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차 순례-김제 수류성당,금산사, 원평성당, 고창 개갑 최여겸 순교성지, 백수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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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차 순례-김제 수류성당,금산사, 원평성당, 고창 개갑 최여겸 순교성지, 백수 해안도로

170803(목) 아침 05:30 전주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의 모텔숙소에서 기상 후, 근처 식당에서 콩나물국 백반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07:40분 원평행 직행버스 트렁크에 자전거를 싣고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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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는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가까이에 있고, 시외버스들은 거미줄 처럼 다양한 고장으로 연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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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외버스공용터미널 07:10 ~원평시외버스공용터미널 08:00 직행버스를 기다리는 접이식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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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는 전주에서 버스로 김제시 금산면 원평공용버스터미널까지 점프 후 금산면 수류성당-금산사-원평공용버스터미널로 돌아와 다시 버스를 타고정읍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구시포행 버스로 환승하여, 고창을 거쳐 고창군 무장면의 무장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여 무장읍성-동학농민군발상지-고창군 개갑성지를 끝으로 순례를 마무리 한다. 

 

개갑성지 인근에는 서울로 복귀하는 교통편이 없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법성포로 넘어가 백수해안 도로를 타고 내려가 영광읍에서 고속버스로 상경하는 자전거길 72.9Km, 버스탑승 86.9km를 혼합하는 비교적 장거리 코스이다.

오늘 순례길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버스 시간에 잘 맞춰서 순례를 해야한다는 점이며, 정해진 시간의 버스에 탑승하지 못하면 하루를 더 숙박해야 하는 교통편이 원활하지 못한 지역임을 감안해서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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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 공용버스터미널에 08:00에 도착, 원평교를 건너기 전에 교량 남단 우측 마을 어귀에 있는 번영수퍼 나들가게에서 시원한 생수 2병을 사서 발렌티노와 함께 목덜미 뒤에 생수병을 끼워넣고 원평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제방길 수류로를 따라 첫번째 순례지 수류성당을 향하여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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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성당 주차장에 도착하니 가정 먼저 우리를 반기는 예수성심상은 유난히 크고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이다.
수류성당은100년 이상 교우촌 명성을 이어온 성소의 못자리이다. 아침 햇살에 성당 종탑이 밝게 빛나고 있다. 
수류 성당은 상두산을 마주한 상화마을 입구 넓은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구원에 목마른 순례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수류 본당은 전주 전동 본당과 함께 188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본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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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주차장 위 언덕에는 예수성심상과 성모상이 화단과 잘 어울린다. 

 

수류성당 1889년 봄에 배재[梨峴]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 10월 초 성당을 이전하면서 본당 이름을 수류 본당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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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 본당은 1889년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신부가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安德里)에 설립하였던 배재 본당이 그 모태로, 이곳 배재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82년 가을 리우빌(A. 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서였다. 그 후 베르모렐 신부가 고산 빼재(完州郡 雲洲面 九梯里, 일명 秀峙)에 거주하면서 1888년 가을부터 1889년 1월까지 전라도 남쪽 지방의 공소 판공을 치렀다.

 

한편 베르모렐 신부는 이곳 배재가 자신이 담당하는 공소들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사목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과의 문제도 없어 본당을 설립하기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베르모렐 신부는 1889년 봄에 금구(金構) 배재 공소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고, 배재 공소는 곧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56명을 영세시킨 데 이어 안수룰(수류) 공소를 설립하였다.

 

1893년 4월에는 조조 신부가 후임으로 본당에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있었던 갑오 농민 전쟁으로 인해 7월 27일 성환(成歡)에서 청나라 패잔병들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마부 정보록(바오로)과 함께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한동안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가 배재 본당을 임시로 맡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5년 5월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신부는 본당 발전을 위해서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해 10월 초, 면 소재지가 위치한 수류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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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마당 맞은편에 있는 사제관 전경

 

새 성당 소재지를 물색하던 라크루 신부는 이영삼 진사의 수류 재실(齋室)을 매입한 뒤 안채를 사제관으로, 행랑채는 임시 성당으로 개조하였으며, 1897년 9월에는 남교우청과 여교우청에 각각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수류에 성당이 마련되자, 그 동안 제대로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던 각처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옴으로써 수류는 이제 완전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에 이어 1900년 5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페네(C. Peynet, 裵嘉錄) 신부는 1906년 1월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음) 48칸의 목조 성당을 완공한 뒤 10월 1일 드망즈 신부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수류 본당은 김제 · 부안 · 정읍 · 순창 · 고창 · 담양 · 장성 일대에 걸친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또 본당에서는 교육 사업으로 1909년 3월에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설립했는데, 설립 당시 학생수는 65명이었고 교사는 3명이었다. 인명학교는 1913년에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여학교도 개교했으나 재정 상태가 빈약하여 학교 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결국 1928년에 재인가를 받지 못하고 폐교하고 말았다.

 

한편 5대 주임 뤼카(L. Lucas, 柳嘉鴻) 신부 때에는 성가회(聖家會)에 가입하여 그 규칙을 지키는 가정이 100여 세대나 되는 등 신앙생활에 열심한 가정들이 많았으며, 그 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세가 급성장 하자 본당에서는 인근의 본당들과 피정 · 성체 거동 행사 등을 합동으로 추진함으로써 공동체 활성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30년 초에는 4곳에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1935년 1월에는 김 토마스와 최 시몬이 율치 공소에 야학을 설립하여 한글과 경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1937년 2월에 8대 주임으로 부임한 석종관(石鍾寬) 신부는 이듬해에 원평 공소를 설립하고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고, 9대 주임 최재선(崔再善) 신부는 교세 증가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40년 1월에 있은 김제 · 금산 · 수류 지역 회장과 유지들의 피정 때 각 지역별로 전교사 1명을 더 두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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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산골에 자리한 수류 성당 전경

 

일제 말에 이르러서는 지역민 400여 세대가 모두 신자가 되자 주민 교육은 곧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되었다. 이에 따라 10대 주임 이약슬(李若瑟)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한편, 관내 유일의 초등학교이던 ‘화율초등학교’ 학생들의 교육을 전담시킬 목적으로 1944년 8월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본당 신자 50여 명이 사망하였고 성당마저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수류 본당 관할 지역은 1951년부터 13대 주임 김반석 신부가 부임해 오는 1960년 3월까지 김제 본당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지역 신자들은 1959년에 성당 · 사제관 · 수녀원을 건립하는 등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61년 4월 25일 교구의 지시에 따라 김반석 신부는 성당을 교통이 편리한 원평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1966년 4월 8일에 다시 수류로 환원되었는데, 이때 격하된 원평 공소를 1977년 12월에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금산면 · 봉남면 · 금구면 · 정읍군 옹동면 지역을 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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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게시하고 있다.

 

15대 주임 권영균(權寧均) 신부 때는 가톨릭 구제회의 지원으로 상화와 복호에 저수지 축조 사업을 벌여 극빈 신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전개했고, 1980년 6월에는 사제관이 신축되었으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폐쇄한 지 30여 년 만인 1982년 3월에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1986년 3월에는 성당 내에 생필품 구판장을 마련하여 그 이익금을 주일학교 후원금으로 사용하였다. 

 

2010년 수류청소년야영장 내에 건립한 산촌체험관.1980년대 이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수류 성당은 65살 이하는 청년회에 들어야 할 정도로 ‘어르신’ 본당이 됐다. 하지만 수류 성당은 이제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해 약 7만㎡(2만여 평)의 부지에 조성한 야영장과 수영장을 중심으로 본당 주일학교를 비롯한 청소년들의 여름 수련장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03년 개봉된 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로 일반에게 알려진 후 수류를 찾는 외부인들도 부쩍 늘었다.

 

2009년 전라북도 김제시의 모악산 권역 종합개발 지역에 포함돼 야영장과 수영장, 교육관 등을 새롭게 보수한 수류 성당은 2010년 7월 17일 수류청소년야영장 내에 산촌체험관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김제시의 산촌생태마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산촌체험관은 연면적 905㎡(약 274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사무실 · 식당 · 주방(1층)과 큰방 2개 및 작은방 10개로 이뤄진 숙박시설(2층)을 갖추고 있다. 산촌체험관의 건립으로 수류청소년야영장은 수영장과 숙박시설을 갖춘 청소년 수련시설로 거듭나게 됐으며, 아울러 숙박 문제로 순례에 어려움을 겪던 ‘아름다운 순례길’ 이용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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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미사 참례를 위해 일찍 온 신자들과 성당 내부 모습.

 

성당 내부는 단순하다. 너무 단순해 오히려 돋보인다. 나무로 치장된 제단에는 장막 위에 세워진 십자가와 그 양편에 성 요셉상과 예수성심상이 장식돼 있다. 또 감실 앞에는 성모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벽면 양편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이것이 모두다. 더 이상의 장식은 하나도 없다. 군더더기 없이 전례와 기도에 필요한 것으로만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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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 본당은 1895년 9월까지 모악산 깊은 골짜기에 있는 배재마을(현 전북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 자리 잡았다가 그해 10월 수류에 있는 전주 이영삼 진사의 재실을 매입, 심산궁곡을 떠나 평야지대로 나왔다. 당시 주임이었던 라크루(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는 재실을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당시는 동학혁명이 막 끝난 뒤라 마을에 성당이 들어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주민들은 떠나고, 그동안 제대로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던 각처 신자들이 이주해와 주민 400여 가구가 모두 신자인 완전한 교우촌을 이루었다. 수류는 지금도 교우촌 명맥을 유지해 마을 주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다.

 

현 수류 성당은 1959년에 다시 지은 벽돌조 건물이다. 이전 성당은 프와넬(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설계해 1906년 착공, 이듬해 8월에 준공한 48칸의 목조건물이었는데 그 모습이 익산 나바위 성당과 흡사했다고 한다. 이 목조 건물은 1950년 9월 24일 인민군들과 빨치산들이 주일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성당 안에 모여 있는 신자들을 몰살하고자 성당에 불을 질러 전소 됐다. 다행히 성당에 갇혀 있던 신자들은 화마를 피해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으나 인민군과 빨치산에게 체포돼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또 수류에 피난와 있던 당시 전주 교구장 김현배 주교와 신부 8명, 수녀 14명이 체포돼 전주 교도소와 원평 교도소, 금산면 내무소로 압송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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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설립되어 성소의 못자리로 명성을 이어온 수류 성당 전체 외관

 

휴전 후 수류 본당 신자들은 구호물자를 적립해 성당 신축 경비를 마련했다. 신자들은 소실된 옛 성당처럼 목조 건물을 짓지 않고 직접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채취해와 벽돌을 만들어 성당을 지었다. 성당 지붕은 옛 성당이 불탈 때 주워 모아두었던 함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수류 성당은 이렇듯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피흘림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자신의 안위보다 하느님 성전을 먼저 지은 신자들의 희생으로 지어졌다.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아낸 사람이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듯(마태 13,44 참조) 수류 신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줄 양식을 내다팔아 세상의 보물보다 더 값진 하느님의 집을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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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 성당은 2004년 지붕 교체작업을 벌였다. 인민군 방화에도 이겨낸 함석들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삭아 곳곳에서 비가 샜기 때문이다.
오늘의 수류 신자들도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경제가 최악으로 어려운 이때, 특히 수입 농산물 개방으로 농촌 살림이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진 이때 자신의 것을 내놓아 성전을 보수하고 있다.

 

수류 성당은 신부님과 스님이 지도하는 두메산골 어린이 축구팀의 이야기를 그린 가족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가 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최근 많이 알려졌다. 영화에 나오는 화율 초등학교는 수류 본당이 1909년 개교해 해방 때까지 운영해 왔던 인명학교의 후신이다. 영화에 나오는 수류 성당의 서정적 풍경에 매료된 관광객들과 사진가들이 지금도 수류 성당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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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의 교육관.

주차장 화단에 핀 아기자기한 꽃들이 마치 현재 300여명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수류성당 교우촌 처럼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김영구ㆍ정재석ㆍ서정수 신부 등 본당 출신 사제 15명을 배출, 옛 교우촌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수류 성당은 전동 성당과 함께 188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본당으로 1895년 9월까지 모악산 깊은 골짜기의 배재마을에 자리 잡았다가 그해 10월 수류에 부지를 매입해 평야지대로 나온 이후 지금도 교우촌 명맥을 유지해 마을 주민 대부분이 신자이며, 성소의 못자리로서 많은 사제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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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다정하고 뜨겁게 두 팔을 벌려 포옹 하는 모습의 예수성심상을 뒤로 하고 벼들이 한들거리는 푸른 들판을 따라 후백제 견훤의 한이 서린 고찰 금산사로 자전거 페달링을 열심히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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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입구, 모악성지 대형 표지석이 있다. 다리를 건너 매표소에서 성인 1명 당 3,000원을 주고 표를 구입 후에 금산사 경내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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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문을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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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금산사(金山寺)는 백제시대(600년)에 창건한 절로, 766년에 이 지방 출신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크게 중창하여 대(大)가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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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을 살펴보니 사찰 규모가 대단하다.

① 금강문 ② 당간지주 ③ 종무소 ④ 보제루 ⑤ 종각 ⑥ 대장전 ⑦ 석등 ⑧ 명부전 ⑨ 대적광전 ⑩ 석연대 ⑪ 육각다층석탑 ⑫ 구종각 ⑬ 미륵전 ⑭ 방등계단 ⑮ 오층석탑  나한전  삼성각  송단향각  해우소  승당  중향각  요사1  요사2 해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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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도로 건너편에는 돋보이는 템플스테이 한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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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년경에는 후백제왕 견훤(甄萱, 재위 900∼935)의 원찰이 되었고, 주변에 금성(芩城, 혹은 금산산성)을 쌓아 성문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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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은 것은 고려 혜덕(慧德, 1038∼1096)왕사가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1079년이다.
개성 귀족의 아들로 법상종(法相宗)의 대종사(大宗師)가 되었던 그는 기존 금산사역을 넓혀 대사구(大寺區)로, 인근에 광교원(廣敎院)과 봉천원(奉天院)을 새로 개척해 3원 체제의 종합 대가람으로 발전시켰다. 대사구는 현재의 중심 사역이고, 광교원은 사역 남쪽에 경전 연구와 교육 시설로, 봉천원은 사역 동쪽 산록으로 승방 지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 원에는 3층 종각 건물들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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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전은 유일하게 현존하는 3층 목조건물로, 1635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입상을 모신 법당으로 미륵의 큰 자비와 용화수 아래의 설법을 뜻하는 의미에서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3층 벽의 창호를 통해 은은히 들어오는 햇빛이 미륵삼존의 얼굴을 비추어 종교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3층은 3×2칸으로 1, 2층에 비해 규모가 줄어든다.

 

외곽의 평주(平柱)와 내부 고주(高柱) 사이에 퇴량(退樑)을 걸고, 퇴량 위에 상층의 변주를 얹는 구조법을 채택하였는데, 목조탑파(木造塔婆)의 구조를 번안한 듯, 규모가 웅대하고 매층마다 줄어드는 체감율이 매우 안정적이다. 다만 중창 당시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듯, 내부의 높은 고주는 몇 개의 기둥만을 이어 만들어 현재 구조적 위험의 원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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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7칸의 대적광전은 이중기단 위에 길게 펼쳐진 건물로, 원래는 보물로 지정될 만큼 건축적 가치가 높았던 전각이다. 지금의 건물은 1980년대 예기치 못한 화재로 전소(全燒)되어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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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련대는 불상 밑에 놓였던 좌대로, 원래 이곳에 초기의 미륵전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불상이 놓였던 흔적의 방향이 송(宋)대의 방향과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 미륵전이 단독 주불전이었던 고려 초까지 가람의 주축은 송대와 석련대를 잇는 선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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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전의 반대편에 멀찍이 서 있는 대장전은 『사적기(史蹟記)』에 '4면 3칸'으로 기록된 바와 같이 앞과 옆이 모두 3칸인 건물로, 1635년 중건되었으며, 이후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되었다. 정면 가운데 칸에만 유일한 개구부가 나 있고, 팔작지붕의 용마루 위에는 복발(覆鉢)형의 절병통이 놓여 있다. 예전에 삼층목탑이었던 것을 옮기면서 현재와 같아졌다는 설이 있지만, 평면 형태가 장방형인 점으로 보아 원래부터 대장전으로 세워지지 않았나 싶다. 용마루의 복발은 삼층목탑이 없어지면서 남은 흔적을 옮겨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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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의 현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겨우 재건된 것들이며, 드넓은 마당을 가득 메웠던 수십 동의 전각들은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절 초입의 장대한 당간지주를 비롯해 아직까지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노주(露柱)와 거대하고 화려한 석련대(石蓮臺), 그리고 육각다층석탑 등 여기저기 남아 있는 유구(遺構)들은 번성했던 과거의 흔적을 보여준다. 흑색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은 원래 봉천원 지구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이 같은 형식의 소형 탑들은 고려시대에 큰 승방이나 암자 마당에 종종 세워진 것으로 조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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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우측에 육탄 3용사중에 고 안영권 하사 전공 기념비를 잠깐 둘러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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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평저수지 상류 환희교를 거너기 전에 큰 건물이 나타나는데 대순진리회의 상생청소년수련원, 그 규모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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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교 옆에 있는 있는 아치형 인도교 위에 정발레티노가 올라가서 사진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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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터미널로 복귀하는 길목에 원평성당을 잠시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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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성당 앞마당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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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성당 현관 문, 문이 잠겨 있어서 성당 내부는 살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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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에서 정읍으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표, 우리는 10:40 버스를 타고 정읍에서 내려 다시 구시포행 버스를 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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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도착하여 구시포행(무장)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고창 개갑성지로 가기 위해서는 구시포행 버스를 타고 무장에서 내려서 동학농민로를 따라 가는 방법과 또 다른 방법은 영광행 버스를 탑승하여 대산에서 하차하여 개갑성지로 가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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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읍11:50~무장12:30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무장에서 하차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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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가까이 있는 무장읍성을 우선 둘러본다.

 

사적 제346호. 지정면적 182,596㎡. 고려시대까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의 두 고을이었던 것을 효과적인 왜구의 방비를 위하여 1417년(태종 17) 합하여 두 고을 첫자를 떼어 무장이라 하고 성과 관아를 새로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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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수천명이 동원되어 둘레 1,470척(尺),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고,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

 

성벽 밖으로는 둘레 2,127척의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鎭)을 베풀었던 곳이다. 이후 성은 더욱 넓혀 축조되었던 듯하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가 2,639척이라 하였다. 성안에는 뱀의 두 눈처럼 생긴 지형에 두 곳의 샘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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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읍성은 사두봉(蛇頭峰)이라 부르는, 남북으로 기다란 구릉을 중심으로 하여 평원을 마름모꼴에 가깝게 네모지게 성벽이 감싸고 있다.
둘레가 대략 1.2km이고 성벽은 바깥의 돌이 흙 속에 묻힌 채 높이 1∼2m로 확연하게 남아 있다. 해자는 너비 4m, 길이 574m가 남아 있다.

성에는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있는데, 객사는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여 옛 무송·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성안에는 조선시대의 각종 건물터와 사직단·여단(?壇)·성황단 등의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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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읍성으로는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확실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성안의 중요한 건물들은 별도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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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험한 산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산성이나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듯 하늘 높이 시야를 가리는 궁성들은 사람의 접근을 막는 ‘단절’에 목적을 둔다.
하지만 나지막한 평지로 아담한 담을 둘러가는 읍성을 바라본다면 날카롭고 매서운 군사적 용도의 시설물이라기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게 하는 울타리라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읍성 중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유일한 읍성인 무장읍성은 조선 태조 때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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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의 둘레를 가진 읍성은 진무루 주변의 석축 성곽을 제외하면 대부분 흙으로 다져진 토성이다. 아직도 조선시대 당시의 객사, 동헌 등의 시설물이 무장초등학교 주변에 남아 있다. 건축 당시에는 2만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여장과 옹성, 성 밖으로 해자까지 두른 견고한 모습이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고부 봉기로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해산한 후 보복하듯 관군들의 횡포가 이어지자 정읍, 부안, 고창일대의 농민군과 동학세력이 모여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거사를 시작한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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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관아는 최여겸(마티아)이 처형 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25채에 이르렀던 건물 가운데 지금은 달랑 3채만 남아 있다. 
최 마티아가 이곳에서 개갑장터까지 8㎞ 남짓한 길을 쇠고랑을 찬 채 끌려갔을 동학농민군로를 우리는 자전거로 순례하는데 30분 정도에 이동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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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읍성의 진무루 앞에 있는 무장읍성길에 있는 식당에서 13:00가 다 되어서야 점심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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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아주머니는 25년 전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 세 명을 모두 훌륭하게 키운 장한 어머니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키운 갖가지 건강한 먹거리들을 재료로 식당을 운영 하는데 서울에서 왔다는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음식과 과일도 후하게 대접하여 주어 따뜻한 인심을 맛 볼 수 있었다.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봄철에 고창 청보리 축제 때에 이곳을 찾아 가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음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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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치고 동학농민군로를 따라 동학농민혁명군 발상지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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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발상지에 가면 동학농민의 뜨거운 땀방울이 느껴지는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이 보이고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으로 민족·민중 운동사의 큰 분수령을 이룬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제 1차 봉기지로서 만천하에 창의 포고문을 선포한 발상지의 상징인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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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의 전체적인 모형은 농민혁명의 강렬한 의지와 열성의 횃불을 형상화 하였고 중앙 부조 조각은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위해 만방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고 포고문 선포의 역사적인 모습을 표현하여 그 당시의 역동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주위에 배치한 죽창은 그 때 농민군이 사용한 무기로써 분연히 떨쳐 일어섬을 나타냈으며 혁명의 참뜻을 기리고 자손만대에 그 교훈을 널리 기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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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혁명 포고문 비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다. 인군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에 미쳐가는 것이다. (중략)

서기 1894년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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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후 일어선 고부 봉기가 이용태의 기만에 철저하게 능멸당하고, 이제는 전주를 쓸어버리고 임금의 목까지 베어버릴 기세를 올리고 있는 동학혁명군에게 전봉준이 읽은 창의문은 참으로 한가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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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고영주 의장 추모비


전라도 지방에서 쑥국새는 보릿고개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가난이 골골이 박힌 농촌에서 봄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갓 시집온 새댁이, 시어머니 무서워 쑥국도 못 먹고 굶어 죽어 쑥국새가 되어서, 봄이면 그렇게 구슬피 운다는 전설이 전라도에서 전해 온다.

 

고부 봉기가 어이없이 막을 내리고, 들판에는 아지랑이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그 봄날, 봉기 지도부는 인근의 손화중 접주가 있는 무장으로 피신을 하였다. 안핵사로 임명된 장흥부사 이용태는 장흥의 역졸 수백 명을 이끌고,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이가 안돈시킨 고부에 점령군처럼 들어온다.
봉기의 진원지인 말목으로 가서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굴비 엮듯이 묶어 고부로 압송하고, 군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전권을 휘두르며, 온 고을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 넣었다. 역졸들을 시켜 재물을 강탈하고, 부녀자를 겁간하였으며, 주모자로 지목된 집에는 불을 질러 온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봉기 해산을 극구 반대하던 봉기 지도부의 마음을, 고부 사람들은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고부 고을에는 온통 쑥국새가 울어대는 황량한 벌판 같았다. 그 굶주린 보릿고개에~~~

 

무장으로 피신한 전봉준 등 고부봉기의 지도자들은 전라도 각 군에 통문을 보내, 더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화중, 김개남과 더불어 동학의 교리에 충실하면서 많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고, 수탈적인 계급구조를 근본에서부터 혁파 할 뜻을 모았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싸움의 준비를 위한 권위를 갖고자 하였다. 장흥의 이방언, 흥덕의 이싯뚜리, 태인의 김덕명, 전주의 고덕빈, 전여관, 영광의 고달근, 금구의 송태섭 등과도 뜻을 모았다. 새로운 싸움을 위해 ‘호남창의소’를 만든 것이다. 북접으로 대표되는 최시형의 법소와 대립각을 최소화 하며, 남접의 독자적인 조직형태를 갖추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동학혁명발상지'로 알려진 구수내 마을은 흥덕에서 선운사, 심원을 거쳐 영광의 법성포로 가는 22번 국도변에 붙어있다. 인근은 지금도 영광군과 경계로 1894년 당시에도 무장과 영광의 경계에서, 부패한 관리들이 서로 자기의 책임을 미룰수 있는 교묘한 곳에서 혁명을 선포한 것이었다.   

 

조병갑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후 일어선 고부봉기가 이용태의 기만에 철저하게 능멸당하고, 이제는 전주를 쓸어버리고 임금의 목까지 베어버릴 기세를 올리고 있는 동학혁명군에게 전봉준이 읽은 창의문은 참으로 한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창의문은 최소한 지방의 유생들과 전라도 각지에 있는 부자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자 하는 창의소의 최소한의 고민이 담긴 내용이었다. 

후에 김개남이 고종이 보낸 사자를 독단적으로 목 베어버렸을 때 지방의 유생들이 농민군에게 심한 반감을 보였던 것을 보면, 지금의 창의문은 좀 논란이 될 수는 있어도, 많은 논의와 넓고 멀리 본 전략의 측면에서는 적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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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혁명군 발상지를 뒤로 하고 오늘 두번째 순례 성지인 개갑장터, 무장 출신 순교복자 최여겸 마티아의 순교 터인 개갑 성지에 건립된 12m 높이의 순교 현양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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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가니 22번 선운도로 변에 개갑순교성지 대형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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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표지석 뒤쪽에는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5:10)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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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성지 입구로 들어가니 최여겸(마티아) 순교성지 안내판이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고을과 영광군 법성포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인 공음면 석교리에 위치한 개갑 장터는 조선시대 당시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매우 번창했던 시장이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구한말 의병들의 물자 보급소와 연락처로 활용되면서 일제로부터 미움을 사고 폐쇄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고창군은 2004년 6월 개갑장터의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인정해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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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m 높이의 순교 현양탑 


최여겸은 일찍이 복자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혼인한 뒤에는 처가가 있는 충청도 한산에서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李存昌, 1759-1801년)를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이후 고향 무장으로 돌아온 최 마티아는 충실히 교리를 실천하고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데 힘써 흥덕 · 고창 · 영광 · 함평 등지에서 28명을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 마티아는 일단 한산의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최 마티아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일단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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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마티아가 무장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곧장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도 최 마티아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렬한 신자인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韓正欽, 1756-1801년)와 김천애 안드레아(金千愛, 1760-1801년)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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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최 마티아와 동료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최 마티아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었고, 며칠 후 그곳 개갑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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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에서 최여겸 마티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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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가장자리에 400m 길이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전주교구 고창 본당은 이런 역사적.교회사적 사실에 근거해 2002년부터 고창군과 함께 개갑 장터를 가톨릭 성지로 조성하고, 인근 유적지와 연계해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2004년 1차로 부지를 매입해 표석을 설치하고, 2009년부터 고창군과 함께 개갑 장터 부지에 ‘최여겸 마티아 순교터 성지조성 개발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에 들어갔다. 

총 16,500㎡(5,000여 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고, 그곳에 순교 현양탑과 야외제대, 400m 길이의 십자가의 길 등을 조성하였다. 12m 높이의 순교 현양탑과 야외제대 벽면은 최여겸 순교자의 활동상과 순교를 주제로 남용우 마리아 원로 유리화가의 모자이크 색유리화로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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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8일, 오랜 준비 끝에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의 주례로 최여겸 마티아 순교성지 축복식과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하였다.  

전주교구와 고창 본당 그리고 고창군은 향후 개갑 성지를 서남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사적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한편 최여겸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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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갑 장터는 인근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최여겸 마티아(崔汝謙, 1763-1801년)의 순교 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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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제대와 최여겸 순교자의 활동상을 담고 있는 벽면 모자이크 색유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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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제대에서 입구 방향인 순교 현양탑 쪽을 바라본 모습 

고창군은 개갑 장터의 이런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고려해 2004년 향토문화유적 제1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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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내의 피에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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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겸(崔汝謙)은 신유년인 1801년(순조 1) 정월에 박해가 일어나자  처가가 있는 한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발각되어 그 해 4월에 체포되었다. 

처음 한산관아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무장으로 이송된 뒤 다시 전주감영으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서울 형조로 압송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각각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십계명을 버릴 수 없고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에 형조에서는 그 해 음력 7월 13일 해읍정법(該邑正法)의 명을 내렸다. 곧 본래 살았던 거주 지역에서 형을 집행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다시 무장으로 이송되어 이 고을 장터인 개갑장터에서 7월 19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38세였다.

 

당시의 개갑장은 영광 법성포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또 장터 바로 지근거리에 석교창이 있어 배가 드나들었으며, 신안군도 등 섬들에서 키운 소를 배에 싣고 와 파는 우시장이 설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전한다. 이때의 박해에서는 최여겸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도가 된 신자들도 함께 붙잡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여겸에 의해 신자가 된 사람이 모두 28명에 이른다고 밝혀졌다. 그 중 기록에 의해 확인되는 경우를 보면, 무장의 최수천[횡성에 유배], 최일한[전주에서 형벌로 죽음], 흥덕의 김처당[청도에 유배], 영광의 이화백[영광에서 순교], 함평의 남중만[평산에 유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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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더위가 가장 기염을 토하는 15:00 경이어서 수도꼭지를 열어 헬멧을 착용한 상태로 물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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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입구도 십자가 모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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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뒤로 하고 선운대로에서 좁다란 개갑장터길로 진입하여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개갑순교성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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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법성포에 이르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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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이온음료로 목을 축이고 더위를 식히면서 휴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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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 진입을 위해 백법로 자전거 도로에 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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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백제불교문화 도래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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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을 바라보니 영광굴비의 본산지 법성포 면소재지가 훤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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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아직 건설 중이던 영광대교가 준공되어 이제는 모래미해변에서 법성포를 거치지 않고 홍농읍으로 바로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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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대교를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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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대교 아래 바닷가 모래미해변에는 관광객들이 뻘밭에서 갯거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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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길을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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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낮은, 짧고 긴 업.다운을 여러 차례 반복 하면서 건강 365계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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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해안도로 홍보를 위해 노을길 생태 탐방로 팜프릿에 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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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단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 갈 수도 있고 산책길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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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해안도로는 해질무렵 노을이 있을 때 시간 맞추어 오면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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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연가 펜션으로 내려가는 해안로4길을 따라 달리다가 답동 마리나베이펜션으로 올라가 마트에서 이온 음료로 휴식을 취한 후 오늘 순례길의 마지막 업힐을 힘겹게 올라간다. 해안로와 해안로4길이 만나는 삼거리 지점이 바로 남쪽의 백수해안도로 표지석이 있는 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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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사진을 몇 컷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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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패여 요철이 심하던 몇년전과는 달리 도로 포장이 잘 된 내리막 길을 따라 백수읍사무소를 향하여 달린다.

저렴하고 맛 있는 메뉴로 소문난 한성식당을 찾아 갔는데 시간이 너무 빨라 아쉽게도 재료 준비 준비중이라서 식사를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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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수 없이 영광버스터미널로 달려서 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양지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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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20분 고속버스에 올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22:40에 도착하여 7호선을 타고 2박3일 원정 순례길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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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벽에 부착된 관광안내도에는 처음 발견한 영광 2경으로 천주교인 순교지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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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한 정발렌티노께 고마움을 전하고,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 상단 첨부 : 39차_원평_수류성당_금산사_개갑성지_백수해안도로_영광_170803.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79589897?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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