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차 순례 - 부여 금사리성당, 지석리 성지, 익산 나바위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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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차 순례 - 부여 금사리성당, 지석리 성지, 익산 나바위성지

20170621(수) 아침 첫 전철에 올라 종로3가역에서 환승하여 남부터미널에서 06:30 부여행 시외버스를 타고 33차 순례길에 오른다.

대전교구의 부여 금사리 성당, 지석리 성지, 그리고 전주교구의 익산 나바위성지 약 60km의 자전거 순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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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시외버스 터미널에 08:45분에 도착하여 기사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군청 로터리에서 우회전하여 백제교를 건너간다.
군청 로터리로 달리는 길목의 우측에는 반갑게도 부여성당이 아침햇살에 환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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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길의 전체 코스맵, 강경역에서 순례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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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있는 기사 식당의 조촐한 백반으로 조식을 해결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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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0분에 출발하여 계백장군 동상이 서있는 군청앞 교차로를 거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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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교를 건너는데 몇 년전 금강을 종주하면서 지나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백제 고도의 숨결이 살아 있는 부여는 곳곳이 역사 유적지이고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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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교에서 내려다본 금강 둔치~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진 역사적 현장도 부여에 있다. 연꽃이 필무렵이면 궁남지도 꼭 둘러볼만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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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로를 따라서 성충로에 이르다 보니 도로변에 창렬사와 금사리 성당 이정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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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회전 해서 먼저 금사남로를 진입하여 창렬사(彰烈祠)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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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간에 배웠던 유명한 삼학사 위폐를 모시는 창렬사, 충청남도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윤집(尹集:1606~1637), 오달제(吳達濟:1609~1637), 홍익한(洪翼漢:1586~1637)은 병자호란 때 청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최명길(崔鳴吉) 등은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삼학사는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는데 1637년(인조 15) 1월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세 사람은 척화신으로 심양)에 잡혀가 모진 고문 끝에 참형당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창건되었으며, 1721년(경종 1) 사액 서원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벗어난 잔존사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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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로 드나드는 조그만 다리 밑에 천이 흐르는데 물고기가 많아 보이는 습지이다.5d90b84b1a78dc5a94673b1f668a5434_1498216935_8903.jpg

다시 금사리 마을로 되돌아와 첫번째 순례지인 금사리 성당 입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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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옛 성당 옆에 새로 건립한 콘크리트 블록조 성당 외부 모습 

 

자전거를 세워두고 입구에 있는 성모상에 목례를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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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의 성모상 앞에 놓인 돌제대에는 1913년 9월 2일 민 주교 축성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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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지은 성당 내부로 들어가 성체조배를 하면서 오늘 순례길도 안전과 평화로운 순례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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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된 옛 금사리 성당 외부 모습

 

금사리 본당의 옛 성당은 충청남도 부여군에 세워진 첫 고딕식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물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는 초기 성당 건물 중의 하나이다. 아담하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옛 금사리 성당은 1996년 11월 21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었고, 이어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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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해서는 이미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웃의 공주 · 청양 · 논산 · 서천 등과 같이 신자가 많지 않았으므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몇몇 순교자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큰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해가 끝난 뒤 주변 지역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그중 가장 먼저 신자들이 정착한 곳은 청양의 산간 지대와 가까운 부여군의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지역이었다.

 

박해 후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와 ‘양촌 본당’(현 합덕 본당의 전신)의 퀴틀리에 신부도 바로 이 지역에 나마리 공소(현 운산면 羅嶺里의 羅馬里), 도앙골 공소(현 내산면 金池里), 여내골 공소(외산면 前場里) 등을 설립하였다. 구룡면에서 처음 설립된 공소는 1891년에 설립된 고당 공소(구룡면 龍塘里의 姑堂)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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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리 성당 남서쪽 마당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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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금사리 성당 내부 모습. 중앙에 기둥을 세워 전례공간을 둘로 나눈 이랑식(二廊食)이 특징 

 

뮈텔 주교는 1900년에 신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여 지역에 본당을 신설할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4월 27일, 연례 피정이 끝남과 동시에 1900년 10월 9일에 입국하여 한글을 배우고 있던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쥴리앙 신부를 부여 지방에 파견하였다. 공베르 신부는 이때 파스키에 신부와 함께 군산을 거쳐 서천 용아실(현 서천군 마서면 德岩里의 龍臥谷) 공소와 부여 갈덕리 공소에 머무르면서 본당의 중심지를 물색하였다. 


처음 공베르 신부가 정착하고자 한 곳은 갈덕리나 규암(현 부여군 규암면)이었으나, 마침 소양리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서 이곳이 본당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처음 본당의 이름은 당시의 행정 구역명을 따라 ‘홍산 본당’(鴻山本堂) 또는 ‘소양리 본당’으로 불리었다. 당시 공베르 신부가 매입한 것은 흉가로 여겨지던 가옥 3동과 대지, 논과 산 등이었다. 이후 신자들은 공베르 신부가 고용한 중국인 기술자와 함께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06년 성당을 완공하고, 계속하여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1913년 9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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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뒤쪽에 2층 구조로 되어 다락이 있다.

 

공베르 신부는 23년간을 본당에 재임하면서 성당 시설을 완비하는 한편 전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2년 17개 공소에 신자수 882명이던 것이 이듬해에 이미 1,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1923년에는 26개 공소에 1,644명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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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사제관 입구 벽에 있는 오래 된 사진이 금사리 성당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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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사제관 건물. 1993년 보수를 통해 대건의 집(회합실)으로 명명한 후 축복식을 가졌다.

금사리 본당의 옛 성당은 본당 설립과 함께 착공해 6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06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초대 주임인 공베르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했고, 신자들도 손수 건축 일을 도왔다. 벽돌은 직접 황토를 구워 만들었으며 벽체는 윗부분은 붉은 벽돌로, 아랫부분은 회색 벽돌로 쌓았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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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당 북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외부 모습

 

제3대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는 1924년에는 성당 사랑채에 2년제 ‘계명 여자 학술 강습회’ 2학급을 신설하여 주민 교육에 공헌하였고(1932년까지 지속), 4대 이여구(李汝球) 마티아 신부는 청년회를 조직하여 개척 사업에 헌신하였다. 또 이 신부는 성당 지붕을 개량하고, 1936년 ‘서천 본당’(舒川本堂)을 분리하였으며, 6대 김영식(金永植) 베드로 신부는 목조 초가 수녀원을 건립하고, 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서천 본당의 분할로 본당의 관할 구역은 크게 축소되었으며,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교세가 크게 늘지 않게 되었다. 서천 본당은 6년 뒤인 1942년 ‘장항 본당’(長項本堂)의 설립과 동시에 그 공소로 격하되었다.

 

그 후 본당 신자들은 6.25 동란을 맞이하여 본당 신부를 잃게 되었다.
이때 제9대 몰리마르(J. Molimard, 牟) 요셉 신부는 성당과 부속 건물이 몰수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성당을 지키다가 1950년 8월에 체포되었고, 대전으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9월 26일 대전 작은 형제회 수도원 지하실에서 총살당하였다.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는 순교 직후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고, 1960년 대전교구 공원묘원으로 옮겨졌다가 2003년 5월 10일 초대 주임으로 사목했던 수원교구 평택 성당 구내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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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성당 뒤쪽에 있는 강당 외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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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입구에서 바라본 성당 마당과 가운데의 옛성당, 좌측 구 사제관(현 사무실/회합실), 우측 신축 성당 외부모습

  

13대 제제구(R. Jezegou, 최세구) 로베르 신부는 8개의 공소를 신설하는 한편, 외국 보조금으로 이들 강당 8개를 건립하였다. 

또 사제관과 성당 내부를 수리하고 곳곳에 교리반을 조직하여 많은 영세자를 탄생시켰으며, 1955년 홍산에 새 부지를 매입하고 1957년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5월 이를 완공함과 동시에 ‘홍산 준본당’(鴻山準本堂)을 분리 신설하여 그 초대 주임을 겸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본당의 신자수는 1960년 말에 이르러 설립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인 2,174명을 기록하게 되었지만, 이후 홍산 본당의 분리로 인해 다시 교세가 축소되었다.

  

점점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68년 옛 성당 옆에 새 성당을 건립했는데, 그 당시 본당의 신자수는 1,500여명에 공소는 12개에 달했다.
1979년에는 수녀원을 건립해 전교수녀가 부임했고,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밤 농장도 운영해 본당 재정에도 보탰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속에 충청남도 서남부 지역 성소의 못자리로 성직자와 수도자를 다수 배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농촌이 쇠락하면서 금사리 성당도 그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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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리 성당을 뒤로하고 구룡우체국 쪽으로 나와서 대백제로를 올라가는데 뒤 바뀌가 펑크가 났다. 이번 순례를 다녀온 후에 아예 타이어가 무겁지만 펑크에 비교적 안전성이 높은 도로여행용 슈발베 로드플러스로 교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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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제로 주변 논에는 심어 놓은 모들이 비가 오지 않아서 땡볕에 많이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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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7월이 오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30도를 넘는 더위가 ... 방계로의 제방길을 따라 드넓은 들녁을 바라보면서 송학교를 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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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지열은 높지만 시원한 송수로 은행나무길을 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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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로 밤나무숲 언덕 길을 올라간다. 독특한 스퍼미딘(Spermidine) 향이 꼬끝을 진동 하는데 ... 어쩌면 옛날에 이 동네도 밤꽃이 피는 6월이면 아녀자들이 밤에는 바깥 출입을 금기시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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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두번째 성지 지석리 성지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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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옆에 서 있는 지석리 성지 표지석,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

 

이곳은 충청도 임천(林川)의 괴인돌이라는 마을, 오늘날 행정 구역 명칭은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는 두 명의 성인, 곧 손선지 베드로(1820-1866년)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1801-1866년)가 탄생하는 영광을 얻었다.

1백여 년 박해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한재권 요셉(1836-1866년) 성인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이들 두 성인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는 열심한 신앙으로 이미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 감영에서의 신문 중 회장임이 탄로 났다. 그로 인해 손선지는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와 교회 서적의 출처를 알려는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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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그는 옥중에서도 회장의 직무를 다해 갇혀 있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12월 13일 그는 대성동, 성지동 등지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 유해는 전주 서천교를 넘어 용마루재와 유상리(柳上里) 뒷산에 묻혔다가 그 아들에 의해 천호산 기슭 다리실(천호 마을)로 옮겨졌다.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원님까지 지낸 정문호 성인은 임천(林川)에서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했다.
그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외교인들에게 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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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반기는 새집처럼 생긴 순례확인 스탬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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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리 성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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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새로 세운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출생 기념비와 야외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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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2월 초 사람을 보내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는데, 그 소식을 미처 듣지도 못하고 12월 5일 대성동 교우촌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붙잡혀 순교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문호는 옥중에서도 항상 기도로 순교를 예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은 우리가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이라며 자신의 순교를 기쁨으로 맞았다고 한다.

이들 두 순교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설립 2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부여 지석리에는 손선지 성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성식 이후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 성인의 시성 기념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 성당에 밭을 기증했다. 그래서 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는 홍산 성당은 두 성인의 생가터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자 동네 땅 일부를 매입해 1988년 12월 13일 현 위치에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와 50여명 정도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제대와 기념비 안내문을 세웠다. 2014년에는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를 새로 세우고 성지 표지석과 약간의 주차공간을 마련하는 등 주변 조경공사를 마무리해 새롭게 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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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리 두 성인의 기념비를 뒤로 하고 나바위로 가기 위해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나오는데 성지 바로 옆에 사당이 있어서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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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괴석(四塊石) 담장 옆에 있는 1981년에 세운 팔충사 건립비
부여군 향토유적 제 25호로, 백제의 계백을 비롯한 흥수, 성충, 복신, 도침, 혜오화상, 곡나진수, 억례복유의 8충신과 황산벌에서 항전한 백제 5천 결사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 팔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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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앞, 외삼문 아래에는 관리사무소인 충의재(忠義齋)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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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건립한 사적비 등 모두 4기의 비석들이 있고, 
해마다 9월 무렵에 백제 8충신과 5천 결사대의 구국충절을 기리는 팔충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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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은 역사적으로도 예사로운 곳이 아닌 것 같다. 충화로를 향하여 달리다 보니 기미 3·1독립운동 기념 공원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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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의 발원지에 대한 인식을 제고 하고자 박성요, 박용화, 최용철, 문재동, 황금채, 황우경, 정판동 등 애국열사 7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모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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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용 저수지 옆 길 양화북로에서 서동요 테마파크로 들어가는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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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 테마파크는 백제 역사 드라마 서동요 촬영을 위해 2005년에 조성된 곳으로 부여 10경 중 9경에 해당한다.

실제 희대의 명장이며 충신 계백장군이 태어난 충화면 천등산 자락에 위치하여 더 뜻 깊은 테마파크로 한번 쯤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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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제약으로 다리를 건너 파크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진입하는 다리 위에서 사진만 몇 컷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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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로에 이르러 웅포대교를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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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자전거 길 중에 금강길을 달렸던 사람들은 누구나 이 웅포대교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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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교를 건너서 서쪽 길을 타고 내려가거나, 아니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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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대교를 처다보면서 위 사진의 동쪽 길을 따라 계속 내려 가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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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이름도 모를 잡초밭의 둔치를 볼 수 있고 군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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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가 넘었는데 마땅히 식사 할 곳이 나오지 않는다. 함열쪽으로 계속 달려서 성당포 네거리에 이르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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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가 겨우 열무 국수와 비빕밥 밖에 없어서 열무국수로 허기를 해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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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이제 강변로-용북로를 따라 순풍길을 달리다 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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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포들길, 상포마을 경로회관을 지나니 나비위 성지 앞 마당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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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지는 성 김대건 신부가 15살 때 청나라로 유학을 가서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첫 발을 내디딘 축복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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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운동장으로 진입하니 광장 서쪽에는 피정의 집이 보인다.
 

1991년에는 건립한 2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 피정의 집 앞에는 주차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2천 평 규모의 너른 운동장이 있어서 야영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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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 편에는 화장실과 우측에는 대형 주차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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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사항 안내판을 지나 피정의 집 앞에 김대건 신부 상이 나온다. "주의 축복이 이 땅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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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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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쪽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진행하며 살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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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고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대건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발끝까지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km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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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부님 기착지 바로 앞 화산 언덕에는 특이하게도 십자 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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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를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양 떼들에게 세 분 성직자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김대건 신부 자신도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던 고국에서 첫 방인 사제로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 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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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가서 살펴봐도 십자가 바위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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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국 땅을 밟은 김 신부의 감회가 사뭇 어떠했을 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했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 떼였고 다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맞이했으나 그나마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두 잃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또다시 한국 교회는 한 분의 사제도 없는 암흑기를 지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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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12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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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4처 끝자락에 있는 수탉바위 전설도 재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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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8월 17일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길을 떠났던 조선인 선원들과 두 분 성직자를 모신 김대건 신부는 첫 방인 신부로 나바위에 발을 디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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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비록 고국에서의 사목 활동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총명함과 굳건한 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자전거를 멜바로 계단을 올라 김대건 소나무 앞을 지나 ~~~ 화산 8부 능선 부분의 넓은 바위를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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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김대건 신부 시복 30주년을 기념해 나바위 성당 신자들이 화산 정상에 세운 성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탑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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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방향에서 촬영한 기념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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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피정을 돕기 위해 베르모렐 신부가 화산 정상에 지은 망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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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지에는 화산 북쪽 암벽에 금강을 바라보고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나바위 성당이 설립되기 전 금강을 오르내리며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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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위 암반에는 1912년부터 매년 6월이면 이곳에서 피정을 하던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를 위해 베르모렐 신부가 지은 망금정(望錦亭)이 있다. 그 옆 너럭바위 위에는 1955년에 세운 화강석으로 만든 4.5미터 높이의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다.
이곳이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와 똑같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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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매우 재미 있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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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뒤편에는 야외제대와 평화의 모후 성모동산이 꾸며져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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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으로 오르는 오른쪽 입구에는 2007년 9월 봉헌된 김대건 신부 성상이 서 있고, 성모동산 왼쪽으로 정상까지 이르는 길에서 또 다른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와 2대 본당신부였던 소세(Saucet) 신부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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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동산 쪽에 내려다 본 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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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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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1907년에 성당을 완성, 공적비가 경당 옆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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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임시 역사관) 옆에 세워진 예수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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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당은 1897년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요셉 신부가 1906년에 시작하여 1907년에 완성하였다.
설계는 명동 성당 설계자인 프와넬(Poisnel) 신부가 했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으로 벽돌을 쌓아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그리고 1922년 회랑 기둥 아랫부분을 석조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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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의 자비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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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에는 1995년 전주 교구청에서 옮겨온 성 김대건 신부의 성해(목뼈) 일부가 모셔져 있다. 

제대와 그 위의 예수성심상, 촛대, 감실, 세례대 등은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성당 건축 당시 들여와 조립 또는 설치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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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함께 1987년 사적 제318호로 지정된 사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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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화장실 쪽에서 바라본 성당, 기와 아래 동그란 원형 격자 창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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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화장실 쪽에서 바라본 성당과 치유의 경당 전경.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는 대전에서 순례 온 신자들이 앉아서 담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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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앞에는 순례확인 스탬프 함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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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독특하게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7월 18일 ‘화산 천주교회’라는 명칭으로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 되었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때는 화산 성당이라 불렀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을 따라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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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쪽에서 바라 본 경당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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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 아래 주차장에 있는 성지와 주변 순례길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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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앞의 피에타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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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백주년을 맞은 나바위 성당은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 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다. 

당시 본당 주임인 김후상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는 목자가 아니며, 미사를 지내다가 죽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일념으로 피신하지 않고 미사를 계속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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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의 사무실과 성당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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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2층에 임시로 개관한 역사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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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매우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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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으로 내려와 동쪽 나바위길로 내려오니 커다란 나바위 성지 표지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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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길 남쪽에 마을 편의점에 들러 에너지 바와 시원한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 남동쪽에서 바라 본 나바위 경당과 성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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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로를 달려 강경역에서 순례길을 마무리 하고, 16:50 누리호를 타고 상경하는데 오늘 유난히 무덥지만 즐겁고 뜻 깊은 순례길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기쁘다. 찬미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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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 : 33차_금사리_지석리_나바위성지_20170621.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72011?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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