리를 달려온 친구를 동점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도킹하여 가벼운 간식을 하면서 왕방산과 해룡산 사이의 가파른 고개를 넘기 위해 휴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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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넘어 다운힐을 하여 송선로로 좌회전 하니 전계대원군 묘 아내판이 도로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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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대원군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의 생부, 1779년 아버지 은언군이 홍국영과 함께 역모했다는 벽파의 무고에 따라 강화부 교동으로 쫓겨나자, 아버지와 함께 빈농으로서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이름 광(壙). 은언군(恩彦君) 인(?)의 아들로서, 은언군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이므로 사도세자(장조)의 손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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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전계군에 봉해졌다가 1849년(헌종 15) 아들 원범(元範)이 즉위하여 철종(哲宗)이 되자 대원군(大院君)에 추봉(追封)되었고, 무덤은 여주(驪州)로 이장되었다. 장조의 서손자이며, 정조의 조카이고, 철종의 사친이다. 은언군의 9남 1녀 중 6남이자 서자(庶子)로 1785년(정조 9) 4월 29일(음력 3월 21일) 탄생하였다. 원래 이름은 해동(海東)이었고 뒤에 창강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광으로 개명하였다. 적모에게서 태어난 적자인 이복 형 상계군 담, 풍계군 당, 그밖에 이복 서형들인 성득, 철득, 쾌득 등 아버지의 또다른 서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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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서장남 은언군(恩彦君)이며, 어머니는 그의 소실인 전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로 전산군부인 이씨(全山郡夫人 李氏)이다. 그의 위로 동복 친형이 한 명 있었지만, 일찍 요절했다. 아버지 은언군, 삼촌 은신군이 소년시절 상인들에게 진 부채가 증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1771년(영조 47) 직산에 유배되고,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가 1774년에 은신군이 죽으면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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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인인 완양부대부인 전주최씨와 합장 하였고, 묘소 옆에는 부실이자 철종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의 묘소, 회평군 묘, 영평군 묘가 인근에 소재해 있다. 1986년 4월 9일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1호 《전계대원군 묘 및 신도비》로 지정되었다.


이광은 왕족이었으나 아버지 은언군이 상계군 사건과 송씨, 신씨 사건 그리고 계속된 탄핵으로 유배당한데다가, 이광은 다시 은언군의 서자였으므로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 1797년 아버지 은언군이 울화병이 치밀어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교동도가 보이는 해변에서 체포되었다. 강화도 내에서 다시 아버지 은언군이 체포된 그 곳으로 일가족이 모두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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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대원군 묘에서 내려다본 전경,
왕손이면서 친일파로 알려진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이 홍은동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우영은 현재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서울호텔 회장 겸 동원 INC 회장이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이해승이 친일 대가로 경기도 포천에 조성한 토지 약 200만㎡(시가 300억원대)를 국가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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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대법원에서 다시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판결하여, 이에 불복한 원호처에 의해 재심이 계류중인 문제의 땅이 왕방산 동쪽 능선 아래에 있다. 그 중 일부는 대진대학교가 매입하여 학교 부지로 활용 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 후손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된 행동으로 윗대의 조상까지 욕보이는 묘라는 생각에 씁쓸한 생각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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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빠른 길을 포기하고 새로 생긴 대진대 입구사거리로 내려와 후평교를 건너 포천천을 따라 올라가다 포천문화원 건너편 자전거 도로를 타고 반월교 옆 인도교를 건너 포천성당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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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성당은 홍교만과 홍인 부자 순교자의 정신이 살아 있는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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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마당에 있는 홍인 레오 복자의 사형 선고문이 유난 스럽게 다가온다.

 

홍인(洪鏔) 레오 (1758년~1802년)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레오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91년경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 사촌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홍인 레오는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레오는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면서 효성을 다하는 길은 부친을 신앙으로 이끌어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부친의 의심을 풀어드리고, 입교를 망설이는 부친을 설득하여 마침내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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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레오는 부친과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서(庶) 5촌 당숙인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또 부친과 같이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인 레오는 부친과 의논하여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집안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체포되면서 그들 부자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무렵 레오와 부친은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집으로 돌아왔으며, 바로 그때 포졸들이 쳐들어와 그들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후 부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으로, 레오는 포천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이윽고 레오는 포천에서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킨 뒤, 경기 감영을 거쳐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에 앞서 레오의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레오도 그 뒤를 이어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문초를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형조에서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교리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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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자상

  

포천 지방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그의 아들 홍인(洪鏔) 레오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포천 지방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치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한다. 포천 지방은 1921년경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던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신부에 의해 사목되다가 그 후 1930년 개성 본당,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행주 본당,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 주교좌본당)의 관할 지역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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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포천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천 일대에 주둔한 6군단 군단장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의 도움이 컸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한림 장군은 익명의 독지가가 기증한 1,000여 평 대지에 공병 부대의 도움을 받아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다. 1955년 11월 60평의 석조 건물로 된 성당과 사제관 20평을 완공하였고,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전후로 잠시 6군단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군종 신부가 포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다가 1956년 2월 김진하(金瑨河) 요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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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완공된 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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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 게시판에는 역대 주임신부들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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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에 있는 순례 스탬프를 찍고 있는 정그레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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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방화로 인해 전소된 후 역사 보존 차원에서 보존하고 있는 구성당 건물.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구 포천 성당은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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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에서 만난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작년에 고인이된 친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백사 이항복 묘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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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묘에 도착하니 신도비 안내문과 신도비각을 만나게 된다.  
이름이 낯설더라도 ‘오성과 한음’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알고 있는 인물이다.  ‘오성(鰲城)’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이고 ‘한음(漢陰)’은 한원부원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다. 서로 다섯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뛰어난 인물이 특히 많이 배출되었던 16세기에도 우뚝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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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초상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고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ㆍ동강(東岡)이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우참찬(정2품)까지 오른 이몽량(李夢亮)이고 어머니는 현감 최윤(崔崙, 본관은 전주)의 딸이다.

이항복은 1556년(명종 11) 10월 15일 서울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 지금 남창동ㆍ서소문동ㆍ태평로ㆍ남대문로 일대)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2남이었다. 아버지 이몽량은 우애가 깊고 너그러운 인물이었던 것 같다. [명종실록]의 졸기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과 혼자 사는 누이가 가난했는데, 이몽량은 그 조카들을 모두 거뒀다고 기록되어 있다.(명종 19년 10월 4일).

아버지가 참찬이라는 고관이었지만, 이항복은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아버지는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났고(1564년(명종 19) 10월) 어머니도 7년 뒤에 돌아갔다(1571년(선조 4) 9월). 그 뒤 그는 누이의 집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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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신도비

 

이항복의 가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그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사위였다는 것이다. 그는 1574년(선조 7) 18세의 나이로 권율의 딸과 혼인했고, 그 뒤 2남 1녀를 두었다. 이항복은 1580년(선조 13) 24세의 나이로 급제했다. 그때 조정의 중심 인물은 율곡 이이였다. 20세 연상의 대정치가는 이항복과 이덕형 등을 홍문관에 추천했다. 그 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항복은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이상 정6품), 홍문관 직제학, 우승지(이상 정3품) 등 주요한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62년에 걸친 이항복의 생애에서 그 후반을 구성한 주요 사건은 임진왜란과 당쟁이었다. 그 사건들은 그 규모와 기간에서 각각 동아시아와 국내를 전체적으로 지배했다. 기축옥사(1589)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났을 때 이항복은 30대 중반의 촉망받는 관원이었다. 그가 그 사건들의 중심에 섰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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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항복은 이조·병조·형조판서·대제학·우참찬(이상 정2품)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이런 사실은 그 시기 그의 비중과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증거일 것이다.

그가 특히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분야는 외교였다. 그는 이덕형과 함께 명에 원군을 요청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고, 결국 이여송(李如松)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명군의 참전은 많은 부담과 피해를 안기기도 했지만, 평양 탈환에 성공하는 등 전황을 역전시키는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명에서 파견된 사신과 장수들을 전담하다시피 만나고 접대했으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능란하게 해결했다. 1598년(선조 31) 명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인 경략(經略) 양호(楊鎬)를 무고하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이항복은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명에 파견되어 갈등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런 공로로 그는 1601년(선조 34) 호종(扈從)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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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년 전 기축옥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기 조선을 휩쓴 내홍(內訌)은 당쟁이었다. 이항복은 서인의 대표적 인물로 당쟁의 중심에 섰다가 결국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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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 이항복에 대한 일화 한토막 소개. 

오성의 집의 감이 풍성하게 달려, 나뭇가지중 몇 가지가 옆집 권율대감의 담을 넘은 적이 있었습니다.  

권율가의 노비들이 몽땅 이것을 따가니, 오성가의 노비들은 주인이면서도 감을 제대로 수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옆집 권율대감네는 세도가 당당하여 오성 집안에서는 감히 따질수 없던 상황이었던 것이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오성은 권율 대감집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권율 대감이 책을 읽고 있던 닫혀있던 사랑방 창호지문을 통과해서 그 안으로 주먹을 푹 쑤셔 넣었습니다. 

놀란 권율대감이 “어느놈의 짓이냐?” 라고 호통을 치자 

오성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대감님, 이 손이 문을 넘어가기는 했지만 과연 누구의 손입니까?” 

“네 손이 당연한 것 아니냐?” 

“그렇다면, 감나무의 큰 가지가 대감님의 담을 넘어왔다고 해서 감을 몽땅 가져가 버리면 어쩌나요?” 

이 사건을 계기로 권율 대감은 오성을 사위로 맞아 들입니다. 

 

마음을 바로 잡아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하지요. 

오성 이항복,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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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한가지 ...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백사 이항복에게 "섧지(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수건)가 좋다."라는 이상한 말을 남겼다. 

아무 대비책 없던 조선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선조는 누구보다 먼저 도망갔다.

결국,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게 되었고,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이 이여송과 4만 명의 명나라 원군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었다.

국난의 위기에 명나라 원군을 청한 터라 기쁘거나 즐거운 마음이 들리 없었다.

그러나 접빈사가 된 오성대감으로서는 감사하고 기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아야 했다. 이때 불현듯 율곡 이이의 말이 떠올라 고춧가루를 수건으로 싸서 눈을 비비자 매운 고춧가루 때문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를 본 이여송과 명나라 군대는 접빈사로 나온 백사 이항복이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별로 싸울의사가 없던 이여송과 명나라 군사는 큰 감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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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선생 묘

 

1598년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발생하자 목숨을 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전란을 무사히 극복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었으며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 강경 대북파가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 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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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에서 바라본 우측 신도비와 제각, 마을 모습 

 

귀양가는 길에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시조가 유명하다. 

 

《철령 높은 봉에》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었다가

님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서울 부암동에는 이항복의 별장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으며 이 계곡을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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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光陵)이 도착했다. 몇 차례 둘러보았던 곳이지만 지나는 곳이니 다시 홍살문으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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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시고,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 최초로 조성되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향로와 어로는 유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본래 정자각은 세조의 능역 앞에 있었으나, 정희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두 능의 사이로 옮겨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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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 주엽산 아래에 광릉을 조성하였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하는 일부 풍수가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후 1483년(성종 14)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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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능 사이가 유실되어 보강 작업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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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우측에있는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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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재세 : 1417년 음력 9월 29일 ~ 1468년 음력 9월 8일, 재위 : 1455년 음력 윤 6월 11일 ~ 1468년 음력 9월 7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1417년(태종 17)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8년에 진평대군에 책봉되었고, 그 후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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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 시절에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또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문종이 즉위 한 후에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단종 즉위 후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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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에 여러 차례의 단종복위 운동으로 사육신 등과 수 많은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상왕 단종을 폐위시켜 죽게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왕위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그 후 1468년(예종 즉위)에 왕세자 예종에게 선위한 후 하루 뒤에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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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무덤은 총 119기인데 그중 임금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왕릉은 42기다. 

42기의 왕릉 중 40기가 2009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옛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에 있는 2기는 북쪽에 있어 함께 등록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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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년 동안 조선 왕조를 이끌었던 왕족의 무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왕릉’이요.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묻혀 있는 곳은 ‘원’이라 하고, 13기가 있다.그

리고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이 묻힌 장소는 ‘묘’라고 하는데, 모두 64기,

왕이라고 해서 모두 왕릉에 묻힌 것은 아니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는 왕릉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제10대 왕 연산군과 제15대 왕 광해군은 종묘에 신주가 없고, 왕릉이 아닌 묘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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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은 대부분 도읍지였던 한양 외곽에 위치해 있다. 왕릉은 도읍지의 4대문 10리 밖 80리(오늘날의 100리로, 당시의 10리는 요즘의 4km가 아니고 5.2km였다.)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궐에서 출발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조선 왕릉은 궁궐을 중심으로 한양 외곽의 동남쪽과 서북쪽에 주로 모여 있게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어서 강원도 영월의 장릉과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 여주의 영녕릉은 80리 밖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 개성에 있는 두 릉 (제릉,후릉)  

 

남쪽에 있는 40기에 대한 기록은 많으나 북쪽의 2기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서 참고로 한계레 기사를 옮겨 적는다.

 

(1)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齊陵)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태조의 정비(正妃)인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은 신의왕후가 조선 개국(開國) 이전에 승하(昇遐)했기에 개성 근처에 단릉(單陵)으로 봉릉(封陵)하고 조선 개국 이후에 추존(追尊)하여 제릉(齊陵)으로 명명되었다.

제릉은 북한의 문화재 분류로 보존급(우리의 보물급) 제556호, 제릉비(보존급 1624호)로 지정되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북한의 문화재는 국보와 준국보(보존급) 그리고 일반 유물유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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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조성의 모델로 꼽히는 고려 공민왕릉 양식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이며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과 문, 무인석등의 석상들까지 건원릉을 비롯한 조선초기의 능들의 본보기가 된 듯하다.  

사진에는 봉분 뒤 곡장이 없어지고 정자각과 비각이 남아 있는 것이 보이지만 능역 앞과 옆에까지 논, 밭이 들어와 있다.(하긴 서울 한복판의 선릉은 능침과 불과 10여m 옆에 도로가 나 있음을 생각하면..)

왕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없어 왠지 어색하고 허전하게 느껴지면서도 앞이 트여 시원하게 느껴진다.  

 

신의황후 한씨(神懿王后 韓氏:1337-1391)

신의황후는 고려 말기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태조 이성계와의 슬하에 6남(방우, 방과<정종定宗>, 방의, 방간, 방원<태종太宗>, 방연) 2녀(경신, 경선)를 두었고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인 55세(공양왕 3년, 1391년)에 승하했다. 

처음 시호(諡號)는 태조가 즉위한 후 절비(節妃)라 하였고, 정종(定宗) 대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고 태종 10년에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되었고. 근세 대한제국 성립 후 1899년(고종(高宗): 광무 3년)에 황후(皇后)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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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 개성에 있는 후릉(厚陵)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해방시 주소,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북한 문화재 보존급 제551호 

 

조선의 왕릉 중에는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더불어 북한땅 개성인근에 있는 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그의 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난간석으로 연결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릉의 형식을 따라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을 두르고 있으며, 석마를 동원한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2쌍 씩 배치하였다.  

1412년(태종 12) 6월 25일 정안왕후가 58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후릉에 안장되었고 그로부터 7년 뒤 정종이 승하하여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여 쌍릉을 이루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후릉은 곡장이 없어진걸 제외하면 봉분 주변의 석물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걸로 보인다.

하지만 정자각이 없어져 앞이 허전해 보이고 정자각 자리 앞에는 연못으로 추정되는 믈이 보인다. 

울창해야할 소나무 대신 능 좌우로는 활엽수들이 앙상하고  능역 가까이까지 논, 밭이 들어와 있음도 보인다.  


편안했던 정종과 정안왕후의 삶.

정종은 조선의 왕들 중 가장 편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애초부터 왕위에 오를 생각도 위치에 있지도 않았었기에 짧았던 재위에서 물러나 유유자적한 삶을 즐겼으니 말이다. 1357년(공민왕 6년)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377년(우왕 3년) 에는 아버지를 따라 지리산 부근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89년(창왕 1) 절제사 유만수(柳曼殊) 밑에서 해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다.

 

1390년(공양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했다. 조선이 개국되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보위를 걷어찬 태조에게 큰 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는다(1398년 9월. 태조의 맏아들 이방우는 이미 몇 년 전에 사망했다).

하지만 실제 권력은 이미 동생 이방원(李芳遠)에게 있었으니 왕위에 오르면서 개경으로 다시 천도(1399년, 정종 1년3월) 한 것도 야심만만한 동생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2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에도 실질적인 권력자인 동생의 섭정이 있었기에 정치로 인해 신경 쓸 일도 많지 않았을 것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달플 일도 없었을 것 같다. 

 

이렇게 원치 않았던 왕위도 1400년 2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아우 방원을 세제(世弟)로 책봉했고 같은 해 11월 세제 방원에게 선위(禪位)했다. 

그 뒤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20년 가까이를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연희를 즐기며 편안한 생활을 했다.

이렇게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권력욕이 컸던 동생 태종과도 우애를 유지했고 태종은 형을 선후로써 예우했다. 

정안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후사 문제로 걱정할 일도 없었고 설령 그들에게 아들이 있었던들 언감생심 후사를 바라볼 처지도 아니였다. 

이처럼 삶을 즐기던 정종과 정안왕후는 실권을 놓고 인덕궁으로 물러난지 12년이 되던해인 태종 12년(1412년)에 정안왕후가 춘추 58세로 세상을 떠났고 아내 사후 7년뒤인 세종1년(1419년) 정종도 인덕궁에서 생을 마감하니 춘추 63세였다. 

 

정종과 정안왕후의 부부 묘소는 인덕궁 근처 야산에 마련 되었는데 바로 개성 인근의 후릉이다. 

사후 처음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420년 명(明)나라로부터 공정(恭靖)의 시호를 받아 공정왕으로 불리다가(그래서 실록도 ‘공정왕실록’ 이다) 1681년(숙종 7)에 비로소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았다. 

 

 

광릉을 벗어나 도착한 곳이 마지막 순례 장소 봉선사에 도착하니 오늘 행사가 있어서 입구가 차량들로 북새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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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입구로 들어가니 우측 마당에 동쪽으로 대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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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대종(보물397호)
 

이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의 몇 개 안되는 조선 전기 동종의 하나로, 성화 5년(1469)인 예종 원년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주조된 종이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음관이 없는 쌍룡으로 용뉴를 나타내고, 종견에는 겹연꽃잎을 돌렸다. 그 바로 밑으로 도드라진 2가닥의 옆띠를 돌려서 몸체와 뚜렷이 구분하였다. 종의 몸체 중앙에는 굵고 가는 3가닥의 옆띠를 돌려 위아래로 구분하였다. 

윗부분에는 유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는데 4개의 유곽은 종견에서 분리되어 당초문으로 장식되고, 그 안에 연화로 된 화좌유 9개를 갖추고 있다. 이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원형두광을 갖추고 양 손을 마주잡은 보살입상 4구가 양각되어 있다. 또한 유곽 밑과 중앙의 옆띠 사이 공간에는 범자가 4자씩 새겨져 있고, 보살상의 위아래, 네 귀퉁이에도 같은 형식의 범자가 새겨져 있다. 

 

종구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파도문으로 장식한 아래띠와 비슷한 옆띠를 돌렸다. 그리고 이 옆띠와 중앙의 3가닥 옆띠 사이에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으로 주종 연유와 화원, 주성장, 조각장, 주장, 각자목수, 노야장, 수철장, 사령 등의 인명이 열기되어 대대적인 주종 공사였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종은 조선 전기 동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동종이며, 양식의 형식규명에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대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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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는 조계종 25교구본사로 교종 본찰이다.

 

교종 수사찰의 종풍과 선종사찰의 법맥을 그대로 전승하고 있는 대가람으로 서기 969년 고려 광종 20년에 법인국사가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하였다.

그 후 서기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는 광릉이라 하고, 이어 당사를 초창하여 선왕의 능침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봉선사라 하였다. 

 

봉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때 거듭 병화를 입는 비운을 겪는다.

낭혜대사(1539년)의 뒤를 이어 계민선사(1637년)가 중건하고, 1749년과 1848년에 다시 중수해 고아하고 장중한 대찰의 면모를 되찾았으나 오늘의 봉선사는1960년 무렵부터 재건불사를 일으킨 가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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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初創)은 조선 예종 1년(1469)으로, 89칸의 절 규모와 함께 서울 이북에서 가장 크다고 전해졌으며, 재창(再創)은 1637년 계민(戒敏)선사에 의한 일괄 중수(重修)때이다. 삼창(三創)은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건립된 현 전각으로, 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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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법당 안 괘불함에 보관되어 있는 비로자나삼신불화로서, 크기는 가로 485cm, 세로 783cm이고 영조 11년(1735년)에 봉안됐으며 보물 제1792호이다.

그림의 내용은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 화엄교리를 설명하는 이른바 연화장 세계를 타나낸 것으로서, 가운데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화신불과 보신불인 석가모니불,노사나불이 커다랗게 그려졌고, 그 밖에 여러 보살과 성중들이 설법을 듣는 장면을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 맨 아래에 화기가 있어 제작 연도와 시주자 및 화사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시주자는 궁중의 상궁 이성애로 정조의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것이고, 화사는 임응 스님의 책임하에 학총, 칠혜, 두계, 태운, 갈빈 등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학총 등 4명의 직책이 도화원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화원은 곧 조선 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인 도화서에 소속된 직업 화가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이 괘불 조성에 참여한 것은 당시의 상황과 관련되어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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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를 끝으로 광릉수목원로를 타고 부평2육교 아래서 좌회전 하여 토끼굴을 통과해서 부평교를 건너기 전에 왕숙천 자전거도로로 진입하여 퇴계원역에서 16시30분에 순례코스 67km를 마무리 하고 전철로 점프하여 귀가하는 복된 하루였다. 좋은 길, 무사한 길을 함께하신 주님과 동행한 친구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 첨부 : 27차_동두천중앙역_포천성당_광릉_봉선사_170603.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86223?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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