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차 순례 - 여사울, 남방제, 성거산(소학골)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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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차 순례 - 여사울, 남방제, 성거산(소학골) 성지

20170712(수.초복) 05:16 도봉역에서 첫차를 타고 용산역에서 06:21 무궁화호로 신례원역 08:05에 도착하여 예산의 여사울 성지, 아산의 남방제 성지, 충무공 사적지 현충사, 그리고 천안 성거산(소학골) 성지를 순례하는 코스다.

국지적 호우가 내린 후라서 다소 기온이 내려갔지만 기상예보도 폭염주의보가 발령중이라 동행하는 친구가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정글레고리오와 이계인 친구가 함께 하는 초복 날의 뜻 깊은 순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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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례원역 앞에는 아침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아서 각자 집에서 일찍 식사를 하던가 간식을 휴대하여 기차내에서 먹기로 하였다.
전날 저녁에 마트에서 사온 빵, 음료수, 바나나 한 조각, 삶은 계란 1개를 휴대하여 기차내에서 조식으로 맛있게 대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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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체 코스맵, 전체 거리 90Km인데 성거산 성지 오르막 길이 만만치 않은 4.9km의 긴 업힐이다. 정그레고리오 재직한 대학교가 방학 중이라서 오늘 동행이 가능하지만 저녁에는 직장반 레지오를 가야하는 날이라서 가능하면 17시 이전에 끝내고 천안역에서 귀가 길에 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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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하차하여 각자 접이식 자전거 프레임을 펴서 조립하고 안장 높이를 조절하며 라이딩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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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의 마트에 들러서 음료수와 필요한 간식(빵, 초코렛, 에너지바 등)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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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 찾아간 여사울 성지에 도착하니 대형 성지 표지석이 우리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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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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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의 생가 터에는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야외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李存昌, 1759-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되어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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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와 인근의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살았다.

농민 출신으로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의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42-1792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신부로서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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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 성지 기도문비가 이존창 생가지 표지석 옆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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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 성당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성당내로 들어가서 성체조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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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와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 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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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뒷벽에는 여사울 성지의 순교 성인과 복자 사진들이 걸려 있고 ~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크게 성장했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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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24위의 리스트가 게시되어 있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해 4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1760-1801년)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바위에서 42세를 일기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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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지역과 여사울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하고, 그 해 12월 22일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였다. 


이존창의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기념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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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터 위 언덕에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존창 생가 터 오른쪽에서 시작해 언덕 주위를 돌아 언덕 위 광장 전까지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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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 위에도 야외 제대가 있는데 제대 앞의 조각은 특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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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 위에서 내려다 본 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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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창은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자기 스승(권일신)에게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전교 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 그리고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에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다. 그때부터 내포 지방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3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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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간 이존창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고, 그 결과는 곧 내포 공동체의 설립으로, 차령산맥 동쪽으로 복음이 확대되어 나갔다.
또 이존창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에 끼여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사울 이존창의 집은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집회소이자 숙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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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의 신해박해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연이어 고통을 받게 된 이존창은 배교와 회두를 거듭하였다.
특히 처음 박해 때 형벌과 회유가 번갈아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비판하고 말았다.
교회 기록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내포 교우들에게 가장 슬프고도 가장 창피스런 배교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존창의 배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진정한 회두(回頭)가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신유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된 그는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낱같은 흉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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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천 제방길을 따라 남방제 성지로 페달링을 하다가 잠시 선우대교 위에서 내려다 본 삽교천은 폭우가 내린 후에 황토빛 물이다. 

이 물길은 동쪽으로는 도고저수지와 남쪽으로는 예당 저수지로, 서쪽으로는 홍양저수지로 연결되고 또한 북쪽으로는 삽교호, 삽교천 방조제에 연결된 예당평야의 젖줄이다.
제방길에서 선우대교로 올라갈 때는 계단을 이용하여야 하며, 대교의 인도를 따라 가다가 동단에서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지 말고 가드레일 사이로 빠져나가서 면천로 70번도로를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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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제 성지는 아산만로에서 623번도로 좌측에 있는 GS주유소 직전에 좌회전하여 골목길로 진입하여야 부엉산길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선장저수지 죽산 낚씨터를 지나 서부남로 667번길로 좌회전 하여 새터저수지 옆길에서 서부북부로 682번길 등을 조금 복잡한 경로이지만 GPX를 따라가다 보면 비교적 용이하게 남방제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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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을 지나니 좌측에 남방제성지 표지석이 연두색 펜스 너머로 보인다.

가돌릭신문기사에 따를 때에 온양신정동본당(주임 이원효 신부)이 2016년12월11일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 1구 소재 ‘남방제성지’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성지조형물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남방제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성 조화서 베드로와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이 살던 곳이다. 조윤호 성인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온양신정동본당은 두 성인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2015년부터 생가터를 매입하고 성지 조성을 해왔다.  

유흥식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병인순교 150주년이 가기 전에 성 조화서 베드로와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을 기리고 남방제 지역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조형물을 세우고 축복하게 되어 다행”이라면서 “오늘을 기점으로 더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찾아 순교자의 믿음과 삶을 배우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 팜플릿은 온양신정동성당에서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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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2월11일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가 남방제성지에서 성지조형물을 축복하고 있다.(자료:가톨릭신문)
봉헌된 남방제성지 조형물은 전체적으로 원뿔 형상으로 제작됐다. 조형물 정면 하단은 계단으로 시작, 이 계단을 통해 남방제를 비롯한 신창지역 출신 순교자 36명이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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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순례길에서 만나 본 조형물 중에서 가장 특이한 조형물로 나무 조각인가 싶어서 손으로 만져보니 구리로 주조 되었다.
조형물 상부는 십자가 형상의 소나무와 함께 조화서 성인과 조윤호 성인이 서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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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개발 전에 부지를 매입하여 축성 중인 온양신정동본당 주임 이원효 신부와 신자들 모습


관심 부족 및 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그동안 성지가 개발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순례객들이 마을 표지석을 성지 표지석으로 오인해 발생되는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고, 순례객들의 올바른 순례길, 의미 있는 순례길이 되게 하고자 성지 관할 본당인 온양신정동성당에서는 2016년12월13일 주보성인 순교 150주년을 맞이하여 2015년 12월 8일 주보성인 생가 터 주변의 토지 매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남방제성지 개발에 착수하여 2016년11월 6일 성지개발 1단계 사업이 완료되었고, 2016년 12월 11일 대전교구 교구장 주교님을 모시고 남방제성지 및 조형물 봉헌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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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제 성지의 조형물 내부에는 특별한 타임캡슐을 도자기에 넣어 봉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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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조윤호 요셉 (1848 ~ 1866. 12. 23) 

 

성 조윤호 요셉(Josephus)은 조화서 베드로(Petrus)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 남방재에서 1848년에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를 따라 1865년에 전주 유상리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이 루시아와 혼인하여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세심하리만큼 성실한 수계생활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또 젊은 그는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강건하고 용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866년 12월 4일 포졸들이 아버지 조 베드로를 체포하여 집에서 심문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 조 베드로는 함께 있던 아들 요셉에게 “이곳을 빨리 벗어나라”고 말하였으나, 그는 “아버지, 저더러 이제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저도 같이 묶여 가기가 소원입니다. 이제껏 믿어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게 저도 잡혀가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날을 그 얼마나 기다렸는지요.”하며 아버지와 함께 잡혀 압송되었다.

 

전라 감사가 성교회의 도리를 가르쳐 준 사람과 서양 책을 어디에다 숨겼느냐고 묻자 그는 “성교 도리를 가르쳐 준 분은 1839년에 순교하신 할아버지이며, 책은 가진 것이 한 권도 없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감사는 다시 한 번 그를 배교시켜 보려고 시도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그는 “사람이 한번 죽기를 면치 못하거늘 어찌 천주를 배반할 수 있느냐”며 완강하게 말하였다. 아버지의 처형날이 왔다. 그는 형장으로 떠나는 아버지 조 베드로에게 “아버지께서는 오늘 영복을 누리는 곳으로 가시니 마음 변치 마시고, 가시거든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하고는 뒷날 천국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헤어졌다.

 

당시에는 형법에까지 삼강오륜을 지켜 부자(父子)나 형제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조 베드로가 순교한지 열흘 후였다. 전라 감사는 그를 타일렀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배교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네가 배교하면 가정으로 돌아가서 너희 재산과 생명을 모두 보존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를 유혹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이 아니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시오”하고 거절했다. 그래서 사형이 집행될 수밖에 없었다.

 

1866년 12월 23일 포졸들은 그를 사형장인 서천교로 끌고 가는데, 고통을 더 가하기 위해 큰 칼을 쓰고 있던 그를 형장까지 뛰어가도록 하여 기진맥진하게 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관리가 사형 선고장을 그 앞에 가져다 놓자 그는 태연하게 서명한 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이에 기가 질려버린 감사가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묻자,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음식이라 무척 맛있소.”하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두 포졸을 시켜서 그의 두 손을 합장시켜 턱을 고이게 하고 태장을 쳤다. 포졸들은 힘이 들면 교대하며 쳤다. 그러나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그는 성호를 그으며 환한 얼굴을 하고 매를 맞았다. 태장을 200여 대쯤 치다가 그의 몸이 움직이지 않자 포졸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확인하였더니 죽은 것이 아니라 혼수상태였다. 그래서 매질을 하던 포졸은 목에 밧줄을 감고는 거지들을 붙들어다가 양쪽에서 잡아당기도록 하여 죽였다. 그의 순교로 연 3대의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때는 1866년 12월 23일이요,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조윤호가 처형된 후 그의 시신을 지키는 포졸들이 그의 얼굴을 본즉 얼굴에 기이한 빛이 있어 찬란하고,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초라하였는데 죽은 후에는 얼굴에서 빛이 났었다고 한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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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조화서 베드로 (1815 ~ 1866 12. 13)

 

성 조화서 베드로(Petrus)는 1815년 수원의 도마지에서 1839년에 순교한 조 안드레아(Andreas)와 권 율리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순교하신 후에 모친도 세상을 떠나시자 충청도 신창 남방재의 교우 촌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1848년에 조윤호 요셉를 낳았다. 그는 조선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일하였으며, 일하고 있는 중 1861년에 최양업 신부가 선종하고, 그의 부인인 한 막달레나도 죽자, 1864년에 전주 유상리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았다. 그곳에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1866년 12월4일 밤에, 그가 김 마르코의 집으로 간 사이에 포교 4명과 포졸 8명이 그의 집을 급습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내 김 수산나는 김 마르코의 집으로 뛰어가 이 사실을 알리고 피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기의 집으로 가서 체포되었다.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자기 집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그의 며느리가 달려 나가 밖에 있던 자기 남편인 조윤호 요셉에게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아들 요셉도 집으로 갔다. 집으로 들어오는 아들 요셉을 보고 그는 “너는 여기에 들어와선 안 된다. 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며, 자기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묶여 전주로 향하는 도중에 여러 가지 수모와 혹심한 천대를 받았고, 전주에 도착한 후 곧이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심문을 받게 되었다.

 

포교 일행은 늘상 천주교도들에게 하는 질문대로 그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준 선생이 누구이고 천주교를 믿는 친척과 일당을 대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를 신봉하는 친척이 분명 있을 것이니 그들이 있는 지역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부모로부터 천주교를 배웠고, 천주교는 자신과 아들만 믿노라고 대답하며,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였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 있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그는 죽인다고 협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전라 감사에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처형날이 왔다. 형장으로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서는 중에, 함께 순교한 정문호 바르톨로매오가 “오늘은 우리가 천국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날”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받아 그는 “우리가 받은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우리는 넘치도록 흐르는 행복의 수확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형장으로 가는데 아들이 갇혀있는 옥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아들을 보고 “너와 내가 한날 치명하여 함께 천국을 갈까 하였더니 국법이 그러하여 내가 먼저 간다”고 하면서 “주모(主母)님께 단단히 의지하여 치명의 은혜를 간구하라”고 당부하며 떠났다.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침착하게 죽을 준비를 한 다음 희광이에게 “이곳 처형장에서까지도 흉포한 그대여! 천주교를 좀 믿어보시오. 우리는 죽으면서도 천주교를 신봉할 것이오”라고 한 후 성호를 긋고 나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때는 1866년 12월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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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을 봉헌한 온양신정동 성당의 교우들 명단

 

[온양 신정동성당 주변에서 거주하였던 신자 중 체포되어 순교한 순교자 명단]
 

 ※ 배미동(배동, 배여동) -7명-

- 김명집(루도비코) 1866년 공주에서 참수

- 김요한 40세 1868년 홍주에서 순교

- 김베드로 19세 1868년 서울에서 참수

- 김발바라 30세 1866년 홍주에서 참수

- 김 그레고리오 42세 1868년 홍주에서 참수

- 김 사도요한 30세 홍주에서 순교

- 김 필로미나 19세 홍주에서 참수

 

 ※ 남성리 형제방죽   -1명- 

 - 이경선 50세 1871년 홍주에서 참수

 

 ※ 남성리 찬우물(샘마을) - 1명-

 - 김서방 1867년 서울에서 교수

 

 ※ 남방재 -8명-

- 강요한(회장) 1867년 양화진에서 참수

- 김도미니코 1834년 서울에서 참수

- 안정서(바오로) 30세 1866년 서울에서 참수

- 원시몬(회장) 64세 1867년 공주에서 순교

- 조다레오(회장) 65세 1868년 양화진에서 순교

- 김순일(요한) 45세 1871년 서울에서 옥사

- 정덕순 1866년 홍주에서 순교

- 권 막달레나 56세 1866년 홍주에서 순교  

 

  ※ 신창 읍내 -18명-

 박사근, 유 시로, 유시로의 아내, 김 아가다, 신 발바라, 필로마나, 조 시로, 박 바오로

 김 가스미로, 김 가스미로의 동생, 김 베드로, 신 치프리아노, 신 발바라

 박영서, 박영서의 모친, 김 프란치스코, 양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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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제 성지를 뒤로 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적지 현충사로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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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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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의 반송은 어려서부터 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나와서 자라나는 특이한 소나무이다. 반송과 적송이 현충사에는 많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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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는 충신, 효자, 열려에게 나라가 직접 편액(표창장)을 내린 것인데, 충무공 가문에서는 5명이 편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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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 앞에 조성된 연못에는 잉어들이 많이 노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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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옛집이자 외가, 덕수 이씨 종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집인데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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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씨에 물맛이 괜찮은 충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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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는 1967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 건립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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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문에서 올려다 본 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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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쪽에서 올라온 곳을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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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는 장애우들을 위해 도로가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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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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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레고리오가 참배 후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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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들이 현충사를 배경으로 참배기념 사진 한 컷, 사진에서 보이지 않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헌수한 나무가 왼쪽에 있다.
충무공에 대해 박대통령은 유난히 애착을 갖고 성역화 작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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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를 둘러보고 백석로네거리 근처의 치안센터 뒤쪽에서 점심식사로 뼈다구해장국을 먹고 에너지를 보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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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지막 순례지 위례산 아래에 있는 성거산 오르막길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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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Km나 되는 오르막 길을 더운 초복날 오른다는 것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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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길목 초입 우측에 성거산성지 성당과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서부터 성지는 3.5Km를 더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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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성지 제1주차장에 도착하니 순례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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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한 간식과 음료로 잠시 휴식을 하면서 박해시대의 사목 중심지, 순교자들의 본당 소학골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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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 46-1번지.
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지는 차령산맥 줄기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봄, 가을에는 꽃들과 단풍으로 찾아 온 순례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성거산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 ‘거룩할 성(聖)'자에 '거할 거(居)'자로 이름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또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 온천에 목욕을 하러 올 때마다 이곳 성거산에 들려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때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인 교우촌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을 보면 서덕골(서들골), 먹방이, 소학골,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 중 목천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까지 사목 방문을 할 때 거쳐 가는 경로였다.
또한 서덕골 교우촌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맡겨져 성장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도 종종 드나들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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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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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주차장에서 제1줄무덤으로 내려가는 입구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칼레(Calais, 姜) 신부와 페롱(Feron, 權) 신부가 박해를 피해 머물다 중국으로 탈출한 곳이고, 박해가 끝난 뒤에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 두세(Doucet, 丁) 신부, 베르모렐(Vermorel, 張) 신부가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는 병인 박해 때 동료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체포되자 전교 여행을 중단하고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쫒기면서 연풍을 지나 괴산과 진천을 거쳐 배티 삼박골 교우촌에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소학골에 와서 페롱 신부와 함께 잠시 은신하다가 조선을 떠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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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학골 교우촌에는 병인박해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는데,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나머지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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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감영에서 참수당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의진 요셉, 채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제1줄무덤에 총 38기, 제2줄무덤에 총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묻혀 있어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에 있었던 묘봉 수가 총 107기였다고 이장(移葬) 작업에 참여한 6명의 증언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병인박해 때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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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까지의 거리가 약 530m 정도로,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14처가 설치되어 있고, 넓은 성모광장에는 야외제대와 신자석이 마련되어 있어 야외미사를 봉헌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또한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쉴 수 있는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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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성지 휴게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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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입구에는 수도물이 나오는데 수원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바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음용이 가능한 것 처럼 보였다.

 

교우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골 교우촌에는 박해 때 교우들이 살던 집터와 태풍에 의해 쓰러진 돌배나무가 남아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성거산 성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소음이 없으며 공기가 맑고 전망이 아름다워 한 번 순례를 온 이들은 꼭 다시 오고 싶어 하는 곳이다.
특히 계절마다 무명 순교자를 상징하는 각종 야생화가 피어 군락을 이루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2008년 12월 22일 성거산 성지는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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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광장과 야외제대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 우측에는 14처상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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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광장과 야외제대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CCTV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는데, 14처상 앞에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야간에도 순례하도록 한 것 같다. 특히 요즘 처럼 폭염에는 이곳 시원한 숲속에서 십자가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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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찾은 교회 사적지 중 하나는 목천의 '소학골'(일명 씨아골 도는 쇠약골)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은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독립 기념관 뒤편의 흑성산 가까이 있는 성거산(579m)의 동쪽 계곡이다.
지금 이곳을 가려면 북면 도촌리를 거쳐 도보로 가거나 천안에서 성거읍을 거쳐 입장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나 있는 성거산 통신 도로(입장면 시장리)를 타고 가면 된다. 차량을 이용하려면 두 번째 노정을 택해야 한다.

 

이제 소학골은 폐동이 되었고 그 아래 '사리목'에 세 집이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농한기에는 두 집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1910년 무렵만 해도 소학골과 사리목에서 모두 공소가 치러졌으며, 성거산 남쪽에 있는 옛 교우촌인 목천의 서덜골(일명 서덕골)과 매일골, 먹방이(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에도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30년대까지 신자들이 계속해서 이주하면서 공소는 그 아래쪽의 마을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목천의 송전 공소만이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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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제대

 

성거산 자락의 깊은 산중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신앙 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교회사에서 전이형(轉移形) 공동체가 사라지고 정주형(定住形) 공동체가 형성되는 1830년대였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백부인 최영렬도 이 무렵에 '서덜골' 교우촌으로 이주하였으며, 기해 박해 이후에는 최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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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제대 앞에 있는 성모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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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옆에는 운치있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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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제대 건너편 성모광장 위에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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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칼래(Calais, 姜) 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경기도 손골(현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에서 소학골로 옮겼다.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하면서 경상도 서부에서 충청도.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비교적 건강이 좋은 칼래 신부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여름 휴식처요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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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성지의 제2 줄무덤 전경
 

제2줄무덤부터 시작하는 2.1km 거리의 '순교자의 길'에는 순교자와 관련된 많은 조각품과 한국의 103위 성인과 성거산(소학골) 출신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55개의 대형 호롱등이 설치되어 있어 전구하며 조용히 묵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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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성거산(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다. 마치 들짐승 처럼 사방에서 쫓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다(칼래 신부가 파리의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

 

칼래 신부는 때때로 백곡의 삼박골로 가서도 휴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소학골.삼박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칼래 신부는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도중에 1866년의 병인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신부는 그때부터 포졸들에게 쫓기면서 문경 인근의 교우촌과 동굴을 오가며 은신하였으나, 발각될 위험이 커지자 여름 휴식처가 있는 소학골 교우촌에 가서 머물기로 작정하였다.f0ce35cea377ef3c84445681007d92ce_1499956766_8451.jpg

순교자의 길에 있는 총 55개의 호롱 등에 한국 103위 성인과 성거산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해가 계속되면서 서덜골 이웃의 소학골에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오죽잖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덜골과 소학골 교우촌은 산자락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진천 백곡의 배티, 삼박골 교우촌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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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의 교우촌 설립 현황

 

1) 서덕골 교우촌(1884년, 두세 신부) : 목천면 송출리

2) 먹방이 교우촌(1884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 128명 : 목천면 석천리

3) 소학골 교우촌(1888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 114명 : 북면 납안리

4) 매일골 교우촌(1895년, 퀴를리에 신부) : 목천면 송출리

5) 사리목 교우촌(1901년, 드비즈 신부) 

6) 석천리 교우촌(1913년, 공 베드로 신부) 112명 : 목천면 석천리 

7) 도   촌 교우촌(1919년, 공 베드로 신부) 110명 : 북면 납안리 

8) 납안리 교우촌(1920년, 공 베드로 신부) 51명 [출처 : 성거산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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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차장 쪽으로 올라오는 길은 야외제대와 성모광장까지 포장이 되어 있다. 자전거로 순례 할 때는 제1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것 보다는 이곳 제2주차장에서 내려가는 것이 훨씬 시간이 절약 될 것 같다.

성거산 성지 순례를 마치고 다시 3.5Km를 달려 올라올 때 지나왔던 성거산성지 성당으로 다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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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성지가 있는 산 아래 건립된 성당입구.
  

2011년 5월 봉헌식을 가졌고, 성당 아래층은 수산나 피정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생명을 바쳐 증거한 순교자들의 신앙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고 못자리가 되었다.
그동안 오고가는 사람도 없이 벌 · 나비 ·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 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은 침묵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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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입구 우측에 있는 성모상은 유난히 단아하고 늘씬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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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건물, 그 우측으로 사무실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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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성당 옆에는 성모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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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7일에 봉헌된 성거산 아래 성지 초입에 건립한 성당 외부모습과 아랫 층 수산나 피정의 집
연수 때문에 성당 문이 잠겨져 있어서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창문을 통하여 성당을 보니 성체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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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성지 사무실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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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의 창가에 비치되어 있는 순례확인 스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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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월 8일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지역을 순방하고 자신의 일기에 쓴 자세한 기록 덕분에 성거산 성지가 1990년대부터 개발되고 이곳 순교자의 무덤과 교우촌 신자들의 줄무덤이 사적지로 조성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생각하면서 성거산 성지성당을 뒤로하고 천악역으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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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시 신호대기 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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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초복날 90km를 달려 무사히 순례길을 마무리하고 천안역에서 복귀하는 두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한 복된 하루였다.

참고로 첨부한 gpx 파일은 다른 분들이 남방제 성지에서 온양신정동 성당으로 가서 순례 스템프를 찍을 수 있도록 일부 경로가 수정이 완료된 파일임을 밝힌다.

   

※ 첨부 : 36차_여사울_남방제_성거산_170712.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68154?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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