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차 순례#2 - 계산성당, 관덕정, 성유스티노신학교, 성모당, 복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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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차 순례#2 - 계산성당, 관덕정, 성유스티노신학교, 성모당, 복자성당

20170719(수)아래 37차 순례#1 순례글에 이어서 두번째 글을 시작한다.

대구지역이 너무 더워서 외국인들이 만든 유행어가 있다. 대구+아프리카의 합성어로 "대프리카"라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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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길의 두번째 대표 사진 대구 계산성당 외부 모습이다. 사적 제290호로 지정된 계산 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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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경대병원역에서 3호선에 접이식 자전거를 접어서 싣고 전철을 타니 하차역 신남역까지 30분이 소요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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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역에서 내려 GPS앱으로 방향을 잡아 먼저 계산성당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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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정문 앞에 건립된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드망즈 주교 부임 25주년 기념 십자가와 우측에 대형 표지석이 순례자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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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주교가 1903년 축성한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 사적 제290호로 지정된 계산 성당 전경

 

내부 수리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1901년 발생한 지진으로 제대 위의 촛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성당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로베르 신부는 새 성당 건립을 계획했는데, 이때 대구의 신자들 중 서상돈(徐相燉), 김종학(金鍾學), 정규옥(鄭圭鈺) 등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현 계산 성당의 원형인 새 성당은 1903년 11월 1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서 두 개의 종탑에 설치된 두 개의 종을 축성했는데, 이 종들은 기증자인 서상돈과 김절아의 세례명을 따서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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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의 설계를 맡은 로베르 신부는 신축을 위해 전주 전동 성당의 설계도를 입수하고, 색유리와 철물 등 공사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 주문한 뒤 서울 명동 성당을 건축했던 벽돌공, 석공, 목수 등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공사를 진척시켰다. 축성식을 가진 후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당 내부에 주교 강론대와 제단을 만드는 공사를 했고, 교우수가 늘어남에 따라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11일 재차 축성식을 갖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Blane, 白圭三)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대구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임명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어 달구벌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해왔다.

 

경상도 지역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했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 칠곡(漆谷)의 신나무골[枝川面 蓮花里]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6년 대구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는 아직 박해의 여파가 남은 대구 읍내에서의 선교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83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던 칠곡군의 신나무골에 본당 거처를 임시로 잡았다. 그 후 대구 본당은 1887년 초에 일어난 대구 박해의 어려움을 겪은 후 1888년 장차 대구 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보좌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 상리동)의 죽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대구의 공소는 가장 큰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모두 6개였고, 신자수는 27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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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지진에 이은 화재로 전소되었다.1890년 말과 1891년 초에는 대구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로베르 신부는 일군의 불량배들로부터 행패를 당하고 경상 감사에게 시정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1891년 4월 말 교안이 마무리되면서 다시 대구에 입성한 로베르 신부는 그 해 말 대어벌(현 대구시 원대동 일대)에 임시 성당을 구해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다.

 

성당 건립은 부지 매입 후 2년여 만인 1899년에 완료되어 그 해 예수 성탄 대축일에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때 축성된 성당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에 팔각 기와지붕을 이은 그리스식 십자형으로 한국 성당 건축사에서도 유일한 양식이었다.
로베르 신부는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서술했다. “대구에서 이런 축제를 한 번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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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십자형 평면의 성당 내부 

계산 성당은 건축적으로 고딕식 벽돌조 건물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서쪽 정문에 세운 2개의 종탑부에는 8각형의 높은 첨탑을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 모양의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근대 초기 성당은 대개 박해시대의 순교 터나 높은 지대에 위치해 마을이나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계산 성당은 이와 달리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성당 부지 물망에 올랐던 자리는 현재의 동산동 일대였는데, 황무지인 허허벌판 언덕에 성당 터를 잡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대구 읍내 평지에 세워진 것이다.

 

계산 성당이 주교좌로 설정된 후 신자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우선 명도회의 창립과 명도회관의 건립, 해성 체육단(청년회) 발족, 인애회 · 친애회 · 성모회의 조직, 연령회 · 성영회 활동 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교육 사업으로는 1899년에 설립된 해성재(海星齋)가 성립학교(聖立學校)로, 다시 해성학교(海星學校, 1930년대 폐교)로 개칭되면서 발전하였으며, 1926년에는 성모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그중 해성 청년회와 명도회는 1924년 조선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로 통합 발족된 후 대구 지역 평신도들의 중심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의 전신)를 창간하여 교회 소식의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성당 건축물인 계산 성당은 1981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이처럼 계산 성당은 1910년대 이후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일제의 책동으로 1942년에는 제2대 교구장 무세(Mousset, 文濟萬)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일본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주교가 제3대 교구장에 착좌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본당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3 .1 운동에 참여하거나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운동에 가담했고, 1930년대에는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으며, 꾸준히 전교 활동을 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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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성당의 신자들이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게 된 것은 해방과 6 · 25 동란을 겪은 뒤부터였다.
이때부터 우선 본당의 평신도 단체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새 단체들을 설립하거나 그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했다.
그리고 제10대 서정길(徐正吉, 요한) 주임신부 재임 때인 1952년에는 대성당 낙성 50주년 행사를 성대히 개최했으며, 제12대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 때는 계산 문화관 부지를 조성하고 제14대 김영환(金榮煥, 베네딕토) 신부 재임 때인 1973년에 개관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이어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벽돌로 이뤄진 성당 외벽은 물론 성당 내부 바닥의 부식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성당 설립 당시 흙모래 석회를 섞어 깔아놓은 차가운 바닥에 앉아 미사를 보는 신자들을 고려해 바닥 위에 마루를 깔았으나 마루 밑의 환기 공간 부족으로 부식이 심화됐고, 이를 막기 위해 설치한 비닐 장판마저 썩어 들어가자 보수를 단행, 바닥 원형은 보존한 채 대리석을 대신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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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제대

제대 뒤편의 다섯 개의 아치형 창문과 유리화는 1902년 두 번째 성당을 건축할 때 프랑스에서 제작해 설치한 것이다.또한 세파에 시달려 상한 벽돌을 빼내고 대구 남산동에 있는 옛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보수 현장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 복원했다. 1914년 세워진 유스티노 신학교 건축 당시 벽돌이 계산 성당 벽돌과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계산 성당은 또한 교회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대 뒤편을 장식하고 있는 다섯 개의 아치형 창문이다.
건축적 아름다움도 특출하지만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화와 성모상은 성당 역사를 말해주는 유산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제대 중앙 뒤편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이 통례이지만 계산 성당은 다섯 개의 창문 중 가장 작은 가운데 창문 중앙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시고 있다. 이는 1899년 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로베르 신부가 첫 번째 성당을 지을 때 본당 주보로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모신 역사적 사실을 상징한다. 이 성당은 불행히도 1901년 소실되었지만 본당 주보성인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제대 뒤편 중앙 창문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신 것이다.

 

제대 옆 벽에 설치된 예수성심상.또 성모상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예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유리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1902년 두 번째 성당이 지어질 당시 프랑스에서 제작해 설치된 것으로 100년 이상 오색 찬연한 빛을 여전히 발하고 있다.
제대 양쪽 측면에 공관복음을 상징하는 네 개의 유리화와 성당 정문 상단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 문양의 대형 창문도 성당 건립 당시 그대로이다. 제대 양측 네 개의 창문 옆에 세워져 있는 성녀 소화 데레사 · 성 안토니오 · 예수성심 · 성 요셉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고딕식 벽돌조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 중간에는 여느 성당에서 보기 힘든 둥근 모양의 붉은 십자가 패 12개(12사도를 상징)가 박혀 있다. 이 십자가 패는 성당 축성식 때 크리스마 성유를 발랐던 곳인데 오랜 보존을 위해 패 뒤에 벽돌을 붙여 기둥의 벽돌과 벽돌 사이에 끼워 넣는 특이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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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드의 성모상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유리화로 장식되어 있다. 

신자석 양 옆의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화도 1991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본래는 단순한 색 유리만으로 이루어진 창이었으나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10명의 한국 성인상을 덧붙였다. 

 

성당 설립 당시 사용되던 제대는 1913년 제단 증축 공사를 하면서 걷어내 현재 관덕정 순교자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913년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까지 사용되던 제대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나무 제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벽을 향해 있던 공의회 이전 모습 그대로이며 제대 하단부 중앙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팔)가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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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밖 마당을 둘러보아도 유서 깊은 유물이 많다. 성당 정문 앞 마당 한가운데 있는 대형 십자가는 물론,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1986년 성당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 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다. 한국식 목조 성당을 건립했지만 3년 만에 예기치 않은 화재로 성당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은 채 다시 오늘날의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대구 경북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고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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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현관 성수대 위에 성 교황요한바오로2세 방한 기념패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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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 있는 문화관 건물 현관 앞에 순례스템프가 비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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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기념관 우측 외벽에 부조된 이윤일 요한 성인과 많은 순교자들이 승리의 팔마가지를 들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모습.
다음으로 찾아간 대구시내 두번째 순례처는 대구 관덕정, 순교자들의 순교터에 세워진 도심 속 순교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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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은 옛 아미산 언덕 밑 전부에 해당하는 너른 앞마당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은 무과의 과거를 보던 연병장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위한 승마장으로 사용되었고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이곳에서 행해지곤 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에서부터이다.

이 아미산 처형장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장이었던 장대벌(봉덕동), 비산동 날뫼 뒤에 있는 큰 들인 꼬부랑개와 함께 조선시대 중죄인들을 처형하던 3대 처형장의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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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원래 국사범을 공개 처형하는 곳이었으며 1864년 3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것으로 여겨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조선 시대에 대구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위치상 또는 군사상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593년 달성에 감영이 설치된 후 선조 34년(1601년)에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설치키로 확정함에 따라서 포정동(현 중앙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도내 전역의 중죄인들을 다스리는 최고 사법권을 가진 감사가 주재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각종 죄를 지은 이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 감영 부근인 서내동(西內洞)에 설치됐으며 또한 처형장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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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관덕정 천주교 순교기념관 1층 현관, 제작 고종 8년(1871)

이 척화비는 경북 영천시 소재 신녕성당 건설공사 때 발견되었던 것인데, 이후 대구 관덕정 천주교 순교기념관으로 옮겨와 보존.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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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순교기념관 내부 모습


그리하여 박해 때마다 경상도 전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와서 감영 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관덕정과 대구 인근에서 순교한 교우의 수는 지금까지 모두 25명, 감영 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30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에서 20위(울산 장대 순교자 3위 포함)가 대구지역 순교자로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대구 관덕정의 정확한 위치가 고증에 의해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방치돼 왔다가 근래에 들어서야 비로소 순교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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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기념관 입구의 돌형구.

관덕정이 서 있던 위치는 아미산 아래 대구 읍성의 남문, 즉 영남 제1문(嶺南第一門) 밖의 서남쪽 200보 지점인 현재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의 동아 쇼핑센터 북서쪽 모퉁이 부근이다. 그리고 관덕정의 마당은 현재 적십자 병원의 전후좌우 일대와 동아 쇼핑센터 앞에서 반월당 로터리, 즉 아미산 언덕 밑 전부를 말한다.

도시청(都試廳)으로서의 용도가 필요 없게 된 1906년, 대구 유지들이 의연금을 모아 관덕정을 수리하고 경상북도 교원 양성소인 사범학교를 개설했으나 폐교됐고 해방 후 완전히 헐렸다. 일제 시대에는 관덕정 마당에 동문 시장의 일부가 옮겨와 새 장터 또는 남문 시장으로 불리다가 1937년 남문 시장이 옮겨 간 후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이다. 

사형 터로 고증된 병원 옆 땅 1백 55평을 확보하여 1985년 순교 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였다. 순교자 기념관이 건립됨으로써 관덕정은 경상도 지역의 순교자들을 다수 배출한 순교성지의 풍모를 갖추고 수많은 순례자들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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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순교기념관 정문 앞에 대구대교구 제2 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상이 서 있다


성인의 유해는 경당에 모셔져 있다.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 시험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조선 영조 25년에 세운 건물이다. 옛 이름은 관덕당(觀德堂)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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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이 순교 기념관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의 천주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갖가지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연간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순교정신을 함양하고 신자들의 신앙 재교육과 선교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성 이윤일 요한제’를 기획.거행하고 있다. 2002년 1월 21일에는 기념관 입구에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동상을 세웠고, 2007년 1월 21일 기념관 바로 옆에 신관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회의실과 강당 등을 갖춘 신관은 순교신앙 학습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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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아가 순례지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14년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이며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동쪽 정문으로 들어가면 운동장 맞은편에 있다. 1914년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고 1945년 폐교된 성 유스티노 신학교. 현재는 가운데 성당과 좌우의 교사 일부만이 남아 있다. 1914년 10월 3일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3월 19일 폐교되었다.

 

1911년 4월 8일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대구에 부임한 첫 주일(7월 2일)에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 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 사업은 그 해 7월 5일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이 주교관과 수녀원 부지를 기증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신학교 건립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였고, 그 결과 1912년 11월에는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교구에서는 1913년 9월 4일 신학교와 부속 성당의 기초공사를 시작하였으며, 공사가 진행 중인 1914년 5월 3일 드망즈 주교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페셀(Peschel, 白鶴老) 신부를 신학교 교수로 임명하였다. 당시 교구에서는 그 해 9월 19일 학생을 선발하여 개교할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짐에 따라 개교일이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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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드망즈 주교가 축성한 성당 모습이 그대로 남아 세월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드망즈 주교의 노력으로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 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3 · 1 운동이 일어나자 성 유스티노 신학생들은 3월 7일 교내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으며, 3월 9일에는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과 서정도가 주동이 되어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독립 선언문 복사 및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교장 신부에게 알려짐으로써 시위 계획은 무위로 끝났고, 그 결과 방학이 5월 1일로 앞당겨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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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스티노 신학교 정면의 성모상

1930년대 들어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 · 소신학과의 분리라는 학제상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 .소신학과의 분리는 신학생들에게 일반 교양 과목을 가르침으로써 신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1928년 말 서울 신학교에서 먼저 도입하였다. 그 결과 용산의 소신학생들은 1929년 9월부터 남대문상업학교(동성상업학교의 전신) 을조(乙組)로 편입되었고, 대구의 소신학생들은 1930년 12월 16일 드망즈 주교가 뮈텔 주교와 연합 소신학교 구성을 협의함에 따라 1931년부터 혜화동의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 · 대구 · 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 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그 후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7명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철학과 학생들은 1945년 2월 23일 ‘경성 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가 인가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공부하였으며, 부제품을 받은 4명은 대구교구 사제 휴양소에서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의 지도로 수업을 받다가 1945년 12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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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당시 폐교 상태에 있던 신학교는 대건초급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전해 오면서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가 철거되고 성당을 포함한 중앙 일부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당은 1915년 드망즈 주교가 축성한 모습 그대로이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대구대교구는 2014년 5월 30일 남산동 대신학교 대성당에서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기존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내부를 재정비해 유스티노홀(건축관), 드망즈홀(설립자관), 앗숨홀(문서관), 옴니아홀(100주년관) 등 4개 홀로 구성된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 개관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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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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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 캠퍼스 남쪽 쪽문을 통하여 대구대구청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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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아우구스티노(徐相敦, 1850.10.17~1913.6.30) 은 경북 김산군 마잠(현 김천시 지좌동)에서 서철순(徐哲淳)과 김해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조부인 서광수(徐光修, 1714~1786)가 천주교에 입교한 이래 모든 친척들도 입교하는 등 독실한 교인 집안이었다. 그런 만큼 천주교 박해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들은 피해를 모면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이사해야만 했다. 선생이 9세 되던 1859년, 부친이 상주 청리에서 사망하자, 선생은 모친과 동생 상정과 함께 외가인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하였다. 이는 외조부인 김후상(金厚詳)의 보살핌과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어느 상점 심부름꾼으로 고용되어 돈을 벌었고, 이는 살림살이에 일정 정도 보탬이 되었다.

 

18세경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보부상을 시작하였다. 이는 대구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의 지원, 그리고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후원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취급 품목은 소금·건어물·일용잡화 등으로 재래시장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선생은 근면과 성실을 밑천삼아 사업을 점차 확장하여 낙동강을 무대로 부산에서 안동까지 무려 800리 뱃길을 이곳저곳 누비고 다녔다. 고령 개포(開浦)는 사실상 그의 본거지나 다름 없었다. 취급품과 물량도 쌀·소금·베·기름·창호지·건어물·성냥 등으로 크게 늘어났다. 원격무역은 엄청난 이익 확대로 이어졌다. 1885년 35세에는 수 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인으로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선생은 안동·군의·김천·칠곡·달성 등지에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어느덧 서상돈 선생은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유력한 경제인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선생은 1894년 45세부터 약 10년간 탁지부 시찰관에 임명되어 경상도 세정을 총괄하였다. 선생의 공직생활은 나라를 걱정하며 재물을 조금도 탐하지 않는 청렴한 생활로 일관되었다. 당시 부패로 얼룩진 공직사회에서 볼 때, 선생은 초야에서 안빈낙도하는 고고한 ‘선비’나 다름없었다. 이에 관아에서 파직된 아전들은 선생을 무고하게 투서하거나 고발하는 등 곤경에 빠뜨렸다. 이때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로베르 신부는 이러한 고발과 투서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등 선생을 옹호하였다. 

 

선생은 교회활동을 통하여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1899년을 전후하여 대구읍내 새방골·대어빌·영천 등지에 학당을 설립할 때, 선생은 정규옥(鄭圭鈺) 등 교회 내 신자들과 재정적인 지원 및 학교 운영을 도왔다. 계산동 성당 부속인 한문서당 해성재(海星齋)도 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날로 발전을 거듭하던 해성재는 1908년 4월 1일,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립학교(聖立學校)로 탈바꿈하여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2년 뒤 부속으로 야간부인 성립여학교를 설치하는 등 여성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또한 1905년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 설립에 이일우(李一雨) 등과 함께 적극 관여하였다. 달서여학교는 1909년 학부대신(學部大臣: 대한제국 때에 학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 관청)으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합리적인 가정생활을 위한 부인야학회를 운영하는 등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여학교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편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독립협회가 주관한 자주독립 수호를 위한 민중대회) 참여는 선생으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를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재무부 과장·부장을 맡아 열강에 빼앗긴 이권 회수와 민권보호를 위한 맹렬한 투쟁에 앞장섰다. 이러한 경험은 내수자강(內修自彊)에 입각한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요인이었다. 1906년 1월, 김광제 선생·정규옥 등과 대구광문사와 대구민의소를 조직한 일은 근대교육 보급과 민지계발(民智啓發)을 위한 일환이었다. 2월 경북관찰사 신태휴(申泰休)는 관내를 순회하면서 대구광문사 교육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관찰사는 각 군에 학교설립과 서적구입 등에 관한 일체를 대구광문사에 문의하도록 지시하였다. 교사 양성은 사립 사범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김윤란·정규옥·서병오 등과 함께 500원의 기금을 출연하는 등 재정적인 기반 확충에 진력을 기울였다.

 

토착 상권 보호와 민족자본 육성책은 대구농공은행 설립으로 귀결되었다. 선생은 김병순·서병오·이장우·이중래(李重來)·이상악(李相岳) 등과 대구농공은행 주주로 참여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자립경제 수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1907년 1월 29일, 선생은 대동광문회 특별회에서 국채 1,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발의하였다. 선생은 즉석에서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고, 200여 명의 다른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선생의 국채보상 발의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승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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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사 뒷뜰에는 대리석으로 역대 대구대교구장님들의 사목표어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인 안세화 주교는 1931년 11월 1일 교구성직자들을 위한 병원 두동을 지었다. 한 동은 입원환자들을 위한 병실로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원안에 있었고, 다른 한 동은 외래환자나 휴양 중인 성직자들을 위한 건물이었으며 주교관과 가까운 정원 입구에 있었다. 후자의 건물은 불어로 'Annexe' 라고 불렸는데 부속건물, 별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 그 건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한옥건물을 '안익사'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지금의 '안익사'다. 한옥건물을 '안익사'라고 명명한 것은 옛 사제들의 휴식처였던 그 건물과 소리를 같게 하고자 한 의도라고 한다.

 

현재 안익사는 정월생 아녜스(1992년 선종) 집안 소유의 가옥으로 본래 팔공산 지묘동 산기슭에 있었으나 공산댐 건설으로 수몰위기에 처한 것을 대구대교구에서 기증받아 이곳으로 옮겼다. 안익사는 1980년 4월 10일에 상량식을 가진 이래 1996년까지 선종한 교구 사제들의 빈소로 사용되었으며 2012년 봄 주변환경을 정리하고 한옥을 보수하여 개방된 쉼터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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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사 바로 옆에는 에밀 카페 신부와 왕벚나무라고 안내가 되어있는 웅장함을 자랑하는 왕벚나무가 심어져있다. 

오래 되어서 그런지 그 크기가 매우 웅장하고 줄기도 매우 두꺼워서 놀랬다. 에밀 타케 신부는 1902년부터 1915년까지 제주도에서 사목하는 동안 7,407점의 식물을 채집하여 한국식물분류학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남겼다. 특히 그는 1908년 4월 15일 제주도 한라산 북측 관음사 뒷산 해발 600M 지점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하였고 왕벚나무 자생지가 우리나라임을 세상에 알렸다. 안익사 옆에 있는 이 왕벚나무는 1930년대 에밀 타케 신부가 유스티노 신학교 재직 시 심은 나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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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청 내에 건물이 많아서 순례 하고자 하는 성모당을 찾아 들어가서 엉뚱한 곳을 돌았다. 7a77c18adc229c70aba0c15768ec1cd4_1500605095_4057.jpg

성모당을 찾아들어가려면 정문으로 가서 우측에 보는 아래 사진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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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모당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

 

대구대교구의 초대주교인 드망즈 주교의 허원으로 이곳에 성모당이 건립되었다.안세화 드망즈 초대 주교의 허원으로 건립  천주교 대구대교구 성모당(聖母堂)은 주교관 경내의 가장 아름다운 보좌에 세워진 사랑의 성지이다. 인간의 머리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늘의 영광을 오직 순명으로 받아들인 성모님을 모신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열린 성지, 치유의 성지이다.

 

대구 성모당은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고, 10월 13일 축성되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남방 지역을 관할할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초대 감목 안세화 드망즈(安世華, Florian Demange) 주교의 허원이 계기가 됐다. 가진 것은 하나도 없이 오직 가난만을 나눠 갖고 온 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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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망즈 주교가 1918년 축복한 성모당

 

안 주교가 허원을 드린 지 2년 만인 1913년 12월 4일 대구본당(계산 주교좌본당)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등의 협력으로 주교관을 완공했고, 1914년 10월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다. 그러나 계산 주교좌성당 증축은 이루어지기 어려워 성모당 건립도 자연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Hyppolyte Joseph Sacet)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렀다. 안 주교는 수 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성모님께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에 성모당을 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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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드의 성모동굴을 본딴 동굴 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말이 라틴어로 적혀 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이다. 

 

“회개하라”고 하신 루르드 성모님 모셔 1918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완성된 대구 성모당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 가브(Gave) 강가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크기는 물론 바위 모양까지 똑같다. 교구청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곳에, 앞으로 넓은 잔디마당을 두고 북향으로 배치됐다. 

붉은 벽돌 건물인데, 외부는 벽돌로, 굴 내부는 시멘트이다. 기념틀의 모양은 교황 레오 13세께서 바티칸 정원에 만들어 놓은 루르드의 성모 기념동굴을 본떴다. 내부는 암굴처럼 꾸며졌고 성모당을 바라보며 오른쪽 상단에 마리아상을 모셨다. 돌로 된 성모상은 당시 대구교구 프랑스인 사제와 한국인 사제들의 헌금으로 마련됐다. 성모당은 루르드의 성모님이 15세 소녀 베르나데트(Mary-Bernadette Soubirous)에게 18번이나 발현했던 그 모습 그대로 머리에는 흰 수건을 썼고, 청색 띠를 띠었으며, 손은 합장하고 팔에는 은알(묵주)이 드리워졌고, 벗은 양발 위에 금해당화가 피어있다.

 

성모당은 신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교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구의 명소이다. 역대 교황사절에 대한 환영식과 교구적인 경축행사의 식장은 의례 성모당이 되어 왔었다. 1984년 5월 5일 선교 200주년 대구 행사를 위하여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직접 이 ‘루르드의 성모동굴’에서 교구 내 성직자 · 수도자들과 함께 성모님께 기도를 바치고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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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입구에 있는 산상설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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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옆마당에 건립된 드망즈 주교상

 

1973년부터 5월 성모성월이면 대구 시내 각 본당별로 교구청 성모당에서 열고 있는 ‘성모의 밤’행사는 전국적으로 성모신심 운동이라는 새로운 기도양식에 불을 붙였다. 프랑스 루르드의 영적(=기적) 샘물은 특히 치유의 기적을 많이 낳기로 유명한데, 대구 성모당 역시 간절히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알려져 있다. 식민지 시절, 학병으로 끌려간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도 대구 성모당에서 아들 김수환 신학생의 생환을 간절히 기도드렸고, 김 추기경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대구 성모당은 대개 세 가지 이유로 참배한다. 

하나는 그저 성모를 공경하고 감사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의 죄로 괴로웠던 사나이, 십자가에서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천주의 성모를 공경하기 위해서 순례를 하면, 저도 모르게 성모님을 닮게 된다.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둘째는 영혼이나 육신의 은혜를 얻기 위해 성모님의 특별한 효험을 믿으며 참배하는 것이고, 

셋째는 허원에 의해 미리 영혼이나 육신의 은혜를 받고, 그 허원을 채우기 위하여 참배하는 경우이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도움을 구하든, 성모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다시 루르드의 성모님 앞에서 기도드린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모님, 어두운 세상 우리가 살아갈 길이 무엇인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이 세상에 구원을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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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날이 저물어서 어두워지고 성모당의 촛불은 더욱 밝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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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허락하면 성직자 묘역도 둘러보길 권한다.

 

순례 스템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정문으로 내려와 아저씨의 도움으로 성모당 남쪽 옆으로 돌아가니 자그마한 건물에 두 개의 문이 있다.
이곳이 고해소인데 고해소 앞에 순례 스템프가 양쪽 모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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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템프를 찍고나서 정문으로 내려와 우회전을 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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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대구시가 지정한 "남산 100년 향수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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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수길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어머니 사진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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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복자 성당을 향하여 서두른다.

남문시장 사거리와 봉산육거리를 거쳐 수성교에서 신천 자전거길로 진입하여 동신교로 올라가서청구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복자성당 정문에 도착한다.7a77c18adc229c70aba0c15768ec1cd4_1500605451_855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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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성당 입구에서 본 순교복자 묘역 앞 잔디광장.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3위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천주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들의 애환은 오늘날 후손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하물며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임을 기억한다면 순례자들은 하염없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울산 장대벌에서 한날 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에 의해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구덩이 속에 묻혀 있다가 1907년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됐다. 그 후 1932년 5월 말 월배동 감천리의 천주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 19일 비로소 대구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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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에서 태어난 허인백 야고보는 본래 중류 계급으로 생활이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846년 입교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866년 병인박해 초기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재물에 어두운 그들에게 돈을 주고 간신히 풀려났다. 식솔을 데리고 길을 떠난 그는 언양(彦陽) 산골에 잠시 머물다 울산에 있는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으로 피난해 여기에서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을 만나 순교의 길을 예비했다.

 

복자 성당은 2010년 노후화된 성당을 보수해 3위 순교자를 기리는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충청도 공주 태생인 김종륜 루카는 어려서 입교해 신앙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다. 박해로 충청도 일대가 소란해지자 길을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의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금 울산의 죽령 교우촌으로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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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묘역 잔디광장 앞에 있는 성지순례 스템프 함

 

이곳 죽령 대재 마을의 회장이었던 이양등 베드로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박해를 피해 멀리 경상도로 내려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울산 대재 공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꿀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며 전교에 힘쓰던 그는 다른 두 사람을 만난 후 또다시 박해를 피해 먼 길을 떠났다. 여러 날 끝에 경주 산내면 단석산에 있는 한 석굴(범굴)을 발견하고 이를 천혜의 피난처로 삼아 세 가족은 모두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조정으로부터 더욱 혹독한 체포령이 내려져 마침내 1868년 이들은 포졸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이들은 즉시 영장(營將)의 심문을 받았다. 이들 3인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경주 진영에서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의 80리 길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큰 칼을 목에 차고 돌과 자갈, 가시밭길을 걸어 이틀 만에 도착한 울산 장대에서 그들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목을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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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고향을 떠나 어린 자식과 힘없는 부녀자들을 이끌고 수십 수백 리 길을 쫓겨 다닌 이들은 오히려 순교함으로써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 터덜거리던 현세의 고달픈 삶은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써 얻은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을 받게 되었다.

 

복자 성당은 대구대교구가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기념해 교구민의 성금으로 1970년 설립한 성당으로 1973년 감천리 교회 묘지에서 순교자 3위의 유해를 이장하면서부터 도심의 순례지로서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순교신심의 중심지가 되었다. 1987년 관할 구역명을 따라 신천 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9년 본당 설립 당시의 정신을 살려 복자 성당으로 다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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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조성된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허인백(야고보) 3위 복자의 묘소, 묘역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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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5일 축성한 성 김대건 신부 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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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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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성당은 제대와 감실에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여러 성인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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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출입구 위에는 울산병영에서 순교한 세 복자의 영광을 표현한 대형 유리화가 자리하고 있다.

복자성당을 끝으로 순례를 마무리하려고 돌아서는데 한 70대 자매님이 기도를 끝내고 시원한 쥬스팩 1개를 가방에서 꺼내어 건내준다.

지난번에 예비신자가 교리를 받다가 도중에 그만둔 사람이 있어서 이번에 다시 입교 권면을 하기 위해 기도 하는 중이라면서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조심해서 올라가면서 기도까지 부탁을 한다. 동대구역으로 달리는 길 내내 화살기도를 바치고 ...
역 앞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21:12 KTX산천을 타고 용산역에 23:18 도착하여 1호선 의정부행 막차에 올라 폭염속 대프리카 순례를 무사히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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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전한 순례길을 함께 하신 하느님께 영광과 순교성인들, 무명 순교자 분들의 영면을 빌면서 깊은 숙면에 들 수 있어서 감사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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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62789?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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