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차 순례- 서천줄무덤, 독뫼공소, 보령서짓골, 갈매못, 청양 다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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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차 순례- 서천줄무덤, 독뫼공소, 보령서짓골, 갈매못, 청양 다락골

20170618(일) 어제 아내가 내일 주일은 레지오 친목 야유회 때문에 특전미사를 봐야 한다기에 함께 저녁 미사를 보고, 아침 첫 전철을 타고 용산역에서 06:23 장항선 무궁화호를 이용 서천 판교역에 09:25에 도착, 서천 작은재 줄무덤, 독뫼공소, 보령서짓골, 갈매못, 청양 다락골을 순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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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역은 처음 가보는데 최신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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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코스는 만만치 않다. 로그파일을 그리면서 아무리 살펴봐도 4~10%가 넘나드는 업힐구간을 자그만치 5개나 통과해야 한다. 때문에 할 수 없이 두 개 구간으로 나누어 오전에는 서천지역과 서짓골을 둘러보고 웅천역에서 점심 후 기차로 웅천12:24~청소역12:48을 점프 하고, 오후에 갈매못과 청양 다락골을 순례한 후 청소역으로 되돌아와서 상경한다. 오전 코스 길이가 시간적으로 촉박하여 아침식사도 용산역에서 기차에 오르면서 빵과 음료를 구매하여 기차 내에서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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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역을 나와 첫번째 찾아가는 곳은 서천지역 작은재 줄무덤 성지다. 

만금길을 따라 마을앞을 지나 가파른 업힐을 오르니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백색순교자들의 줄무덤 기념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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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왼쪽이 작은재 공소가 있던 금덕리, 오른쪽이 독뫼 공소가 있던 수암리 방향이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충청남도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성스러운 피를 흘렸던 성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무덤 터가 2010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같은 사실은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전주대학교 교수)가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자료집에 따르면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들 가운데 천방산(千房山, 324m) 산막골(현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은 신앙 선조들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군란을 피해 인적 없는 산간벽지에 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곳이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년) 주교와 페롱(Feron, 權, 1827-1903년)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심한 형벌을 받고 피를 흘렸던 점으로 보아 성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페롱 신부는 1858년 9월 24일과 25일, 1859년 9월 27일 등 총 6통의 편지를 산막골에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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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막골 교우촌에 대해 그 동안 경북 상주시 모동면 신흥 1리에 있는 산막골로 이해해 왔으나 페롱 신부의 집 주인이자 복사로 활동했던 황기원, 황천일 등이 거주했던 곳이 서천 산막동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페롱 신부가 사목 중심지로 삼아 여러 차례 서한을 작성한 곳은 서천 산막골(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이 확실하며 신앙 선조들이 공동체를 이뤄 산 곳임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이곳은 황석두(黃錫斗, 1813-1866년) 루카 성인 일가가 충청북도 연풍에서 이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던 뜻 깊은 교회 사적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1994년 산림도로 개설과 함께 줄무덤 터는 콘크리트에 묻히고 말았으며,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발굴된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도 연고자가 없어 인근에 다시 묻혔으나 그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 천방산 ‘작은재’ 는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가 있을때에 독뫼공소(문산) 신자들과 작은재(판교) 신자들이 통발을 하던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이곳에는 약 30여 기의 작은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1992년부터 1994년까지 11.5Km를 서천군 문산면 신농리에서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까지 천방산 임도를 콘크리트로 포장 중에 파묘가 되었고 파묘시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들이 출토되었으나 연고가 없어 어딘가에 재 매장 되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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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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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리 독뫼공소 표지석 방향으로 다운힐을 하면 14처 십자가 길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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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뫼공소터 옆에 서천성당에서 순례확인 스탬프 함과 성모동산을 조성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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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동산의 장미꽃 묵주를 든 상모상이 아침 햇살에 유난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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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동산 아래 모퉁이에 있는 독뫼공소 표지석

 

마을에 사시는 40대 청년이 고맙게도 더운데 냉커피 한 잔 하면서 쉬었다 가라는 권유를 받고도 마음이 바빠서 감사히 뿌리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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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골로 다시 오르려니 시간적으로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하고 보령 서짓골로 페달링을 한다.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띠안말) 터 입구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는데 아쉽게 둘러보지 못한다.
정확한 주소는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81번길 119이다. 산막골 공소터에서 줄무덤터로 자전거길이 연결 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

 

대전교구 서천 본당 주임 정성용(鄭成溶) 요한 신부가 부임하면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터전들이 하나씩 밝혀지게 되었다. 2010년 11월 13일 천방산 고갯마루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에 세워진 성모동산과 공소 터에서 작은재를 오르는 산길에 세워진 십자가의 길 14처에 대한 축복식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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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뫼공소터 수암리를 벗어나 서짓골로 오르는 판문로 좌우 산에는 스퍼미딘과 스퍼민 향이 가득한 밤나무 꽃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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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호로 달리는 판미로는 차량 통행도 별로 없고 한가로이 도로 좌우에는 노란꽃들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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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회전 하여 보령호 상류 늑전교를 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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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 본 보령호는 가뭄 때문에 저수량이 적어 속살마저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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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짓골 성지에 도착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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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전경. 주차장 겸 광장 너머로 야외제대와 순교자 현양비가 보인다.


서짓골은 오후에 둘러 볼 갈매못 네명의 순교성인들이 묻혔던 거룩한 땅이다. 

1866년 병인박해의 피바람이 전국을 뒤덮었을 때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충청수영(忠淸水營)이 있던 보령의 갈마연, 지금의 갈매못 성지 해변에서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자신들의 붉은 피로 모래사장을 붉게 물들였다. 이 중에서 다블뤼 주교를 포함한 다섯 순교자는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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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1866년 3월 7일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교구장직을 승계해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4일 만인 11일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대원군과의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자들이 마구 처형되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의 더 큰 희생을 막고자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하였고, 다른 선교사제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쓴 후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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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은 다블뤼 주교 일행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국혼(國婚)이 임박한 조정의 상황으로 인해 서울에서 250여 리 떨어진 충청수영이 있는 보령 고을의 갈마연까지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고, 중간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 장주기 요셉 회장도 동행하게 되었다. 병인년 3월 29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 처형장 근처에 도착하여 포졸들이 다음날 이웃 읍내를 돌며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짜자, 다블뤼 주교는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거라.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고자 했던 경건한 열망과 위엄 있는 어조에 포졸들과 군사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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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에서 순교한 후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이름을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한 야외제대

 

이렇게 다섯 순교자들은 주님 수난에 동참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았고, 포졸들은 붉은 피가 흩뿌려진 모래밭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 순교자들의 목을 하나씩 장깃대에 꽂아 깃대를 똑바로 세워놓았고, 목이 잘려진 몸은 그대로 두어 세상 사람들이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3일 후인 1866년 4월 2일 수영의 지시에 따라 비신자들이 장깃대에서 순교자들의 머리를 내려 각각의 시신과 함께 인근 모래사장에 묻었다.
이곳이 갈매못 다섯 순교자들의 첫 번째 무덤이자 임시매장지였다. 이때 비신자들은 프랑스 선교사 3명의 시신을 한 무덤으로, 조선인 2명의 시신을 또 한 무덤으로 만들고 그 위에 잔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목이 잘려진 부분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 순교자들의 신원을 확실히 한 후 시신마다 안가(다블뤼 주교), 민가(위앵 신부), 오가(오메트르 신부), 황가, 장가라고 쓴 명패를 달았다. 1899-1900년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에 이와 관련된 증언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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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두의 시신은 임시매장 직후 조카이자 양자인 황기원 안드레아와 그 아우인 황천일 요한 등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2리)에 안장했다가 1982년 8월 25일 고향 인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하여 고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갈매못에 다블뤼 주교, 위앵 ·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시신만 남게 되자, 장주기의 아들 장노첨이 다른 곳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청양 다락골 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시신 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할 뿐 아니라 발각될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노첨은 다시 남포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일명 이사심) 바오로를 찾아갔고 그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박해시대 교우촌 사이에 연락체계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1866년 5월 21일 갈매못 임시매장지에서 순교자들의 목과 시신을 일치시키고 염을 한 뒤 10리가량 떨어진 오포리의 야산(일설에 콩밭)에 암장하였다. 이것이 갈매못 순교자들의 두 번째 무덤이며 하나의 봉분을 쌓아 만들었다. 이 무덤은 이후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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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우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첫 번째 이장을 주도했던 이화만이 1866년 6월 직접 무덤 상태를 확인하고 홍산 도앙골(현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 교우촌에 살던 김순장 요한 금구와 두 번째 시신 수습 및 이장을 의논했다.
두 사람은 이장 비용을 신자들에게 추렴하고 이장 장소는 남포 서짓골 이씨 집 뒤편 골짜기 담배 밭으로 결정했다. 신자들은 비신자 최가의 배를 삯 내고 역시 비신자인 서성학 형제를 사공으로 고용했다. 이장은 1866년 7월(음력)에 이뤄져 서짓골에 안장되기까지 10-15일이 소요되었다.
갈매못 인근 두 번째 무덤에서 서짓골 세 번째 무덤까지의 이동 경로에 대해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루카 소장은 다음과 같이 고증했다.
여수애(현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의 여수해) → 가패 → 슬섬(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의 솔섬) → 녹안이뿌리(현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 독대섬) → 완장내(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 곰재(현 보령시 주산면 동오리) → 서짓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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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짓골의 세 번째 무덤은 1866년 7월 25일(음력)부터 1882년 1월까지 15년 6개월 동안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결과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이후 순교자들의 유해는 1882년 11월 6일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 내 조선대목구 대표부로 보내졌다가 1894년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되었다. 6년 뒤인 1900년 9월 5일에는 명동 성당 지하묘역에 옮겨진 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1968년 10월 6일)을 1년 앞둔 1967년(정확한 일자에 대한 기록이 없음)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네 순교성인들의 시신 이동에 앞장섰던 이화만과 그 아들들은 그 해 가을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병인년 12월 12일 ‘무참히 맞아 죽어 시신이 버려졌다’는 간단한 기록과 구전만 전해질 뿐 시신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 이사심의 증손인 이우철 시몬(1915-1984년) 신부는 이사심의 부인인 정 마리아의 묘(부여군 충화면 천당리 소재) 묘비를 직접 써 이사심 삼부자의 순교 내력과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경위를 기록했다. 또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홍산 삽티에 안장해드린 조카들 역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서짓골은 부여 금사리 본당 제3대 주임인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가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기념하며 그 위치를 확인하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힌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 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다블뤼 주교의 주 사목지이며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하부내포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고,2013년 10월 31일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현지에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서짓골 성지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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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짓골을 뒤로 하고 웅천역으로 달려간다. 웅천 전통시장 내에서 점심을 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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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역 대합실에 이르니 보령의 자랑인 웅천 오석으로 만든 벼루와 돌공예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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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역 플렛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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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무궁화호를 탑승하여 서쪽 창가를 바라보니 웅천들녁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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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녁 논에는 벌써 뿌리를 내린 모들이 빠르게 녹색 빛으로 변하고 있다. 또 가을이 오면 저 들녁도 황금색으로 변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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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역에 하차하여 부지런히 도미항로를 페달링 한다. 이제 갈매못 성지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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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저수지를 지나 충청수영로 언덕길을 오르니 충청 수영성 영보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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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성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영보정으로 올라 내려다본 동양의 나폴리라 해도 손색이 없는 오천항은 언제봐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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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항은 만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까닭에 방파에 별도의 피항시설이 필요 없을만큼 자연적 조건이 좋은 곳이다. 

따라서 방파제 없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선착장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고, 1일과 6일에 서는 오천장을 찾으면 각종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오천항에서 이루어지는 잠수기 어업으로 채취한 키조개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산물이고,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홍합역시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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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은 충청수영성 안에 있는 정자로 연산군 11년(1504년) 충청수사로 부임한 함평이씨 이랑(李良) 장군이 처음 지었다.  

다산 정양용은 영보정연유기를 지어서 남겼고, 백사 이항복도 조선 최고의 정자라고 칭찬하였던 건물이다.
조선왕조의 문장가인 장유(張維)는 "永保亭勝槪冠湖中"이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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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에 올라 내라다본 오천항은 절경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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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지나는 분들은 꼭 한번 영보정에 올라 아름다운 미항을 구경 하시길 강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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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건너편 동쪽 성 아래에 있는 내삼문과 장교청을 둘러보고 내삼문 앞에 있는 충청수영 수사들의 공적비와 사적비들을 둘러보고
내리막에 이르니 오천초등학교앞을 지나서 어느새 갈매못 성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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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성지입구 주차장에는 여러 대의 버스들이 주차되어 있고 마산에서 단체로 순례를 온 교우들이 점심을 마치고 ~ 번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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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건립된 승리의 성모 성당 외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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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성모 성당의 서쪽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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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성모 성당 앞면의 다섯 분의 순교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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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황석두 루가 , 성 장주기 요셉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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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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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건립된 승리의 성모 성당 뒷편의 야외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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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건립된 승리의 성모 성당 야외 제대 옆에 세워진 성당건립을 위해 봉헌한 교우분들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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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성모 성당 내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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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성모 성당에서 바라본 순교성지 기념관 앞 마당과 서해바다


1866년 3월 30일, 그해의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5위의 성인 중 황석두 루카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4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그해 여름 이화만 바오로와 두 아들 그리고 인근 교우촌인 도앙골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현 서짓골 성지)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1882년까지 16년간 묻혀 있던 4위 성인의 유해는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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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갈매못 순교성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의 후예였던 고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가 1925년 인근 신부들과 함께 목격 증인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순교지를 확인하고, 이듬 해에 20평의 땅을 우선 매입해 1929년에 서울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그 후 갈매못이 순교성지로 다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대전교구 대천 본당이 설립된 후 순교자 현양운동과 함께 1975년 9월 당시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고 정용택 사도 요한(1998년 7월 3일 선종)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성인 기념비와 야외제단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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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 내부에 진열된 순교 당시의 그림, 성인 관련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순교성지 기념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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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 안(安) 주교의 저술서 및 역사 자료 전시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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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제대 뒤 벽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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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제대 뒤 벽 왼쪽에 있는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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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제대 뒤 벽 오른쪽에 있는 장주기 요셉상 황석두 루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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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도로변에 자리한 순교성인비, 순교복자비, 예수성심상, 십자가의 길 14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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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 정면의 외부 모습

 

앞에 야외제대와 좌우로 성 다블뤼 주교상과 성 황석두 루카상이 세워져 있다.

충남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순교성지 갈매못. 한국 천주교회 최고의 성지로 꼽을 만한 곳이다. 바로 이 바다가 모리밭이 이분들이 순교한 곳이다.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에 있는 이 순교성지는 서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개발되어 있는 성지라는 점에서 꼭 한 번 순례해 볼 만한 곳이다.
특히 일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교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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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기념관 앞의 성모상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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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도로 쪽에 세워진 예수님상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여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도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시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5월 6일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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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야외 마당에서 처다본 승리의 성모 성당 옆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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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에 있는 표지석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 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사무실에 들어가 수녀님이 미리 찍어둔 순례확인 스탬프 용지를 받아들고 오늘 마지막 순례지 청양 다락골을 향하여 남쪽 오천해안로 고개를 넘어 영보지 옆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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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쉽게도 오르막에서 뒷바퀴가 바람이 빠지고 없다.

엎어진김에 쉬어 간다고 오늘 바쁘게 시간에 쫒겼는데 튜브를 바꾸어 끼우면서 휴식을 취하고 공기를 주입하고 ...
더구나 땡볕이 요란한데 마침 그늘에서 차분히 펑크 수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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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수리를 마치고 다시 오천중앙로 업힐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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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포 향교앞을 지나 다시 심한 길재 경사로를 오르는데 더위가 겹쳐서 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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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재 정상에 있는 보령정이라는 팔각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수분과 에너지를 보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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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고개를 달려내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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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서원 앞을 지나면서 우측에 청천저수지 바닥을 살펴보니 잡초들이 푸른색을 띄고 마치 논밭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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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번 죽성로를 타고 가다가 건천길-물편이길 마을 뒤산 언덕을 넘어서니 다락골 성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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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이름도 없이 줄지어 신앙을 증거한 다락골 줄무덤 성지이면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부자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표지판을 따라 줄무덤 성지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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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령산맥의 줄기가 지나가는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는 오소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청양 다락골은 굽이굽이 산비탈 중턱에 40여 호의 인가가 모여 있는 두메산골이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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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게 된 무명순교자상

 

차량 순례를 하는 분들은 청양~대천 국도를 따라 8킬로미터쯤 가면 화성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면소재지 조금 못 미쳐 국도변에 최경환, 최양업 부자상(父子像)이 보인다. 묵주와 성지(聖枝)를 들고 앉아 있는 최경환 성인, 그 옆에 십자가와 성서를 펴든 최양업 신부의 부자상은 지난 1986년 8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곳이 이들 부자의 탄생지임을 나타낸다.

다락골은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다시 2.5킬로미터 가량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국도에서 갈라지는 초입에 ‘양업로(良業路) - 성지 줄무덤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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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순교자상 좌.우에 세워진 죽음과 부활상이 대나무 밭에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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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호흡을 고르며 산길을 마저 오르니 예수님상이 순례자를 반기고, 항아리 모양으로 생긴 14처가 나타난다. 여기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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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줄무덤 화살표 방향 산길로 14처를 따라 올라 산등성이에 이르니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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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리 다락골은 처음에는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것을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혹은 다래가 많이 나서 ‘다랫골’로 불렸다고도 한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된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 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최인주가 슬하에 둔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는다. 이들은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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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줄무덤 전경

그 후 다시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한 최씨 일가는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고 1836년에는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보낸다.
1839년 최경환은 가족 및 교우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다. 한편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의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씨 문중에서 일군 새터라는 마을 이름은 지금도 신앙의 흔적으로 역력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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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줄무덤에 있는 천주교무명순교자들의 묘비와 그 옆의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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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줄무덤은 제1줄무덤 앞쪽 능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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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줄무덤 전경
 

하지만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훔쳐 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입을 통해 전해진다.

혹자는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이들이 묻힌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동학란 때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그들의 이름 없는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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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7일 대전교구는 다락골 성지를 성지본당으로 설정하고 상주 사제를 임명하여 성지 개발 및 보존과 순례자와 인근 교우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토록 하였다. 2008년 1월 23일 다락골 성지본당은 다시 성지로 환원되었고 기존의 관할 구역은 청양 본당으로 재편입되었다. 

대전교구는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1월 9일 최경환 성인 일가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 및 선교 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 성지에 건립하여 봉헌하였다. 또한 인근에 있는 새터,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터에 박물관 겸 소성당도 마련할 계획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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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골에 있는 소성당 외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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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현관 앞에 있는 순례확인 스탬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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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현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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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에 봉헌한 성당 현관 모습c3a76306afa3c57a59f30546dd5efaa7_1497881255_14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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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뒤벽에 있는 최경환 최양업 부자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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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내부에는 특이 하게도 팔이 없는 예수님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들이 대신하여 팔 역할을 하라는 뜻일게다.

수녀님 한 분이 피아노 앞에서 성가를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서 잠사 묵상을 하는데 ...갑짜기 이상한 영감이 스쳐지나간다.

낮에 청소역에서 갈매못으로 향하는데 핸들에 붙어 있던 속도계가 빠져버리고 없다. 얼마 전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눈군가 속도계 본체를 빼가버려서 다른 잔차에 있는 속도계를 그대로 이식하여 울산을 다녀왔고, 오늘 또 다시 잃어버렸기에 많이 섭섭한 마음으로 순례를 하던 중 기도를 하는데 갑짜기 잃어버린 속도계가 떠오르면서 청소역 플렛폼에 있을거라는 영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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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을 나와 성당 서쪽 문으로 나와 연못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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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앞에 조성된 연못, 아직 연꽃은 피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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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왔던 동쪽 언덕을 다시 넘어서 청소역으로 가다 보니 독립유공자 최장준 묘소 표지판도 보인다. 저분도 경주 최씨 집안의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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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역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행이도 중리길-황룡장현길을 통과하여 별로 큰 오르막 없이 빠르게 도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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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역으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용산행 기차를 타려고 플렛폼에 들어가는 시멘트 바닥에 아~~낮에 분실했던 속도계가 나를 반긴다.
무려 7시간 가까이 이 길을 지나친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 분실한 것을 다시 찾으니 감사하다.

이 또한 주님께서 주신 순례길의 작은 축복이지만 큰 기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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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청소역을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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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무궁화호에 올라 용산역에서 22:30에 1호선으로 환승하여 오늘도 32차 순례길을 나 홀로 큰 탈 없이 무시히 마칠 수 있어서 기쁜 주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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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 : 32차_서천줄무덤_서짓골_갈매못_다락골_170618.gpx

 

※ 경로 지도 보기 :https://www.komoot.com/tour/282982500?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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