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차 순례- 죽림굴-간월재-등억 김아가타묘-울산 병영순교성지-언양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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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차 순례- 죽림굴-간월재-등억 김아가타묘-울산 병영순교성지-언양성당

20170609(금) 오늘은 2박3일 울산,경주 원정 순례길 중 첫째 날이다. 

오늘 코스는 울산역에 KTX로 도착하여 죽림굴-간월재-등억 김아가타묘-울산 병영순교성지-언양성당-덕현삼거리에서 95Km를 마무리 하고 1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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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사진 죽림굴 표석

 

06:35 서울역에서 KTX에 올라 08:52에 울산역에 도착한다.

도봉역에서 첫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면 06:35 기차 보다 이른 시간의 앞차를 탈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시간의 KTX를 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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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역 앞에서 328번 버스를 타기 위해 새들백에 소프트케리어를 넣고 간다. 자전거를 접어서 가방에 넣어 메고타면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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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금요일인데도 자전거를 휴대하여 KTX를 쉽게 탈 수 있는 것은 JAVA Folding 26"이기 때문이다. 접어서 KTX출입구 선반에 넣고 밸크로를 이용하여 묶어두면 안전하고 통행하는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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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플렛폼 4번으로 내려가기 전에 2층 도시락 매점에서 아침 식사를 구매하여 차량에 탑승한다. 이른 시간에 탑승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울산역에서 식사하는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7,000원짜리인데 맛도 괜찮고 식사의 질도 그런데로 이용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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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번 버스를 타고 약48분 후에 이곳에 도착한다. 배내2터널에서 약간 더 내려오면 줄림굴 입구 버스탑승장이다.

만약 택시를 이용하려면 울산역에서 3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승용차로 온다고 해도 이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차량통행이 불가한 통제구역이고, 워낙 급경사가 심해서 오토바이나 자동차 운행이 불가능한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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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신불산억새평원,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 그리고 죽림원으로 오르는 입구이다. 

죽림굴을 오르는데 가장 많이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길이다. 등억온천지구에서 간월재로 올라와 다시 내려오던가, 아니면 장안사- 백련암- 파래소폭포를 거쳐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너무 길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사유지의 땅 주인과 분쟁이 있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등산객들도 이 길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배내터널에서 2Km 정도 내려오면 사슴목장과 배내통하우스 사이에 있는 입구의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간월재로 이어지는 또 다른 임도를 이용한다. 간월재 대피소에서 자전거로 배내길로 다운 할 때에도 바로 사슴목장 쪽으로 하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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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 입구쪽에서 배내2교 쪽을 보면서 촬영한 죽림굴 입구. 죽림굴까지는 3.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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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 갈림길에 있는 등산안내판이 길을 안내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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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방향은 큰 문제가 아닌데 자전거를 타기는 커녕 끌고 올라가는 것 조차도 힘이든다.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 경사도는 어림잡아 10~15%구간이 여러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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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 군데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고 열쇠로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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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거리는 3.6km 내외인데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소요된 시간은 1:40분 이상 걸렸다. 죽림굴 입구의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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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 계단 입구 좌측에 서 있는 성지에 대한 안내 표지석 

 

인근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현 등억온천지구 일대)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렸다. 폭 7m, 높이 1.2m 규모지만 입구가 낮아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년)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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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오른쪽에 죽립굴(대재송소) 안내판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Catacombae)였다. 험준한 산악지대에 죽림굴이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1860년) 때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미사를 집전하며 스승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하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교우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1860년 폐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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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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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부산교구에서 세워둔 죽림굴에 대한 표지석이 굴입구 우측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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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숙여 굴 속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좌측 중앙에 제대가 있고 제대 우측에는 성모상과 양초, 성수병이 놓여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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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에 보이는 것이 제대인데 제대 위에 양초와 성모상이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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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카메라의 불을켜서 살펴보니 묵주와 성수병도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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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안에서 밖을 촬영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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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에 가리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구는 작지만 내부에는 더 큰 공간이 있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타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장하치명’(杖下致命)한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 동생이기도 하다.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와 오빠 김영제가 체포되자 그 뒤를 따르고자 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김 아가타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이곳 죽림굴로 찾아 들었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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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3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토마스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죽림굴 내부에는 처음 입구와는 달리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다. 불편하지만 수십 명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규모이다.

결국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김 아가타의 유해는 간월 공소(현 일송정산장 옆 산)의 뒷산에 모셔졌다.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정녀 김 아가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잡혀 가려 했던 그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만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3월 4일 부산교구는 간월에 있던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했다.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6년 2월에는 죽림굴 주변을 정리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우고 입구에 계단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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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 순례를 마치고 다시 오던 길로 뒤돌아 내려가서 24번국도로 배내고개로 올라가 다음 성지인 살티성지로 가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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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못해서 차라리 내일 오전에 서울에서 내려와 등억온천지구에서 합류하기로 한 동호회 회원들이 오르기로 했던 간월재로 올라가서 등억 김아가타묘를 참배하고 병영순교성지로 가기로 순례 방향을 고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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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정도 끌바와 낮은 기어로 서행하면서 페달링을 하다보니 간월재 휴게소 지붕과 대피소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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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재 대피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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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영남알프스의 관문 간월재 휴게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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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나 영상에서, 또 사진에서 자주 보아왔던 전경이 눈 앞에 펼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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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전망대에 올라서서 동쪽을 내려다 보니 산아래 등억온천지구가 보이고 멀리 언양과 울산시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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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뒤로 단체로 등산을 온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장관을 처다보며 연신 찬사를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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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과 물을 보급받아 소실된 에너지를 보충 하고서 시멘트로 포장된 등억온천지구로 다운을 시작한다.

헤어핀이 많아서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브레이크 패드 타는 냄새도 난다. 중간에 로터를 식히기 위해서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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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다 등산로 안내판을 살펴보니 신불산과 간월재로 오르는 길은 여러 곳이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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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전거로 오를 수 있는 곳은 지금 내려가는 이 길, 즉 동쪽의 등억온천 지구에서, 그리고 서쪽 사슴농장 쪽에서 간월재로 오를 수 있다.
양쪽 모두 약 6km의 거리이지만 비교적 낮은 경사도로 라이딩이 용이한 길은 서쪽 사슴농장에서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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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억에 도착하여 찾아가야 할 다음 순례지는 김영제 여동생 동정녀 김아가타묘인데 ...작괘로를 만나 좌회전하여 1km 정도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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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의 일송정산장 간판이 나오면 아래의 작은 교량을 건너서 일송정산장 앞마당을 지나 주차장 뒤쪽으로 들어가니 개 두마리가 짖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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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에 보이는 강아지가 있는 좌측 위쪽에 개집이 있고 그 뒤쪽에는 염소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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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우리 앞을 지나 숲을 헤치고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 200m 쯤 올라가니 멀리 십자가 돌비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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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골에 살던 동정녀 김 아가타(1836-1860년)는 언양의 첫 신자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로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1804-?)와 오빠 김영제 베드로(1827-1876년)가 잡혀가자 뒤를 따르고자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포졸들이 다른 데로 팔아넘기려 하자 도망쳐 나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피신해 있는 죽림굴에서 은신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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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죽림굴에서 최양업 신부를 공경하다 선종한 동정녀 김 아가타 묘이다. 1991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건립한 묘비.

 

죽림굴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바깥소식을 전하고 식사 준비와 빨래 등으로 최 토마스 신부를 정성껏 공경하였다고 전한다.
최 토마스 신부는 짚신을 삼고 교우들은 이것을 팔아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잡혀 갔던 후유증으로 여러 날을 앓다가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아가타는 최 토마스 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24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으며, 둘러 있던 교우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시신에다 솔가지를 덮고 묘비인 패장을 세워 주었으며, 며칠 후 교우들이 간월골로 옮겨와 공소 뒷산에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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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아가타가 매장된 간월골은 경상남도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가 있던 곳으로 김교희 집안을 중심으로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샤스탕(Chastan) 신부의 방문이 있었고, 1845년 다블뤼(Daveluy) 주교가 방문했을 때는 예비신자가 150명이나 되는 큰 공동체였었다. 1850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방문하기도 했다.  

동정녀 김 아가타는 선종 후 경상남도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가 있던 간월골의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1860년 경신박해 때 포졸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17명의 신자들이 체포되고 남은 신자들도 가산을 모두 빼앗긴 채 쫓겨났다. 마침 순회 전교를 위해 이곳을 방문한 최양업 신부 또한 죽림굴로 피신하는 등 간월 공소는 거의 해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김 아가타의 아름다운 생애는 그 동안 구전으로만 이곳 신자들에게 전해오고 있었는데, 최양업 신부가 선종(1861년 6월 15일)하기 전인 1860년 9월 3일 죽림굴에서 리브와(Libois) 신부와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에게 보낸 열아홉 번째 마지막 서한에 그녀가 소개되어 있음이 후에 확인되었다.

 

“24세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타였습니다.

 

아가타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타는 운명하였습니다.”(언양 성당 신앙전래 200년사, 1993년)

 

1991년 4월 17일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김 아가타의 묘소를 정리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문에 이해인 수녀가 쓴 시가 홀로 그녀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랑의 순교를 열망했던  / 천심의 복된 동녀 아가다여  / 지지않는 꽃으로 피어나소서  / 믿음의 길 밝히는 별이되소서.”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체포되려 했던 김 아가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교구는 2008년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 순교자의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동정녀 김아가타 묘를 뒤로 하고, 이제 울산병영 순교지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내일 다른 일행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울산병영 순교성지를 둘러보고, 언양성당과 덕현삼거리 까지 다시 뒤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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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괘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신화리로-언양로-울밀로를 거쳐서 태화강의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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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 대밭길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풍치나 수해예방으로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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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자연 친화적인 자전거 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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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대교를 건너서 늦은 점심으로 갈비탕을 먹은 후, 산업로를 진입하여 효문역에서 좌회전하여 외솔교를 건너니 병여순교 성지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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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뒤에서 동천강 쪽으로 바라본 울산 병영장대 순교성당 외부 모습

 

성당 앞 마당에는 야외제대와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하며,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란 뜻이다.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에 있는 수영 장대골과 마찬가지로 울산시 중구 남외동에 위치한 울산병영 장대 역시 천주교인들이 무참하게 처형된 순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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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강 쪽 성지 앞마당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비 

 

병인박해(1866년)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박해로 기록된다.
울산병영 장대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은 소위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에 처해졌는데, 이는 참수된 이들의 머리를 장대 위에 매달아 두는 대단히 가혹한 처형 방법이었다.

병인박해 당시 이곳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 兵馬節度使)가 있었고 장대 앞에는 연병장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군인들의 주둔지로서 군사 훈련뿐 아니라 간혹 중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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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경신박해 때와 병인박해 중인 1868년, 두 차례의 큰 박해 때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경신박해 때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한 오치문, 병인박해 때 경주 감옥에 갇혔던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회장 등이 이곳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울산병영 장대의 첫 번째 순교자로 알려진 오치문은 언양 사람으로 해주(海州) 오(吳)씨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는 1801년 이곳 언양에 귀양 온 강이문에 의해 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교인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학자이면서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외교인들과도 별로 가까이하지 않던 그는 오로지 산골에서 숯을 굽는 교우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며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가 1860년 체포되어 울산병영 장대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허인백은 김해 출신으로 언양 간월로 이주해 살다가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이 고백하였다. 경주로 이송되어 8개월 동안 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의해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허인백은 간월보다 더 깊은 산중의 대재 공소 죽림굴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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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그는 충청도 공주에서 박해를 피해 온 김종륜과 대재 공소회장이던 이양등의 가족들을 만났다. 이 세 가족은 안전한 피난처를 물색하다가 경주시 산내면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 있는 한 범굴을 찾아내고 그곳에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이들은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고 부락으로 내려가 밥을 구걸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밤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포졸들은 이 깊은 산중에까지 들이닥쳐 결국 이들은 경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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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南延君) 묘 도굴사건으로 대원군이 크게 노해 매우 혹독한 박해령을 내렸기 때문에 포졸들은 혈안이 되어 산 속 깊은 곳까지 신자들을 찾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경주 진영에서 가혹한 형벌과 심문을 받던 이들은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마침내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병영 장대에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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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순교자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가 수습해 사형장 근처 강둑 아래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1907년 유족들에 의해 연고가 있는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5월말 허인백의 손자 허명선과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에 의해 대구 월배 천주교회 묘지로 다시 이장하였다. 

1962년 10월 25일에는 대구 가톨릭청년회 주선으로 월배 교회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했다가 또다시 1973년 10월 19일 대구시 동구 신천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 김종륜 루카(1819-1868년), 이양등 베드로(?-1868년) 세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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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산 성당(전 울산 성당)에서는 1957년에 태화강변의 새치벌에 작은 팻말을 세워 순교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고 하는데, 강변 정비로 지금은 어떤 표시도 찾을 수 없다. 이후 순교터를 보존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1977년 동천강변에 순교지 535평을 매입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1979년 9월7일 본당 사목회가 중심이 되어 개발에 착수하여, 순교자 현양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그리고 야외 돌제대를 설치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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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한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세 순교복자 순교 안내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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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상이 남쪽 마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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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봉헌된 울산병영 순교성지 성당 현관

 

1988년 병영 성당이 설립되면서 순교지에 대한 관리를 담당해 오던 중 울산병영 순교성지가 울산 중구청의 ‘테마 관광가도 사업’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부산교구는 2013년 4월 14일 울산병영 순교성지성당 기공식을 갖고 2층 규모의 성당 신축에 들어가 2014년 3월 15일 부산 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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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에 붙어 있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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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순교 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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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교우 한 분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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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아래층에 있는 휴게소에 들러서 냉음료를 한 잔 마시며 잠시 사무장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순례 확인 스탬프를 찍은 후에 동천강 제방으로 내려가 자전거 도로를 진입한다. 

돌아오는 길에 처다보는 십리대나무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멋진 아이디어다. 한강이나 중랑천에도 이러한 대나길이 조성되면 어떻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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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내외를 달려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언양성당으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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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정문 입구, 이곳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03호(성당과 구 사제관) 언양성당이다.

90주년 본당 행사의 날 현수막이 성당 입구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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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이르니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소의 온상지로 손색이 없는 1926년 12월 5일 부산(현 범일) 본당으로부터 분리.설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사적지 안내판과 예수님상이 반가이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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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있는 사적지와 위치를 상세히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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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의 푸른색 지붕이 구 사제관(현 신앙유물 전시관)이고, 우측의 건물이 성당이다.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언양 성당(사제관 포함)은 고딕식 형태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이다.  

일설에는 이 지역 출신 오한우(베드로)가 1790년에 영세한 뒤 신유박해 때 충청도 지역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백지사(白紙死)를 당했으며, 오한우와 같이 영세한 김교희가 박해를 피해 내간월 불당골(佛堂谷, 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그리하여 언양 지역에는 이미 1800년대 초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교회 측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또 백지사가 병인박해 와서야 비로소 시행된 사형의 한 방법이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그 근거는 매우 희박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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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사무실 건물, 현관 좌측에 순례확인 스탬프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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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뒤산에 위치한 대형 십자가 예수님상에 올라 내려다본 성당 외부 모습

 

경상도 남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언양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지역에는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金在權, 프란치스코)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이다. 불당골은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공소로 변모하였으며,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가 방문하여 차례로 공소를 치르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죽림골),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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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 뒤산에 있는 대형 십자가상이 세워져 있다.

 

박해가 끝난 뒤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현 계산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A. P. Robert, 金保祿) 신부가 1883년에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때의 신자수는 38명이었다.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 설립, 이 지역은 조조(M. 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 부산 절영도에 정착하여 부산(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을 설립하게 되면서 새 본당 소속이 되었다. 1904년 6대 주임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신부 때에는 살티 공소 · 언양읍 공소 외에 순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세 공소의 신자수는 153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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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에서 뒷산 정상에 조성된 성모동굴로 가는 길. 

 

언덕 위에 대형 십자가 뒤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순교자 오상선의 묘가 있다.
언양 지역의 신자들은 이미 1888년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박우양(朴遇陽, 가브리엘) · 김문익(金文益, 안드레아)을 비롯한 이 지역 신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6년 12월 5일 언양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E. Beaudevin, 丁道平)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듬해 4월 4일 정식 임명을 받고 5월 14일 본당에 부임한 보드뱅 신부는 부임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29년 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고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81년 5월 24일에는 신용 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1986년 11월 9일에는 죽림굴 사적지를 발견하였으며, 1989년 7월 20일에는 사제관을 완공한 뒤 이듬해 12월 4일 옛 사제관 자리에 ‘신앙유물 전시관’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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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이장한 순교자 오상선의 묘. 

 

오상선은 병인박해 때 언양 옥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한 후 어음리에 묻혔었다. 성모동굴로 가는 산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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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묘소 표석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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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로 오갈 때 만나게 되는 미송 소나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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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시관 앞에 세워진 안내판

시간이 늦어 아쉽게도 유물관 문이 닫혀서 유물관을 둘러보지 못했다.

언양성당은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했다.  

1989년 새 사제관을 완공한 뒤 이듬해 12월 옛 사제관 자리에 ‘신앙유물 전시관’을 개관했다. 

2004년 근대문화유산 제103호로 지정된 성당과 신앙유물 전시관은 7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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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시간에 맞추어 순례를 해야 유물관을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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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에 위치한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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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임으로 보드뱅 신부 상  
보드뱅 신부는 성당을 1929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언양 성당(사제관 포함)은 고딕식 형태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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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종탑이 언양성당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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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건물 현관에 새겨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03호 표지판과 1936년 성당신축 돌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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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남쪽 마당의 야외 제대와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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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탑과 성당 건물 사이에서 바라본 성모상과 뒷산의 소나무 밭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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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소의 온상지 언양성당을 둘러보고 덕현삼거리 쪽으로 페달링을 하는 서산에는 벌써 뉘엿뉘엿 해가 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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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지도상에 표시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복병을 만났다. 도로는 파헤쳐져 있고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우회 도로로 돌아갈까 하다가 마지막 오늘의 투혼을 불태우며 500m가 넘는 황토밭으로 자전거를 밀고 끌고를 거듭하다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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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로에 진입하여 덕현삼거리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은 순두부백반으로 원정 첫날 순례길 95km를 마무리 하였다.
오늘도 어려운 코스를 안전하게 동행하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내일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일행들을 만나게 된다.  
 

※ 첨부 : 29차_죽림굴_간월재_간월공소_병영순교성지_언양성당_170610.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85005?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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