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차 순례 - 여산 숲정이, 여산성당, 동헌 백지사터, 천호성지, 되재성당, 고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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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차 순례 - 여산 숲정이, 여산성당, 동헌 백지사터, 천호성지, 되재성당, 고산성당

20170802 04:40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 서둘러 준비를 하고 05:16분 첫차를 타고 용산역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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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코스는 용산역에서 06:50 누리로에 올라 함열역에 09:46에 도착하여 익산시 여산 숲정이- 여산성당- 여산동헌(백지사터)- 천호성지- 되재성당- 고산성당을 거쳐 전주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의 숙소까지 78.5km의 빡빡한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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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차 순례길 전체 자전거 코스 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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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내에서 준비해간 빵과 음료, 동행하는 발렌티노가 준비해온 사과로 아침 식사를 대용하고, 3시간만에 호남선 함열역에 도착했다.

여산의 성지 순례를 자전거로 하기 위해서는 가장 편리하고 쉬운 들머리가 함열역이다. 버스는 일찍 출발하는 차가 없고, 여산휴게소에 정차하는 고속버스가 있으면 이용이 가능 하겠지만 파악 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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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낭로 724번 도로의 갓길과 일부 겸용 자전거도로 14km를 달려서 여산에 도착하니 도로변에 숲정이 성지 표지판이 보이고, 첫번째 순례지 여산 숲정이 성지에 도착 한다. 여산 숲정이는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 많은 신앙 공동체와 그만큼의 순교자들을 배출한 여산의 대표적인 순교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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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을 심문하고 사형을 선고한 여산 동헌에서 건너다보이는 숲정이는 지금은 숲이 아닌 논과 밭 가장자리로 변했다. 성지 입구에 대형 기념비가 눈에 띈다. 광장을 중심으로 왼쪽에 피에타상, 오른쪽에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성지 입구와 주차장. 주차장 너머로 고딕 양식의 여산 성당이 건너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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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에는 “이곳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기록만도 22명이며 그 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 천호 공소 부근에 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지방문화재 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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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성지 안내도에는 참수형 자리인 숲정이 외에도 교수형 자리인 장터, 수장형이 있었던 배다리, 동헌 백지사터 그리고 여산성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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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광장 야외제대가 있는 성지 입구에 있는 피에타 성모상

 

여산 성지는 현재 “치명일기”(致命日記) 등에 기록된 순교자가 25명에 이르고, 구전으로는 50여 명 이상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참수, 교수형은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한 곳이다. 백지사형이란 붙잡혀 온 교우들의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여러 번 붙여 질식시키는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수많은 교우들이 이 방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 중 17명이 고산 넓은 바위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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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김성첨 일가 6명의 치명은 대아리(大雅里) 저수지에 잠겨 버린 ‘넓은 바위’(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의 대표적인 애화(哀話)로 남아 있다. 

김성첨은 조카 김명언을 비롯해 정규, 정언 등 3형제와 그 아들 등 3대에 걸치는 6명을 포함해 한 마을 17명의 믿음이 모두 자기가 가르친 것이라고 진술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김성첨은 “우리는 이때를 기다려 왔으니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 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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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제대 우측에 세워진 예수성심상.

 

여산 본당은 선조들이 신앙을 증거했던 숲정이를 중심으로 부근 전답 4천여 평을 1980년 초 이미 사들여 성지 개발에 주력해 왔다.
여산의 성지 개발 사업은 크게 성지 순례 성당과 대형 십자가 건립, 예수 성심상을 조성한 주변에 나무를 심어 여러 해를 두고 숲정이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여산 순교지에서 천호산을 옆길로 넘어 천호 마을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도보 성지 순례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천호산 기슭인 이곳은 여산에서 8Km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 산길이었으나 1987년 전주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말끔히 포장되어 있어 순례길이 더욱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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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여산 숲정이는 익산시의 지원으로 2008년부터 본격적인 성지개발을 추진했다.
숲정이 일대 약 3만 3000㎡(약 1만 평)에 탐방로와 주차장, 분수대, 야외 성지 체험장, 피정의 집 등을 마련하는 공원화 사업을 순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9년 말 야외제대 및 중앙 광장 등을 새롭게 단장했고, 2014년 성지 입구 주차장과 화장실, 십자가의 길 14처 등을 마련하는 등 순례자들을 위한 시설 확충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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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숲정이와 백지사 터 성지 중간에 건립된 여산 성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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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성당은 1959년 1월 17일 화산(현 나바위) 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로 권영균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병인박해 이전부터 조선후기까지 약 100여년 동안 수 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당했 곳, 여산읍내 동헌의 백지사터, 배다리옆 옥터 교수대, 시장과 부근의 숲정이에서 백지사, 교수형. 참수형 등 ... 수 많은 인명이 희생된 곳이 성지로 지정되었고 이곳들이 잘 바라보이는 언덕에 여산성당을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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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가을에 완공되어 1959년 화산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창설된 여산성당은 박해로 피해온 충청도지방의 교우들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여산, 전주지방 제2의 성지로서 병인박해(1866)이후 이곳에서 이어진 순교의 행렬은 호남 천주교회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외벽에는 각 경관마다 얕은 플랫버트레스가 돌출되어 있으나 고딕양식의 bay system은 아니다. 

창대돌까지의 징두리벽은 콘크리트 위 흰색도장이며 상부는 적벽돌쌓기이다. 이형벽돌의 가지수는 많지않으나 쌓기법의 다양한 변화로 처마와 종탑부의 모울딩효과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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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성당은 정면 중앙종탑의 벽돌조 건축물로서 종탑과 정면의 외관이 매우 준수한 건물이다.
장방형 평면의 단순한 내부구성에 비해 정면은 매우 다양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종탑부의 형태와 장식적 처리수법은 화산성당이나 왜관성당과 엇비슷하지만 조금 더 복잡하여, 개구부 아치를 희게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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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성당에 도착 하니 미사가 끝나고 마지막 파견기도를 하고 있다. 여산성당은 전통 제대가 있어서, 트리덴티노 미사를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시 성체조배를 하면서 오늘 순례길도 주님께서 안전하게 동행하여 주시도록 기도한다. 


내부는 단일한 장방형의 공간으로 강당에 가깝다. 배랑이 없이 바로 출입문을 통해 본당의 내부로 들어감으로 첫베이는 천장과 바닥이 낮게 처리되어서 마루가 깔린 회중석과 공간을 구분해주고 있으며 제단부도 한단 높이의 차와 Triumphal Arch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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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광장에는 성모상 뒤쪽으로 수녀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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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렌티노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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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토마스관 외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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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성당에서 동쪽의 동헌 아래에 있는 백지사터로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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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사 처형은 동헌 마당과 옥터에서 자행 되었고, 궁터에서는 사람을 과녁삼아 화살을 쏘아 죽였으며 여자들은 우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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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사터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 뒤쪽 돌담 안쪽이 동헌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된 여산 동헌

 

전주 교구의 ‘제2 성지’라 불리는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유곡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해가 한창이던 조선 교구가 독립을 한 것은 1831년 9월 9일, 그 안에서도 조선인에 의한 자치가 최초로 실시된 곳은 1931년 전주 교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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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백지사형 조각 주위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바로 뒤에 여산 동헌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헌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최근까지 마을 경로당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헌 자리 주위에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 있어 유적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비(不忘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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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건조물로 추정되는 여산 동헌은 1980년 3월 8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고, 맞은편 여산 초등학교 종합 학습장으로 변해 버린 여산 옥터는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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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사터 내의 14처 십자가의 길

 

조선 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맞아 전주 교구를 방인 자치 교구로 선물 받았던 것이다. 이는 전주 지방의 신앙이 지닌 깊은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호남 최대의 신앙 산맥을 이루는 것은 대둔산과 천호산을 기점으로 한다. 일찍이 복음은 이 두 산의 줄기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에 전해져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골짜기마다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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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이 되면 공개 처형장으로 변했던 ‘배다리’와 ‘뒷말 치명터’는 하사관 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버려졌고 뒷말 치명터에서는 신자들을 정자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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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사형을 당하는 순교자의 얼굴 모습이 화강암으로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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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 담장 아래에 있는 예수성심상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일기”(致命日記) 등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5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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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지금도 동헌 앞마당에 백지사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처형장에서는 얼굴에 달라붙은 백지로 인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천국 영복을 그리며 천주 신앙을 고백한 선조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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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렌티노가 백지사터 안내 표석을 읽고 있다.
 

전하는 목격담에 의하면 교우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으니 질식하여 죽는데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곳 외에도 여산에는 기금터(연못과 누각이 있어 원님이 놀이하던 곳, 지금은 연못자리에 집이 있음, 현재 주차장 옆)에서는 화살로 쏘아 맞히는 사형법을 썼으며 여자들은 연못에 넣어서 죽였다고 한다. 또한 옥터(현재 여산초등학교)에서 옥사를 했고, 옥에서도 신덕 높은 교우들은 배교하려는 교우들을 권면하여 참회시키는 기도 장소였다고 한다. 배다리 및 뒷말 치명터(우시장, 현재 군인 아파트 앞 정자나무 있는 곳과 시장 안)에서는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런데 신도들이 야음을 틈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건져내어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보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하도 고파서 솜을 다 뽑아 먹었던 것이다. 

뒷말 치명터에서는 장날을(현 1, 6일장) 골라 신자들을 정자나무 가지를 늘어 뜨려 목에 건 다음 가지를 놓아서 교우들을 목졸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였다. 그 당시 신도들의 처형 일을 장날로 삼은 것은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것을 장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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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사터를 나와 여산터미널 앞에서 잠시 쉬는데 버스기사가 말을 걸어온다.
"더운데 쉬엄쉬엄 하세요. 나도 자전거 타는데 너무 더워서 요즘 저녁에만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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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건너편 마트에서 시원한 생수 두 병을 사서 발레티노와 나누어 각자 목덜미 뒤에 끼워 넣고 두번째 순례지 천호성지를 향하여 달린다.
11시반이 넘어가니 더위가 점점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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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의 신앙 선조들의 슬픈 역사를 되새기면서 문드러미재를 넘어가는 업힐에서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잠시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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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드러미재에서 뒤를 돌아 여산쪽을 내려다 보니 뒤쪽에 있는 천호산 기슭인 이곳은 여산에서 8km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 산길이었으나 1987년 전주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말끔히 포장되어 있어 순례길이 더욱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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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곳곳에는 독특한 디자인의 표지판이 서있어서 순례객 발길을 돕고 있다. 2009년 10월 31일 천주교를 비롯해 불교, 원불교, 개신교 등 전북 지역 4대 종교의 성지를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마련되었다.
천주교의 나바위 성지와 천호 성지, 불교의 송광사와 미륵사지 석탑, 원불교의 만덕산과 원불교 수련원, 개신교의 서문 교회 등 전주와 완주, 익산 지역에 있는 4대 종교의 성지 180km를 연결한 것이다. 아름다운 순례길은 문화재청으로부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길’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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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을 무릅쓰고 힘들게 천호성지 부활성당 앞에 도착하여 지친 모습으로 성모상 옆에서 잠시 쉬고 있는 정발레티노 모습, 1992년 3월 31일 성모상을 제작하여 성지에 설치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호(天呼) 성지는 그 이름 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180여 년 동안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천호 성지는 호남 지역이 자랑하는 대표적 사적지로 병인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12월 13일(음력)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순교자 중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같은 해 8월 28일(음력)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감춘 채 묻혀 있다.

전주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30킬로미터 남짓한 천호 성지는 인근의 숲정이, 여산, 나바위 등 호남 지역의 유명한 성지와 사적지를 지척에 두고 있어 순례길에 이들 성지들을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게다가 1시간 거리 안에 대둔산, 모악산, 마이산, 계룡산, 대아리 호수, 옥정 호수 등 빼어난 명산과 경관이 수려한 호수들이 자리하고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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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봉헌식을 가진 천호 부활성당

 

성당 지하에는 봉안경당이 마련되어 있다. 천호산 기슭에 들어서면 먼저 아담하게 자리 잡은 천호 성당(옛 천호 공소)과 교우촌 천호 마을이 반긴다.
천호 마을은 박해 시대 때 ‘다리실(月谷)’, ‘용추네’로 불리던 곳으로 교우촌이 형성되면서부터 후대에 행정명이 천호로 변했다.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39년경 기해박해를 전후해 주로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이곳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아직도 천호산 깊은 골짜기에 남아 있는 한 평 남짓한 밭자리와 가을엔 도토리묵을 쑤어 먹는 식생활, 밤마다 같이 모여 두서너 시간씩 바치는 만과(저녁 기도)를 통해 옛 신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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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성당 앞에 있는 큰 돌에 새겨진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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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성당 십자가탑 아래쪽에는 봉안경당과 사무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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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당 내부 모습


천호 마을은 자녀들에게 박해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조건과 특성을 실제로 보여 주는 교육장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1984년 설립되어 호남 지역 교회사 연구의 산실인 ‘호남 교회사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어 호남 교회의 역사에 관해 상세히 공부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마을을 들어서기 전 입구 우측으로 1km 정도 산길을 자전거로 올라가면 드디어 ‘천호 성지’에 이른다. 본래 순교자들의 묘가 있는 땅과 그 주변의 산은 조선시대 고흥 유씨가 하사받은 땅이었다. 이 때문에 그곳에 사는 신자들은 언제든지 쫓겨날 처지였고, 순교자들의 무덤도 이장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1909년 뜻하지 않게 되재 본당(현 고산 본당)의 베르몽(Bermond) 신부와 12명의 신자들이 45만 평 정도의 산을 매입할 수 있어 신자들의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순교자들의 묘소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 후 1941년경 베르몽 신부와 신자들은 45만 평 중에서 순교자들의 묘와 종적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곳으로 예상되는 땅 23만 평을 교회에 봉헌하여 비로소 성지로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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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산 기슭에 자리한 순교성인 묘역

 

1983년까지만 해도 천호 성지는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으며, 천호 공소와 고산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었다. 

게다가 손선지의 묘 외에 다른 순교자들의 묘는 구체적으로 확인도 되지 않았었다. 1983년 5월 호남 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12월 18일 당시 복자였던 정문호 · 한재권 · 손선지와 10명의 무명 순교자 천묘식을 거행하였다.

 

전주교구는 순교복자들에 대한 시성식(1984년 5월 6일)이 끝난 1984년 10월부터 천호 성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새롭게 단장한 순교성인 묘역을 축성하였다. 또한 1988년 9월 30일 고산 본당 수청리 공소와 석장리 공소 중간 길가에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김영오의 묘를 천호 성지로 이장하였고, 그 다음날인 10월 1일 이명서 성인의 유해 일부를 절두산에서 가져와 순교성인 묘역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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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0일 기존의 협소한 피정의 집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1년 후인 2007년 5월 19일 천호 부활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했다. 연면적 521평, 지하 1층, 지상 1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하 1층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산 이와 죽은 이들이 통공하는 봉안경당으로 마련했고, 지상 1층은 500여 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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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옆에 있는 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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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식사여부를 확인하니 다행히도 부페식 한식이 가능했다.

많이 지쳐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식사이다. 만약 여기에서 점심식사를 못하면 원래 계획된 화산면 소재지까지 달려서 13:30이후에나 가능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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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내려주신 맛나 같은 점심식사를 개눈 감추듯이 해치우고 12,000원을 지불하고 식당 옆에 있는 가톨릭성물박물관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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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국교회 최초로 건립된 천호 가톨릭 성물박물관.

  

2013년 12월 14일에는 '천호 가톨릭 성물박물관' 개관식 및 축복식을 가졌다.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건립된 성물박물관은 2008년 세계 희귀 성물을 소장해온 오문옥 루치아씨가 성물 1000여 점을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층 규모의 성물박물관은 미사와 성사 관련 성물(1층 성 베드로관), 예수님의 강생과 수난과 부활 관련 성물(2층 성 바오로관) 등을 관람하며 묵상과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또한 2012년 완공된 ‘천호 성물공예마을’과 연계해 성물 제작 체험과 신앙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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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구경하는 다양한 성물들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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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들보 사형틀이 유난히 끔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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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실을 표시하는 성물 조각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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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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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앞에서 기도대에 무릎을 꿇고 정발렌티노가 기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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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전통 한옥 양식으로 건립된 천호 성당과 사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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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월15일에는 이춘만 조각가의 십자가의 길 14처를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또한 자치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신앙의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1987년 8월31일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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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술(아오스딩) 박숙자(데레사) 부부에 의해 공소발전기금 봉헌과 천호마을 36세대, 130여명 신자들이 208년에 신축 봉헌한 한옥 성당 

 

2008년 5월 17일에는 경당과 사제관 두 채로 이루어진 천호 공소의 새 경당을 전통 한옥 구조로 지어 축복식을 가졌다.
천호 공소는 박해가 끝난 후 1913년 기와로 된 공소 강당과 사제 숙소를 마련한데 이어 1953년 공소 건물을 다시 지었으나,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2005년 공소 건물을 철거한 후 새 경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전주교구는 2011년 1월 고산 본당 관할 천호 공소를 준분당으로 승격해 호남의 첫 본당 사목지로서의 모습을 다시 찾고 지속적으로 성지를 보존하고 가꾸어가도록 했다.

 

천호 성지가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은 최적의 도보 순례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지에 안장되어 있는 선조들이 순교한 여산 성지에서 천호 성지까지 8km 남짓한 순례길, 천호 성지에서 천호산 자락을 타고 문수사 옆길로 해서 여산 성지로 넘어가는 순례길, 그리고 천호 성지 인근 신앙 선조들의 삶의 자리를 다시 걸으며 선조들의 신앙을 배우는 품안길 순례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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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연풍 성지에 묻혀 있는 황석두(루가) 성인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 없다 해서 얼굴을 지표면에 엎어 놓는 풍습과 같다. 이 순교자들도 그런 상태였다.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니, 죽어선들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였음이 분명한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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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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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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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당 옆에는 천호마을 성물공예체험센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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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지를 뒤로 하고 또 다시 힘든 업힐을 하여 승치리 되재성당을 향하여 세번째 순례지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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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한수 이남 첫 성당이자 최초의 한옥성당인 되재성당에 도착했다. 옛 되재 성당을 복원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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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마당에 있는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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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과 바실리카 형식을 절충한 장방형 구조로 건축되었다. 전북 완주군 고산 지방은 한국 천주교 창립과 더불어 형성된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어 우리 믿음의 고향과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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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재성당 앞 마당의 예수성심상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고산 지역에서는 성당이 세워지는데 1895년에 완공된 성당이 ‘되재 성당’이다. 

되재 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으로 현 고산 본당의 초대주임인 조조 신부가 1891년 되재 인근 차돌배기(현 백석, 전북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태동했다. 

이어 1893년 4월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는 되재(화산면 승치리)에 성당터를 구해 1894년 1월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동학혁명으로 위협을 느낀 비에모 신부는 공사를 잠시 중단했다가 이듬해인 1895년 1월에 다시 시작해 2월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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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북부 지역 복음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되재 성당은 1942년 공소였던 수청이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오히려 수청 본당 관할 공소가 됐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해 가을 불에 타 없어지고 만다. 되재 성당이 빨치산 거점이 될 것을 우려한 국군이 성당에 불을 놓았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1954년 임시로 공소건물을 지어 생활했고 1958년 본당 소재지가 고산으로 옮겨가면서 되재는 고산 본당 관할 공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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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재성당 내무 모습 , 성당 내부 중간에 칸막이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인 되재 성당은 전면적인 복원작업을 거쳐 2009년 축복식을 가졌다.
한수 이남의 첫 성당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성당이라는 되재 성당의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신자들은 2004년 관계당국에 되재 성당을 지정문화재로 신청했고, 발굴 조사 작업 끝에 되재 성당은 그 해 7월 3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전주교구와 완주군의 복원작업에 따라 2005년에 기존의 공소건물을 해체하고, 2006년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해 성당과 종탑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고 화장실.주차장.진입로 등 부대시설을 정비, 2009년 10월 24일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현지에서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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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에 부착되어 있는 되재교우촌과 성당에 대한 가톨릭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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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재성당 제대 뒷 모습

 

전라북도와 완주군이 공동으로 복원한 되재공소는 가로 3칸, 세로 8칸에 바닥 면적 143㎡(42.3평)인 한옥성당과 나무 종탑으로 이뤄져 있다.
성당 내부는 사제가 신자를 등 뒤로 한 채 미사를 드리도록 제대를 벽에 붙인 옛 모습을 재현했다.
또 신자석 가운데에 고정식 칸막이를 설치해 남녀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오면 왼편 오른편으로 갈라 앉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한 옛날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그리고 되재 성당 위쪽 산 중턱에는 성당이 설립되기 전 고산 지역에서 사목하다 열병으로 선종한 프랑스인 조스(Josse, 1851~1886) 신부와 라푸르카드(Lafourcade, 1860~1888) 신부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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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벽면의 십자가의 길 14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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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되기 전의 최초의 한옥 되재성당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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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확인 스템프를 찍는 정발렌티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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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바라본 성당과 종탑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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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된 되재 성당 종탑과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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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성당을 향하여 달리는 순례길은 비록 무덥지만 푸른 창공이 화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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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천로와 대아저수로가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마트에서 고산으로 내려가기 전에 지친 심신을 풀어갈 수 있는 아이스크림과 이온음료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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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성당 입구에 도착한 모습

 

고산은 전주시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다. 갈대가 널브러진 만경강을 지나 읍내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고산 성당이 있다. 성당 부지인 동쪽 대나무 숲을 경계로 해 고산 초등학교가 있고, 북동쪽 고산천변에는 향교가 있다.

고산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이지만 그 모태는 1893년에 설립된 되재 본당이다. 고산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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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지역은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에 저구리 · 넓은바위 · 다리실(천호) · 차돌박이(백석) · 석장리 · 되재 등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이 지역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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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주차장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우측에 세워진 되재성당 안내판과 옹기들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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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성당 중앙 현관 문

현 고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 1994년에 완공되었다. 
성당 외관은 한옥과 교회의 전통 건축양식인 바실리카 형식을 절충한 건물로 장방형에 종탑이 있는 독특한 구조로 돼 있다. 고산 성당을 설계한 김승배(단국대 종교건축연구실)씨는 “옛 되재 성당이 보여주었던 교회 건축의 토착화 의지를 계승해 설계했으나 복고적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뿐 아니라 성미술 · 조명 · 설비 등 모두가 복음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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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94년에 완공한 고산 성당 내부. 


성당 안에 들어서면 제대 벽면에 ‘하늘과 땅의 만남’을 주제로 한 벽화가 있다.
조광호(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 작품이다. 벽화는 무명 순교자의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앙고백을 보여주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둘 사이를 이어주는 19개 계단(지상의 12계단과 천상의 7계단)이 있고, 계단 양편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
천상의 붉은 빛 십자가는 한국 순교자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형구에 나 있는 7개 구멍은 7성사를 상징한다.
또 좌우 생명의 나무는 고산지방의 특산물이요 우리 농촌을 상징하는 감나무로 땅과 농촌이 우리 삶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당 네 면의 유리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유리화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왼쪽 유리화는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과 기적의 빵과 물고기로 나타내고 있다. 제대 정면 2층 성가대석 뒷편에 있는 7개 유리화 창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데 청색 주조에 붉은 색을 대담하게 배열해 강렬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제대 앞면에는 성부의 ‘손’과 성자의 ‘십자가’,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와 함께 삼위일체의 상징인 삼각형이 양각돼 있으며 제대 좌우로 ‘A’(알파)와 ‘Ω’(오메가)가 부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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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성당 잔디광장 앞에 있는 성모자상

 

고산 성당은 해발 55m 언덕에 자리한 지리적 공간미를 잘 살리고 있다. 사방에서 보이는 위치에 종탑을 배치해 놓았고, 성당 전면에 넓은 광장을 두어 남서쪽 원경과 북동쪽 수려한 근경을 그대로 살려 주변 자연환경과 성당 건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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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성당(구 되재성당) 건립 100주년 기념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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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외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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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마당의 잔디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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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이 많아 보이는 은행나무가 성당 앞마당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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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성당을 나와 당초 계획은 폭염으로 어려우면 고산버스터미널에서 전주시외버스터미널로 버스를 타고 점프 하려고 하였으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과 소요시간을 따져보니 자전거로 계속 달리는 것이 괜찮겠다는 판단하에 전주까지 봉동-벽성대학앞-차량등록사업소앞을 거쳐 20.5km를 달려서 시외버스터미널 옆 모텔에 여장을 풀고 땀에 쩔은 유니폼과 속옷을 세탁하여 탈수를 하고, 저녁 식사 후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전주에서 1박을 한 이유는 내일 아침에 첫 차로 금산면 원평행을 타고 원정 2일차 순례길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순례길을 안전하게 마치도록 도와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 드리고, 폭염에 동행하여 많이 지친 발레티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 상단 첨부 : 38차_함열_여산_천호_되재_고산_전주_170802.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82961731?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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