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차 순례 - 요골, 수리치, 공주중동성당, 황새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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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차 순례 - 요골, 수리치, 공주중동성당, 황새바위

20170608(목) 28차 순례 코스는 온양온천역-요골공소-수리치골 성모성지-공주 중동성당-공주 황새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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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온천역 앞에서 친구 한 명과 함께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30분이 넘어서 외암로를 따라 첫번째 순례지인 요골공소를 향해 달리는데 송악까지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렇지만 자전거 도로로 달리기에는 어려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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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환하게 뚫려있으면 좋은데 ... 군데 군데 장애물들이 놓여 있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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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계곡 입구를 지나간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기 때문에 39번 도로를 따라 오미니재를 넘고 각흘고개로 가는 동안 로드 킬을 당한 고라니 5마리를 봤다. 아마 첩첩이 산이라서 고라니가 많이 서식하는 모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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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니 고개와 각흘고개 둘을 넘으면서 첩첩산중이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128년 전,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런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던 선조 신앙인들의 모범마을의 하나인 요골공소를 가려면 금북정맥의 이 고개들을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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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목에 내 이름을 딴 주유소가 보인다. 좀 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주유소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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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흘고개는 사태로 도로확장 및 생태연결 통로 공사가 진행 중이라서 노폭이 좁아져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다운힐을 .... 

 

「각흘고개 전설 한 마디」출처 : 디지털공주문화대전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에 전해지는 「돌고개전설」과 같이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의 원한이 깃든 이야기이다.

고려 말엽,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이 산중에서 숯을 구우며 살아가던 삼덕이가 잠자리에 들려던 차에 어디선가 들리는 여자의 비명 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몽둥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한 여자가 두 남자에게 포박당하고 있었다.
삼덕은 몽둥이를 휘둘러 포박하고 있는 두 남자를 죽였다. 

 

방으로 데리고 들어온 여인은 자신이 이성계에 대항한 역적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방금 삼덕이가 죽인 두 남자는 포졸이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삼덕은 포졸을 산에 묻고 여인은 산 속의 굴에 숨겨 놓았다.
며칠 후 또 다른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포졸은 삼덕에게 “도망가는 색시를 보지 못했느냐?”고 하였다. 그는 태연하게 “색시를 보았는데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에 남쪽으로 내려갔던 포졸들이 다리를 절며 뒤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삼덕은 여인을 굴에서 데리고 나와 집에 머물게 하였다. 세월이 가면서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여인은 삼덕을 따라 숯가마에 가고 그 곳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의 거처가 알려졌는지 포졸들이 삼덕의 집 주변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숯을 구워 내려오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포박하려 하였다. 삼덕은 짊어진 숯을 팽개치고 포졸들에게 달려들었다.
작대기로 저항하려 하였지만 결국 포졸의 창에 찔리고 말았다. 이를 본 여인이 쓰러진 삼덕에게로 다가가며, “여보, 여보!” 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포졸들에게 달려들었다. 포졸은 여인도 칼로 베어 죽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이 고개에서 숨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두 사람이 이 고개를 지키는 혼령이 되어 이 고개를 지키는 문지기로 둔갑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죽음의 길로 몰아가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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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목에서 고려 문극겸사저 표지판이 보이는데 미리 경로 설계 시에 포함시키지 못해서 그냥 빠르게 스쳐내려 왔다.

‘고간원(叩諫院)’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의종에게 직간(直諫)을 하였던 문극겸의 충의를 백이, 숙제의 ‘말의 고삐를 붙잡고 간언하던 ((叩馬而諫)’ 고사에 견주어 붙인 이름이다. 고간원이라는 편액에는 백이, 숙제에 비교할 만한 문극겸의 충간(忠諫)을 숭모하는 후인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 길을 지나가는 분들은 39번 도로에서 가까운 곳이니 둘러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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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골공소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잔뜩 농익은 누런 보리밭에서 보리 향기가 풍겨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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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쪽 논에는 이제 심어놓은 모들이 뿌리를 박느라 힘겨워 보이지만 여린 몸짓으로 순례객을 반겨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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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도착하니 종탑이 보이고 오래된 한옥 공소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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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요골 공소에 천주교가 전래 또는 시작된 것은 1884년 이전이다.
충청도 지방 사목을 전담했던 두세(Doucet, Camille-Eugene/1853-1917년) 신부가 아산 공세리 성당에서 공주 공소(현 공주 중동 성당)로 가기 전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렀다 한다. 그러므로 공주 중동 성당의 전신인 요골 공소에 첫 사제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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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교우촌을 이룬 사람은 이화진 베드로 회장인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경기도 고양군 출신으로 군난을 피해 이곳저곳 교우촌으로 숨어 다니다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화진 회장은 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순방하게 되자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삼아 선교사들을 맞이 했고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는 교우들을 찾아내어 요골에서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때 이 회장은 전교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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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골 공소 마당의 성모상과 종탑

 

군란 당시 이곳에는 신자들이 숨어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는데 그 사정이 어떻하였는지 알 수 없다. 

처음의 공소는 배실 쪽 이 회장 댁이었다고 하며 그 후 1913년 김덕기 막시모 회장 때 요골로 공소를 옮겨왔다고 한다. 

자신의 집 골방을 공소로 3년간 사용하다가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구자응 씨가 어렸을 때는 공소 판공미사를 3대에서 4대를 드릴 정도로 신자들이 많았고 모두 열심하였기에 성직자와 수도자 성소가 많이 나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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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요골 공소 설립 120주년 기념사진

 

1883년 프랑스인 두세 신부에 의해 이곳이 공소로 설정된 이후 모든 성직자들이 이곳 신자들의 열심을 교구장에게 보고할 정도였다.
또 1884년에 42명이었던 신자수가 양촌(구 합덕) 본당의 퀴틀리에 신부 때인 1890년에 이르러서는 100명이 넘어섰고, 공주 본당의 파스키에 신부 때인 1901년에는 145명, 1915년에는 158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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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요골 공소에는 이씨, 김씨, 성씨, 복씨, 구씨 등이 살았고 이들이 차례로 회장을 맡아보면서 공소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들 집안에서는 구전회 신부, 김윤상 신부, 김병상 신부, 구자오 신부, 구자윤 신부, 김영관 신부, 구본만 신부, 구본홍 신부, 구본국 신부가 나왔다. 그리고 이 외에도 여러 집안에서 수사, 수녀, 동정녀들이 나왔다.

 

이처럼 유서 깊던 요골공소도 이제 점차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13세대 가량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신자들은 매주 주일이면 함께 모여 공소예절을 행하고 있으며, 매월 넷째 주일이면 유구 본당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러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주일이면 본당으로 미사참례를 가게 되어 공소에서 요골 공소는 현재 유구 성당의 한 구역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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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골 공소 벽면에 붙은 사진들과 오래된 역사 자료들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찾아간 순례지는 수리치골 성모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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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보건진료소를 지나서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용수봉갑길로 약간의 오르막을 한참을 달려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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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순례성지가 아니라서 곧장 직진하여 1km 가량을 더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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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상 좌우로 길이 나뉘고 좌측에는 성지사무실과 성물방이 보이는데 한 수녀님이 자전거에서 내려서 올라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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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쪽으로 가야 하느냐고 물의니 좌측 길이란다. 우측길은 수녀원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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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세워두고 성모자상 앞에서 목례를 하고 야외제대 앞으로 올라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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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수녀원 건물 모습

 

달레[Claude Charles Dallet´]1829~1878년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수리치골은 지금의 충남 공주군 신풍면 봉갑리인 것으로 나타나 있고,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페레올(Jean Joseph Ferreol, 1808~1853)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성모 성심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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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뒷쪽에 위의 예수님상이 있고, 좌측으로 십자가의 길 14처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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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성이 뛰어나 보이는 14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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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처를 따라 올라가면 아래와 같은 돔 모양의 성심형태의 구조물이 나오는데 이 구조물이 성모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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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이 내부에 있다.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하권)에서 수리치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즈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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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위쪽에 세워져 있는 성모성심회 집터 안내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사적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9c6fe58c03f7506782583c40c855d883_1497357949_934.jpg
다시 사무실/휴게실이 있는 성지 입구로 내려와 성지 역사 안내판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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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들어가 수녀님에게 순례확인 스탬프가 있느냐고 했더니 숨겨놓은 스탬프를 찍어주며 뭔가를 아쉬워 하는 표정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왜 그럴까? 순례를 다니면서 마주하는 어느 수녀님은 해당 성지에서 장시간 기도를 하면서 머물기를 권고하거나 강요 한다.
본인의 수도 생활 자체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기 때문이고 기도를 통하여 그 만큼 큰 은혜를 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아쉽지만 자전거로, 또는 자동차로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정이 수녀님과는 좀 다르다. 

정해진 시간에 예매한 버스나 기차를 타야하고 식사도 해야 한다. 낯선 곳에서 잠자리도 걱정해야 하고 해가 저물기 전에 순례 라이딩을 끝내야 하는 조급함이 있기 때문에 한 성지에만 머물러 정적인 기도나 묵상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고, 때론 자전거로 달리면서 기도를 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 어느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님은 일반 신자들의 이런 사정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 처럼 폄하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면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순례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지나친 일방적 강요와 권고의 말들은 어느 영화에 나오는 나이들어 고집센 늙은 수녀님이 젊은 수녀에게 혹독하게 갑질을 하는 모양으로 비쳐질 때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런 글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순례를 하면서 느낀 솔직한 느낌을 적어야 하겠다. 수도자, 사목자와 평신도와의 관계는 주종 관계나 갑을 관계나 강요를 하여야 할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도 적시 하고 싶다. 서로의 입장과 신분을 이해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켜 줄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해가는 지름 길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 소신이나 아집으로 다른 신자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신자들도 보아왔기 때문에 ~~~

  

각설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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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치골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사찰이 보여서 잠시 둘러보니 자불백년사라는 절인데 스님이 부지런 하신지 이쁘게 잘 가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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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목팽나무길로 접어들어 잠시 마을에서 휴식을 취한다. 뒷산 너머에는 금강이 흐르고 공주가 있다.
유난히 밤꽃이 많이 피어 있어서 특유한 향이 바람을 타고와 코 끝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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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로 넘어가는 길은 들목팽나무길 언덕을 올라 골목 내리막으로 내려가면 공주보(공도교)를 건너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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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보에서 시원하게 물주기를 내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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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길 인증센터 표지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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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보를 달리며 북쪽 금강 물길을 쳐다보며 무령로를 달려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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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중동성당으로 향한다. 처음 온 길이라서 정문을 찾지 못하여 국고개길을 통하여 골목길로 진입하다 보니 성당부지 반바뀌를 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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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유치원을 지나니 정문이 나타나고 언덕길에 성당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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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언덕 벽에는 아름다운 그리스도 문양과 모자이크들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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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중동성당은 이존창 루도비코가 순교한 공주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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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구 사제관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1881년부터 충청도 지방 사목을 전담했던 두세(C-E. Doucet, 丁加彌, 1853-1917년) 가밀로 신부에 의해 1887-1888년에 공주읍내에 설립된 공주 공소에서 출발하여 1897년 5월 8일 성모 성탄을 주보로 설립된 공주(公州) 본당이 그 전신이다.

 

현 공주 중동 본당의 전신인 공주 본당은 합덕 성당(현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소재)과 공세리 성당(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소재)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1897년 4월 1일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기낭(P. Guinand, 陳晋安, 1872-1944년) 베드로 신부가 임명되었고, 관할 구역은 지금의 공주시.천안시.부여군.논산시.서천군.충청북도 남쪽 지역 등으로 아주 넓었다.

 

기낭 신부는 임시로 공세리 성당 공소였던 유구의 요골 공소(현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에 거처하면서 관찰사가 주재하는 공주읍내 중심지인 국고개 언덕 위에 현재의 부지를 매입하여 1897년 6월 28일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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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지방의 천주교 선교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1784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에 의해 중국 북경으로부터 가져다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당시 권일신(權日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천안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에게 전파되었고, ‘내포의 사도’가 된 이존창은 공주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공주읍 성교(城橋) 들머리 우측에 있는 황새바위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성 손자선 토마스가 순교하는 등 공주 감영에서 치명한 순교자는 이름이 밝혀진 신자만 해도 248명에 이른다. 

 

현 성당 건물은 1921년 주임으로 부임한 최종철(崔鍾哲, 1890-1945년) 마르코 신부가 서울의 약현 성당을 모델로 직접 설계하여 1934년 공사를 시작해 1936년에 고딕식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 새 성당과 사제관.수녀원 등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2일 축성식을 가졌는데, 현재는 본당과 사제관(현 교육관)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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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의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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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 28일 유구 성당을 분가하고, 1982년 9월 7일 공주교동(校洞) 성당을 분리하면서 공주중동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지내면서 공주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이듬해 처형지인 황새바위에 순교탑과 경당을 세웠다.
1997년 본당 설립 100주년과 성당 건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시행하여 가능한 한 원형에 가깝게 수리하였다.
또한 “중동본당 100년사”를 출간하고 12월 6일에는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1999년 1월 26일에는 공주교동 성당과 함께 공주신관동 성당을 분리.신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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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기에 유행하던 고딕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는 성당 평면은 약간 변형된 라틴식 십자가형으로 외관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다.
중앙 현관의 꼭대기에는 높은 종탑이 있고, 현관 출입구와 창의 윗부분은 끝이 뾰쪽한 아치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는 중앙에 넓은 회중석(會衆席)을 두고 그 양쪽에 복도를 둔 삼랑식(三廊式)이다. 회중석과 복도 사이에는 6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단면이 6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굽받침이 있는 주두(柱頭)가 있어 아치와 리브(뼈대)를 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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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중동성당을 건립한 최종철 신부의 형님인 최종수 요한 순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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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 성모상 옆에는 최종철 신부의 묘와 최종수 요한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공주 중동성당을 직접 설계하고 완성한 최종철 신부는 1945년 선종할 때까지 사목하다가 이곳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2003년 4월 9일 대전교구 방침에 의해 대전 가톨릭대학교 내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고, 현재의 묘는 최종철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을 안치하여 2008년 8월 19일 복원한 것이다. 묘지 뒤에는 최종철 신부를 기리기 위해 1975년 11월 25일 공주 지역 성직자와 신자들의 정성으로 세운 돌병풍 빗돌과 글귀가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최종수(1881-1950년) 요한은 최종철 신부의 형님으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공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성당에 들어와 마구 총질을 하며 성물을 훼손하고 성당을 더럽히는 것에 분개해 항의하다가 7월20일 성당 마당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해 순교했다. 

공주중동 성당 신자들은 최종수 형제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주님을 향한 순교적 삶을 본받고 후대에 전하고자 2010년 순교자 성월에 최종철 신부 묘 바로 옆에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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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성당을 벗어나 제민천 자전거 도로로 내려와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황새바위로 향한다.  9c6fe58c03f7506782583c40c855d883_1497361153_0214.jpg

황새바위는 제민천을 따라가다가 왕릉로가 나오는 교량이 나오면 데크길을 따라 올라가면 봉황로 좌측 언덕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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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길을 올라와서 제민천을 내려다보니 공주의 자전거도로도 잘 가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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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예수님상이 우릴 반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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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 성당으로 들어가보니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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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벽에 있는 14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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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따라 황새바위를 향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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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된 이 성지는 순교의 넋이 새가 되어 하늘로 오른곳이라고 해서 황새바위인가?

공주 들머리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서식했다 해서 '황새바위'로 불린다. 

달리는 '항쇄바위' 또는 '황쇄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바위'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는 '황쇄'에서 '쇄'가 옛말로서 '새'와 같다고 풀이해 '황쇄바위'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공주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린 고장이다.
후백제를 일으키기 위해 수많은 군사들이 일어나서 웅진에서 싸우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쓰러져 피를 흘렸고,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전라도에서 발호한 수만 명이 우금치 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해 죽음을 당했다.

의로운 피를 수 없이 흘린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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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2012년 새로 건립한 무덤경당과 우측의 12개의 빛돌 

 

공주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 처음부터 끝까지 장엄한 신앙 고백의 피를 이어받았다. 

조선 땅에서 천주교 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순교한 복자 권상연 야고보는 공주에서 이주해 살다가 전주 땅에서 순교했고, '내포 지방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1784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영세 입교한 후 충청도 지방을 전교할 때 공주 지역은 그의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공주 감영이 있었다.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배교를 강요 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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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 위 십자가의 길에서 내려다 본 순교탑.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 예산 · 해미 · 덕산 · 신창 · 홍산 · 연산 · 청양 · 보령 · 진잠 · 유구 · 직산 · 천안 · 공주 · 비인 · 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북의 청주 · 진천 · 연풍 · 옥천, 전라도의 전주 · 광주, 경기도의 죽산 · 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 등 매우 다양하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왔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바로 이곳 '황새바위'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현재 공산성을 마주하고 언덕 위에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공주 교동본당에서 세운 높이 13.8미터의 순교탑이 우뚝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져 있는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무덤경당 앞 순교자 광장에는 12개의 빛돌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이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묘비석이자 12사도를 상징하고 있다. 

2002년 11월에는 성지 입구에 미사와 강연 등을 위한 대경당을 지어 축복식을 가졌고, 2008년 12월 22일에는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이란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등록되었다. 2009년부터는 대경당을 보수해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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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2012년 새로 건립한 무덤경당에서 본 좌측의 12개의 빛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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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언덕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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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성당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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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 광장 아래 아담한 부활성당의 내부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독특하다.

부활성당 앞에 순교자의 모후상을 모신 성모 광장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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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황새바위 광장으로 오르는 언덕에 빛의 길과 묵주기도 길 등을 조성되었고, 황새바위 광장에 두 번째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 언덕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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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십자가언덕에는 14처상이 없는 언덕길이지만 두번째 언덕에는 위와 같은 14처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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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광장을 내려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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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뜨르 휴게소로 들어가 공산성을 건너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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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 성지를 내려와 공산성 앞을 통과하여 금강교를 건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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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본 금강교 둔치 공원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공주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강남터미널행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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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정글레고리오와 함께한 순례길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공주터미널에서 각자의 안식처 방향데로 강남터미널행과 동서을터미널행 버스로 이동하여 지하철에 접이식 자전거를 싣고 귀가하는 축복 받은 하루였다. 

 

※ 첨부 : 28차_온양온천_요골_수리치_공주중동_황새바위_170608.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85656?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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