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차 순례- 봉화 우곡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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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차 순례- 봉화 우곡성지

 

20170630(금) 원정 순례길 이틀째 시작은 홍성한 세베리노 형제님 고향집 봉화 한성아파트에서 친구 두 명과 함께 출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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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성지의 대표 사진 우곡성지의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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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길의 전체 맵, 우곡성지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법전-춘양-외씨버선길-높은터-소천면으로 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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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감사한 마음으로 숙소를 정리하고 아파트를 내려와 진입로 초입에 있는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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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는 서울 장충단공원, 대구 월곡역사공원, 김해 연지공원 ... 등에도 있지만 봉화유림들의 독립운동기념비이며 보훈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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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은 2014년 8월 28일 봉화읍 해저리 송록서원 앞 잔디광장에서 이우상 파리장서비 건립 추진위원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유족, 유림대표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제막식』을 개최하였다.<자료 : 봉화군 홈피>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만국평화회의에 한국유림단이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일이다.
서명 유림 중 경북출신이 62명이고 이 가운데 9명이 봉화출신이다. 봉화군과 파리장서 건립 봉화군추진위원회는 오랜 군민의 염원이었던 파리장서비
건립 사업을 지난 2010년부터 건립 건의 및 탄원, 유치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마침내 2014년 8월 결실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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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뒷쪽에 있는 봉록서원 건물과 그 뒤로 어제 저녁 숙소인 한성아파트가 보인다.

 

파리장서 운동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평화회의에 한국유림단이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것을 말한다.

파리 장서(長書)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장서를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으며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은 체포 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 하였으며 (제1차 유림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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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록서원 앞에 있는 탁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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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봉록서원은 2004년 8월 문체부에 등록한 사단법인체로 봉화출신 진일제 류숭조선생,용제 이종준선생,눌제이홍준선생 ,문봉 정유일선생,구전 김중청선생,매헌 홍준형선생,팔오헌 김성구선생,하당 권두인선생,창설제 권두경선생,눌은 이광정 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덕망,그리고 높고 심오한 학풍을 기리며 확고한 국가관과 바른예절,충효사상을 거울삼아서 이 지역주민의 지주로서, 높이 받들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표상이 되도록 하여 날로 퇴폐해져가는 지역의 민심을 순화시켜 밝은 내일을 건설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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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유림 파리장서비와 봉록서원을 둘러보고 24시콩나물국밥에서 아주 저렴한 국밥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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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청 앞을 거쳐서 봉화교를 건너 삼계회전 교차로에서 다덕로 오르막을 올라 창평저수지 동쪽 길을 타고 우곡성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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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저수지 댐으로 오르는 길은 일부 구간에서 부분적으로 포장공사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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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저수지 댐을 오르니 큰 저수지가 나타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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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산은 온통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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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향과 들꽃 향기, 고지대라서 아직 군데군데에서 밤꽃 향기가 코 끝을 자극하는 싱그럽고 한적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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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 성지를 오르는 마을 좌우에는 풋풋한 사과들이 제 모습을 서서히 갖추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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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1리 마을회관 앞을 통과하여 1.7km 정도 달리다 보니 문수산 중턱에 성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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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어제 오후에 들렀던 구구리 농은 홍유한 유적비의 주인공 최초의 칠극 수덕자를 기념하는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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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 성지는 개천을 중심으로 좌측의 도로 왼쪽에 피정의 집이 있고 그 앞에 농은 수덕자의 동상과 그 뒤에 십자가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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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 홍유한 동상 앞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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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수덕자 농은 홍유한 수덕자의 동상과 작품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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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 홍유한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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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건너편에 위치한 피정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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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촬영한 농은 홍유한의 동상과 십자가상, 우측에 있는 책모양의 설치물은 아래의 칠극에 대한 설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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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의 집 앞을 지나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모자성모상이 좌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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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성당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칠극성당과 사제관이 있어서 놀랐다. 

어떻게 세례도 받지도 않은 홍유한 수덕자의 유적지에 성당과 성지가 개발 되었을까 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최초 수덕자 홍유한 선생과 후손 순교자들이 13명이나 되었기에 이곳이 성지로 개발되었고 풍산홍씨 가문의 영광과 순교자 후손으로서의 영예도 동시에 이루어낸 성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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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에는 칠극성당에 대한 안내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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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은 이번 순례길에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스페인 출신 예수회 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 D., 龐迪我)가 지은 가톨릭 수덕서(修德書)로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1614년 북경에서 간행 되었고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천주교가 전래 되기 이전에 조선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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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좌측 동산에 있는 예수님상과 야외 제대 

 

농은 홍유한(농隱 洪儒漢, 1726-1785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풍산 홍씨(豊山 洪氏) 가문은 정조 임금의 외가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던 그는 이미 8, 9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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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성지 칠극성당 현관 모습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같다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오만·음탕·나태·질투·분노·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겸손·절제·정절·근면·관용·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칠극』 중에는 절목(節目)이 많고, 처리의 순서가 정연하며, 비유가 적절하며,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다.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 윤리 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더러,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인하였다. 그러나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은 『칠극』이 공자(孔子)의 사물(四勿)의 각주에 불과하며, 비록 심각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 된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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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칠극』은 1777년(경조1)경의 천진암(天眞庵)·주어사(走魚寺)의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검토되었음이 확실하며,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감화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글필사본이 절두산순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14년 11월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기존의 성당을 칠극 성당으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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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안동교구장에 의해 인준된 칠극의 기도문

 

1750년경부터 이익 선생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홍유한은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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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칠극에 대한 각각의 비는 개천의 동쪽 야영장에 칠극의 길이 조성되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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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의 길을 봉헌한 분들의 이름과 단체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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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의 길을 따라 내려와 작은 교량을 건너 홍유한 후손 순교자 13위 가묘와 현양비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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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 피정집 맞은편에 조성된 홍유한 후손 순교자들의 가묘와 순교자 현양비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컸던 홍유한은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의 살림을 정리하여 1757년 충청도 예산 여촌(餘村)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정진하였다. 고요한 가운데 참 진리를 따라 살았던 그는 1775년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1439m) 밑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라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다블뤼(Daveluy) 주교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했듯이 홍유한은 천주교 서적을 몇 권 읽고,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14.21.28일 등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하고 세속의 모든 일을 접어두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또한 금식재(禁食齋)와 금육재(禁肉齋)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으로 규칙을 삼았다. 동시에 육욕을 금해 30세 이후에는 정절의 덕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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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한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후손들이 13명이나 된다.
그 중 2명(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은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의해 시성되었고, 5명(홍낙민 루카, 강완숙 골룸바, 홍필주 필립보, 홍재영 프로타시오, 심조이 바르바라)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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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 피정집 맞은편에 조성된 홍유한 후손 순교자들의 가묘와 순교자 현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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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의 순교 여정을 보면,
1801년 신유박해 때 홍유한 선생의 인척인 홍정호와 재종(再從) 조카인 홍낙민 루카(洪樂敏, 1751-1801년),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한국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선교활동에 앞장섰던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1761-1801년)와 그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洪弼周, 1774-1801년),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 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1741-1801년) 등 5명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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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위 후손들의 가묘 앞에 있는 제대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홍낙민의 셋째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洪梓榮, 1780-1840년)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그의 며느리 심조이 바르바라(沈召史, 1813-1839년)와 두 살 난 홍[아기] 베드로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홍재영의 부인 정조이(丁召史)도 이때 순교한 것으로 문중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 베드로(洪秉周, 1798-1840년)와 홍영주 바오로(洪永周, 1801-1840년) 형제가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홍재영의 아들인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그의 아들 홍 베드로는 1867년 가을 전주 초록바위에서 수장되었다.

 

이에 홍유한 선생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했으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다가 안동교구와 협의하여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는 우곡 성지에 13위 순교자들을 모두 모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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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한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는 십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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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니 꽤 시간이 많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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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 선생의 묘비. 묘소 뒤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농은 홍유한 선생이 열심히 수덕생활을 실천하는 동안 정조 임금이 두 번이나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사양했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3월 10일(음력 1월 30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4월 이곳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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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뒤에는 농은의 자세한 업적들이 기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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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는 세례를 받고 교적에 오른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얻은 진리에의 깨달음을 실제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한 경건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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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009년 5월 29일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이 순교한 각 순교터의 흙을 담아 가묘를 조성하고 그 앞에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이로써 우곡리의 골짜기는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 순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후배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룩한 땅이 되었다. 

 

안동교구는 1993년 우곡리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인 홍유한 선생의 묘를 발견하고 이듬해 성지개발위원회를 발족하여 1995년 묘지 축복식과 유적비를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십자가의 길 등을 조성했으며, 1998년 11월 15일에는 홍유한 피정 집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2000년 10월 25일에는 청소년들의 신심 교육과 성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청소년 수련원 겸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5년 9월 25일에는 우곡 성지 성역화 10주년을 맞아 대형 십자가와 홍유한 선생 동상을 세워 축복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2014년 11월 1일에는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기존의 성당을 칠극 성당으로 명명했고, 성당 앞 계곡 건너편에 칠극의 길을 조성하여 2015년 9월 20일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비석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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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성지를 뒤로하고 법으로 달려 잠시 더위를 식히며, 편의점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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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잠은 강흡 선생이 건립한 이오당을 둘러 본다. 

이오당의 한자는 二吾堂으로 '樂吾天, 終吾年'의 吾자가 두번들어가는 것을 당호로 했다. 이 건물은 조선 현종때 잠은(潛隱) 강흡(姜恰 1602~1671) 선생이 건립한 것으로 인조(仁祖) 8年(1630) 진사에 급제하여 세마부위(洗馬副尉)를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무릎을 꿇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여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추앙받던 정양(鄭養), 심장세(沈長世), 홍석(洪錫), 홍우정(洪宇定) 등의 학자들과 회동하여 교유하던 처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정자(亭子)를 짓고 이오당(二吾亭)이라 하였다.

이오당이란 이름은 ‘낙오천(樂吾天), 종오년(終吾年)’ 즉 자연을 즐기다가 생을 마친다라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정자(亭子)는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 홑처마집으로 정방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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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역 앞을 지나는데 그 앞에도 정자와 소 모형이 보인다.
봉화는 정자의 보고다. 봉화는 전국의 기초단체 중 정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봉화의 정자 수는 현재 확인된 곳만 98개이며 사라진 정자까지 합하면 170여 곳에 달한다고 한다.
봉화에 이렇게 정자가 많은 이유는 뭘까? 

고산준령의 험준한 산세, 수려한 경관을 품고 흐르는 낙동강이라는 천혜의 지리적 여건을 가져서다.
또 봉화 땅 대부분이 조선시대까지 안동 땅이어서 경북 북부지역 유림들이 봉화로 옮겨온 것과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들의 은거도 또 다른 이유다. 


 "안동 권씨, 광산 김씨, 무안 박씨, 풍산 김씨, 진성 이씨, 진주 강씨, 남양 홍씨 등이 대표적인 문중이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 오랑캐를 섬길 수 없다며 봉화 땅에 이주한 이른바 '태백오현(두곡 홍우정, 손우당 홍석, 잠은 강흡, 각금당 심장세, 포옹 정양)도 정자를 짓고 벗하며 학문을 수양했다"고 말했다.

다른 지방의 정자는 개방적인 건축구조로 풍류적 성격이 짙은 게 많지만 봉화의 정자는 폐쇄적인 구조에다 온돌방을 갖춰 추모, 학문 등이 그 건립 목적이라고 했다. 봉화 정자의 자랑은 현판 글씨, 퇴계 이황을 비롯해 전서의 대가 미수 허목, 조선 최고의 서예가인 석봉 한호, 추사체로 한국 서예사에 한 획을 그은 김정희, 정조 때의 명정승 채제공 등이 현판에 글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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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에 춘양시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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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은 현대적인 건물로 바뀌었고, 우리는 택시기사에 물어 값싸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 갈비탕으로 점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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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후 일행들이 도착할 춘양버스터미널에서 15:30까지 기다리려니 답답하여 우리 세명은 바로 예정된 외씨버선 길을 따라 소천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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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역 뒤쪽 골목으로 진입하여 운곡3길을 따라 관석길로 들러서니 도보 트레킹 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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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외씨버선길 중 8길 보부상길이다. 바지게꾼들이 울진에서 봉화, 소천까지 해산물, 곡물, 잡화 등 짊어지고 넘어갔던 길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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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더운 날씨에 자전거를 끌고, 메고, 올라타고 내리기를 반복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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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 바지게꾼 노래 중 춘양장 갈 때의 노래다.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한 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서울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넘고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꼬불꼬불 열두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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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 바지게꾼 노래 중 춘양장에서 돌아 올 때의 노래는 이렇다

 

대마 담배 곡물지고 흥부장을 언제가노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오나가나 바지게는 한 평생에 내 지겐가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넘고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꼬불꼬불 열두고개 언제 넘어 고향가노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바지게꾼들은 춘양장 갈 때 아래와 같은 대화를 했다고 한다. 

지게꾼 대표 : "자! 모두들 떠날 준비가 다 되었는가" 

일동 함창 : "다 됐네만 갈 길이 까마득하네" 

바지게꾼 대표 : "자! 그럼 떠나세" 

일동 : "그래 그래 모두들 떠나세"~~~~노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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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터에 이르니 금강송이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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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길을 내려와서 소천에 이르러 무진랜드 야영장으로 달려 계곡에서 일행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휴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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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가 넘어서 일행들이 도착할 즈음 숙소 페션으로 가서 오늘 우곡성지 순례길과 외씨버선길 임도 라이딩을 무사히 마무리 하게 되어 주님께 감사 드린다. 추가로 일행 6명이 서울, 인천, 통영에서 달려와 모두 9명이 모여 소천 산골에서 즐거운 원정 이틀째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어 더욱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 첨부 : 35차_봉화~우곡성지~외씨버선길~높은터_춘양_소천_170630.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69324?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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