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차 순례 - 명례성지, 진영성당, 신석복마르코묘, 박대식빅토리뇨묘, 진례성당, 조씨형제묘, 오륜대성지, 광안성당, 장대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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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차 순례 - 명례성지, 진영성당, 신석복마르코묘, 박대식빅토리뇨묘, 진례성당, 조씨형제묘, 오륜대성지, 광안성당, 장대골성…

20170823(수) 03:40 알람 소리에 기상하여 전철 운행이전 시각이라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 05:05 KTX로 밀양역에 07:08에 하차하여 42차 자전거 성지순례를 시작한다. 이번 순례는 2박3일 원정 순례로 첫날인 오늘은 마산교구의 명례성지- 부산교구의 진영성당, 신석복마르코묘, 박대식빅토리뇨묘, 진례성당, 부산 생곡동 조씨형제묘, 오륜대성지, 광안성당, 장대골성지 등 자전거 라이딩 약 89km 7시간, 부산의 전철 탑승 약2시간으로 설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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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에 밀양역에 내려 출발 전 기념 사진을 한 컷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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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순례코스의 전체 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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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코스가 장거리라서 아침식사 시간 절약을 위해 KTX 승차 전에 서울역 대합실 식당에서 순두부 메뉴로 아침식사를 한다. 
 

코레일톡으로 05:20 KTX를 예매를 하였는데 새벽 시간이라 택시가 빠르게 서울역에 도착했기에 첫 차로 바꾸어 05:05 KTX를 탑승하니 15분 차이지만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첫차인데도 영등포-광명역에 이르니 거의 빈자리가 없이 승객들로 자리가 채워진다. 
밀양역에서 하차, 아직 안개가 덜 걷혔고, 다행히 비예보가 있었지만 하늘은 비교적 맑고 푸르러서 좋다. 70438b12daf115dde50bb9789053db94_1503832014_3467.jpg

밀양 역앞 바라본 광장 모습
역 광장 좌측에 있는 라이온스클럽탑과 밀양아리랑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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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교를 건너와서 좌회전하여 낙동강 자전거 길에 진입하여 건너온 예림교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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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밀양대교가 보이고~ 이제 시원한 자전거길을 따라 첫번째 순례지인 명례성당까지는 19.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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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들판은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 푸른 신록으로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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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을 따라 양림간 제방길~예평로~외산리를 지나 명례로를 달리다 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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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명례성당 종탑이 마을 언덕 위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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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읍 명례리 성지 입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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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의 명례성지 입구에 안내판이 보인다. 자상하게도 신부님 전화번호까지 ~~
 

마산교구 첫 본당이자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출생지, 명례성지의 성당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되었다.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이다.
명례는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이며, 1897년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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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도착하니 지난 3월부터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어수선 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은 그가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했다.
그리고 그가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돌아오는 길목에서 며칠을 기다려 김해 한림면 가산리 길에서 체포하여 즉시 밀양으로 압송했다. 이때가 신석복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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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로 사용하기 위해 비닐하우스가 임시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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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좌측 터에 공사중인 성지 안내센터 신축 건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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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 편의 휴게실 비닐 하우스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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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센터 위 언덕에서 바라본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성당 모습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그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안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대구로 압송되는 신석복을 뒤쫓아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형에게 “일 푼전(分錢)이라도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까지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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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계단 쪽에서 본 한옥성당, 1926년 건립한 기와 성당이 태풍으로 전파된 후 1938년에 축소 복원한 성당모습. 
성당과 그 일대는 2010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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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로 압송된 신석복은 경상감영에서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고, 교우촌 정보를 얻으려는 관장으로부터 혹형을 받았다.  

9일 동안 감옥에 있으며 세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지만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때가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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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로 들어가 본다. 제대 위 벽에는 성모상이 모셔졌고, 아래 좌우에는 예수님과 성모님 판넬화가 걸린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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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의 십자가의 길 14처 모습이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듯 ~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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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었던 성당 내부
 

한 가지 불행한 일은 순교자의 행적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그의 이름 또한 단순히 신 이냐시오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1895년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와 혼동된데 기인한다. 후손들이 이를 바로잡아 주길 청해 1925년 발간된 “병인치명사적”에서 마르코로 정정되었고,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이름 또한 신석복임을 밝혀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고, 후손으로는 아들 이냐시오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보았는데 그 중 막내인 신순균 바오로(1935년 수품, 1948년 선종)는 후에 사제가 되었다. 지금도 순교자의 4대 후손이 명례리 상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한편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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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서쪽에 있는 야고보의 집 건물 모습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을 성역화하기 위해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명례는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살던 교우촌으로 1897년 경상도에서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1866-1903년)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이어 1896년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 번째 사제로, 줄곧 이곳에서 사목하다가 1903년 명례에서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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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에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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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집 건물 한 쪽은 도서실.성물방으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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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뒤쪽으로 공사장 가림막이 세워졌고 가림막 벽에는 공사개요, 성지, 기념성당, 안내센터 조감도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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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막 앞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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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림막 뒤쪽을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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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막 언덕 아래에 신축중인 기념성당 모습인데 공사 인부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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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나오면서 성당 뒤쪽에서 바라본 성당 전경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과 안내센터를 비롯 성지개발이 잘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다시 자전거도로를 진입하여 수산대교를 건너 신복석마르코 순교자묘를 가기 전에 진영성당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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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안개도 걷히고 해가 올라와서 점점 기온이 오른다. 오늘 최고 기온은 섭씨 34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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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땀을 흘리며 진영성당에 이르러 성당 입구에서 본 성당 외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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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들어가니 좌측 건물이 사무실, 마당은 주차장, 그 앞 쪽에 성모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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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평일 미사가 진행 중인데 생각 보다 신자들이 많이 참례하고 있다. 강론시간이라 강론을 듣고 ~
순례길이 바빠니 봉헌이 시작 될 쯤에 고백소 앞의 장식장 아래에 있는 신석복 마르코 묘의 순례확인 스템프를 미리 찍고 2Km 인근에 있는 신석복 마르코 묘를 찾아서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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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나오면서 살펴 본 성당 전면에 있는 예수성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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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상을 뒤로 하고 진영로 언덕을 내려와 신석복마르코묘가 있는 진영성당묘지를 향하여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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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로 도로변에 신석복 마르코 묘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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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세워진 안내판

진영 성당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는 순교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소에는 1976년부터 매년 9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마산 지구의 신자들이 모여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한다.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 순교한 그의 유해는 원래 낙동강 건너 한림정(翰林亭) 뒷산 노루목(현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장항)에 매장되어 있었다.  

진영 본당 신자들은 매년 9월 순교자의 묘소에서 미사를 봉헌해 오다가 1975년 진영 본당 공원묘지(현 경남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로 이장했고, 이듬해부터 순교자 현양미사를 이곳에서 봉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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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입구 좌우에는 천사 상이 있고 십자가의 길이 세워져 있다.
 

순교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살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면서 살았다. 밀양에서 김해로 가려면 명례 나루터에서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고,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도 정착해서 살았는데, 신석복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당시 신자가 아니었지만 훗날 모두 입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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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진영성당의 신앙 후배들이 함께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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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제대 우측에 세워진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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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에는 세울 당시에 이름이 잘못 알려져서 치명자 신말구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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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성당 공원묘지의 야외제대와 제대 오른쪽에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결국 대구로 압송된 신석복은 경상감영에서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고, 교우촌 정보를 얻으려는 관장으로부터 혹형을 받았다.
9일 동안 감옥에 있으며 세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지만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때가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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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제대에서 바라본 진영성당 공원묘지 전경

신석복 마르코 묘지 참배를 마치고, 다음 순례지인 진례 박대식 빅토리노 묘를 향하여 하계로를 따라 업힐을 하여 김해터널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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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빠져나와서 200여미터를 내려와 우측에 있는 막다른 길을 따라 뒤로 올라가 안내 표지판을 만난다.

순교자 묘역으로 가는 산길 좌측 입구와 전방에는 폐쇄된 옛 진영 터널이 있다.
지금은 남해 고속도로 김해 터널이 생긴 후 진영 터널 두 개 중 하나는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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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을 따라 숲을 헤치며 100m 정도를 올라가니 산등성이에 죽어서도 선산에 못 묻히고 남의 문중 산에 평장으로 누워있던 박대식 빅토리노 묘와 순교자 안내판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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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신자들은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할 곳을 찾아 강원 · 충청 · 전라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도 지역에 신자들이 늦게 나타난 것은 지리적인 이유로 특히 마산교구가 위치한 서부 경남지역에 가장 늦게 신자들이 등장했다.
그로인해 초기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 이 지역에서는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다.

 

마산교구 지역으로 신자들이 들어온 경로는 두 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는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방에 숨어 있던 교우들이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합천, 창녕, 의령, 밀양, 진영, 함안 등지에 교우촌을 세웠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오래된 공소들이 남아 있다.
둘째는 1827년 정해박해가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해서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자 지리산과 백운산을 넘어 서부 경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함양을 본거지로 하여 단성을 거쳐 문산, 고성, 통영, 거제도로 흘러갔고 일부는 단성에서 북천을 거쳐 곤양, 서포 쪽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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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에는 순교밀양박공대식노렌조지묘 라고 새겨져 있다. 이곳 역시 세례명이 잘못 새겨진 것이다.

이러한 교우촌들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안정된 공동체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문산, 함안(대산), 고성, 통영(황리), 진영, 거제도에는 큰 규모의 교우촌이 있었다.

 

박대식 빅토리노의 순교 후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이곳 유씨 문장산에 평장으로 매장했다가 1956년에 봉분을 조성했다.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1812-1868년)는 1812년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詩禮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들 삼형제(종립 · 종반 · 종철)를 두었다. 그가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입교한 이후 부친 박만혁과 형제 대붕 · 대흥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병인박해를 만났다. 다행히 이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체포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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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무진박해 때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대식 빅토리노와 부인의 묘

 

그러나 1868년 7월 7일 무진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와 형 박대홍과 예비신자인 조카 박수연(47세)과 함께 체포되어 김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다.
대구로 압송된 그들은 감영(監營)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결국 대구 감사는 박대식과 그의 동료들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따라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박대식은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박대식의 나이는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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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서 바라 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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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전체 전경
 

경상감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머리를 매달도록 했다. 

순교 소식을 듣고 대구로 온 가족들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와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과 친척들이 다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책골)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다.


그 후 90여 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해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1966년 4월 15일 당시 진영 본당 주임이었던 유창호(劉昌鎬) 토마스 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때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순교자의 세례명을 임시로 ‘노롄조’(라우렌시오)라 하여 비석에 새겼다. 순교자 박대식의 묘는 이곳에 시신을 모신 후 한 번도 이장하지 않은 무덤이다. 그 후 박대식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교회사가 마백락 클레멘스와 순교자의 4대 손인 박영식 요아킴의 노력으로 2001년 8월 순교자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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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 묘를 내려와 순례확인 스템프를 찍기 위해 진례성당으로 달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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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례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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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성체조배를 하고 ~감사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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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례로에서 바라본 진례성당 전경
우측에 붉은 지붕이 진례성당 외부 모습이고, 성당 글씨가 있는 건물이 안내센터와 사무실, 교육관등으로 사용된다.

스템프는 좌측 건물 현관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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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주차장에서 바라 본 진례성당, 부지가 좁아서 그런지 지붕 위에 세워진 예수성심상이 특이 하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데다 낯선 길을 더위 속에서 달리다 보니 많이 지쳐서 12시에 진례면사무소 근처 식당으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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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메뉴는 추어탕이다. 맛있게 먹고 서둘러 생곡동 조씨 형제묘를 향하여 페달링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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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례로에서 바라본 들판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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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진례에서 27km를 달려서 조씨형제 순교자묘 입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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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입구 바로 전에 좌측에는 고 배문한 신부의 생가가 있다.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裵氏) 가문의 선산에는 배씨가 아닌 조씨(曹氏) 성을 가진 형제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조석빈(曺錫賓, 1825-1872년?)과 조석증(曺錫曾, 1834-1872년?) 형제 순교자의 유해가 문중의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선산을 앞에 둔 배씨 문중 선산에 묻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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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이다.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인들을 징계하기 위해 떠나보낸 귀양길이 오히려 유배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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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서슬에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은 이학규에 의해 김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밀양 박씨 문중의 순교자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 가정의 선대(先代)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박대식의 부친 박만혁(?-1810년)이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詩禮里)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 · 대흥 · 대식 3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막내인 박대식이 1868년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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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둘레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

어찌 되었든 이들의 입교 이후 진례, 녹산, 노루목 등에 신자촌이 형성됐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밀양 단장(丹場)의 가물리와 법흥리 등의 신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지방의 신자촌들이 더욱 번성했다.
원래 뼈대 있는 유교 집안이었던 창녕(昌寧) 조씨 김해파의 30대 손으로, 부친 조대연의 5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태어난 석빈과 석증은 천주교로 개종한 뒤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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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십자가의 길을 봉헌한 분들의 개요 안내석판

조씨 형제는 모습과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다 같이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섰다. 생곡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儒學)과 서학(西學)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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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결국 조씨 형제는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관헌은 먼저 형 석빈을 가차 없이 참수하고 나서 다시 동생 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참수되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갈대에 싸여 온 형의 거구와 이엉에 덮여 온 동생의 왜소한 알몸은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 하여 조씨 문중의 반대로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고(故) 배문한(裵文漢) 신부의 3대조(祖)인 배정문(裵禎紋) 공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순교자 조씨 형제의 묘를 보호 · 관리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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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순교자 조석빈과 조석증 묘와 제대를 겸한 묘비.
 

형 석빈은 손(孫)이 없었고 동생 석증은 아들이 있었으나 그나마 아들 대(代)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한다. 그 후 이들 형제의 순교 사실에 관한 구전이 배씨 집안을 통해 대대로 전해오다가 1989년 6월 19-20일 부산교구에 의해 묘지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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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끝 부분에 세워진 마침기도, 이 표석 바로 언덕 바위 위에 아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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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회사 연구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성지건립기념사업회 등의 기념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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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뒤쪽에 새겨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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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앞 우측에 배치된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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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안내판을 읽으면서 배문한 신부님 후손들의 정성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잠시라도 배신부님 생가에 들러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오늘 순례을 마쳐야 할 부산지역의 다른 순례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 성지 입구에 설치된 상수도 수도꼭지를 틀어 유난히 시원한 물 맛만을 보고 다시 달리고 또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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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에 힘들게 달리다 보니 많이 지친상태지만 드디어 녹산교를 지나가니 을숙도와 낙동강 하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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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 하구뚝을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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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흐르는 진땀을 닦아내며, 시원한 바닷 바람에 식히며 사진을 몇 컷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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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단역에 도착하여 마트에 들러 이온음료로 다시 지친 심신에 생기를 부러넣고 전철에 올라 먼저 멀리 장전역으로 가면서 휴식을 취한다.
가까운 수영장대 성지를 가지 않고 장전역에서 가가운 오륜대를 먼저 가는 이유는 부산시내 성지 순례를 마치고 나면 내일 남지로 가야 하기 때문에 숙소를 사상시외버스 터미널 인근에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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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역에서 장전역으로 가려면 환승을 두 번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장전역으로 가서 오륜대 성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연산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수영역으로 와서 장대골 성지를 순례한 후에, 광안역에서 사상역으로 가면 지하철 이용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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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시간 정도 전철에서 휴식을 하고, 장전역 4번 출구로 나가서 오륜대를 향하여 다시 페달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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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대 순교자 성지는 부산가톨릭대학교 앞을 지나서 약간의 업힐을 하게 되는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과 순교자 묘소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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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언덕 위에 예수님상이 순례자를 반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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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복자 양재현 마르티노, 이정식 요한의 아름다운 흉상이 순례자를 반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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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2014년 시복식을 기념해 설치한 순교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의 흉상 그리고 한복을 단아하게 입은 성모자상이 순례자들을 반기며 서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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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성모자상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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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이란 글귀 너머로 박물관과 순교자 성당 그리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비탈에 우거진 숲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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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경내의 주의사항 안내판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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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는 성지 사무실이 있고, 그 앞에 순례확인 스템프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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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건물 외관 모습


여름 휴가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남해의 항구도시 부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이룬 순교자들의 귀중한 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지난 1982년 개관한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개관 당시 한국순교자기념관)은 소장품으로 볼 때 가히 한국 최고의 순교자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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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아래에 있는 오륜대성지 안내판


뱃고동 소리 울리는 항구, 싱싱한 해물들이 지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갈치 시장, 파도가 철썩이는 해운대 해수욕장을 마다하고 흐르는 땀을 씻어 내면서 순교자들의 숨결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산역에서 전철을 타고 30분 남짓이면 장전역, 자전거로 10분, 마을버스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오륜대 순교자 성지와 구내의 한국순교자박물관은 무성한 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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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현관 좌측에 있는 조형물도 한복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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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외벽의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이라는 명패를 보며 현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의 후손은 살아 있다.”라는 글이 한눈에 들어와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에 대한 뿌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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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관련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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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 25일 개관한 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창설 초창기부터 윤병현 안드레아 · 홍은순 라우렌시오 수녀 등 많은 수녀들이 전국에서 수집 · 연구하고 간직해 온 순교자들의 유물과 서책(書冊) 및 형구(刑具) 등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어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매우 우수한 박물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의 1층 한국 천주교회사 전시관에는 순교자들과 관련된 유물과 유품, 각종 자료와 형구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한국교회사 · 궁중유물 · 오륜당(민족자료) · 성모성년 · 기념자료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 3층에는 김인순 루갈다 기증품(민속품)과 도예작품 전시관과 특별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특별 전시실에서는 수시로 가톨릭 관련 전시 및 성화전 등을 기획하여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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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관 가운데에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대들보 사형틀이 있어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연상케 한다.

또 죄인을 참수할 때 사용한 칼인 행형도자(行刑刀子), 태형이나 장형을 행할 때 쓴 태형대, 수십 종의 곤장, 목에 쓰는 칼 등이 철저한 고증에 의해 그 형태가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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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1층 전시관에 전시된 박해시대의 다양한 형구들.

성 김대건 신부의 유물 중에는 유해를 관에 넣고 그 위를 덮었던 횡대(橫帶)와 친필 서간 등이 있고, 다산 정약용 세례자 요한, 성 베르뇌(Berneux) 주교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십자가 등도 눈에 띈다. 그리고 한 면에는 소학(小學), 다른 면에는 교리를 적어 둔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의 위장 교리서 등 희귀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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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에 순례했던 언양 죽림굴에서 나온 성모상과 십자가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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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년 특별 전시관에는 수십 수백의 성모상이 눈길을 끄는데 이중에는 필리핀의 수백 년 된 성모상에서부터 강화도 무명 순교자 무덤에서 발굴된 성모상과 일본의 ‘마리아 관음상’ 등 독특한 성모상들이 다수 있어 이채롭다. 또 2층과 3층에는 순종비(純宗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와 의친왕비(義親王妃) 김수덕(金修德) 마리아가 기증한 궁중 유물, 대원군의 친필 등 왕실 유물과 김인순 루갈다가 기증한 조선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많은 민속품 등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 말기와 개화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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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은 부산광역시에 1종 전문 박물관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어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교육 ·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박물관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고, 매주 월요일과 명절에는 휴관한다.

2013년 10월 4일부로 반세기 동안 성지를 지켜온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부산교구로 성지의 관리 권한이 변경되었다.
부산교구는 이곳을 '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명명하고 전담사제를 파견하여 미사와 각종 강의 등을 시행하여 순교자 정신의 계승에 힘쓰며, 노후화된 건물 개보수 등 본격적인 성지 정비 작업에 힘쓰고 있다. 2014년 9월에는 124위 시복을 기념해 입구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복자의 흉상을 제작해 설치했고, 8위 부산 순교자 묘역을 튼튼하게 보수하며 비석도 새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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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맷돌같이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이 돌 형구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의 학살로 민심이 동요되자 정치적으로 불안을 느낀 대원군이 ‘소리 없이 죽이는 기계’를 만들라고 명해 고안된 것이다.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에 밧줄이 매인 채 구멍을 통해 반대편에서 잡아당기는 우악스런 손길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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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앞마당 상설 전시장에 고증을 거쳐 절반 크기로 건조한 라파엘호.

박물관 옆에 있는 순교자 성당 앞에는 작은 배 하나가 눈에 띄는데, ‘라파엘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배는 한국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Ferreol) 신부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서 제주도로 표류한 끝에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한 배를 고증에 의거하여 절반 크기로 건조한 것이다.
 
그 옛날 이 땅에 복음의 빛을 건네주기 위해 거친 풍랑을 헤쳐 오던 김대건 신부가 뱃전에 선 모습이 눈에 선한데, 바로 그 옆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돌 형구가 놓여 있어 당시의 박해 상황을 한마디로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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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당을 왼쪽에 두고 돌아가면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이어지는데, 그 초입에 부산 순교자 8위의 무덤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73세의 노구로 모진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한 이정식 요한(1795-1868년),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아내 박조이 마리아, 조카 이삼근 베드로 등 일가를 포함한 8위의 순교자들은 병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9월 부산 수영장대(水營將臺)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의 극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때 순교한 이들 중에서 이정식 요한과 그의 대자인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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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시복식을 기념해 말끔히 단장한 부산 순교자 묘역. 병인박해 당시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등 8위의 순교자를 모시고자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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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8명 중 순교복자 이정식의 일가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수습되어 부산 동래구 명장동 산96번지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에 모셔졌다가 1977년 9월 19일 현재의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뒷동산으로 이장되었다. 다만 나머지 4명의 무덤은 찾을 수 없어 기념비만을 세워 두었다.
[8위 순교자 중에서 이삼근과 이관복은 가족관계와 이름과 세례명 연결이 주교회의 편찬 약전과 수영장대 및 오륜대 순교자 성지의 안내문이 다르다. 여기서는 약전의 설명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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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부산시에 1종 전문 박물관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어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교육 ·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2013년 10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이어 성지를 관리하게 된 부산교구는 '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명명하고 전담사제를 파견하여 본격적인 성지 정비 작업에 힘쓰고 있다. 2014년 9월 시복식을 기념해 성지 입구와 복자 흉상을 설치하고 순교자 묘역을 재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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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신부, 다블뤼주교, 최양신부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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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 야외전시장에서 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외부 모습.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194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복음 선포와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설립 취지대로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순교 신앙을 후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순교자 관련 유물과 교회사 관련 자료 등을 수집하거나 기증받아 이를 전시할 기념관 설립을 계획하였다. 마침 서울대교구에서 병인박해(1866년)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67년에 절두산 순교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박물관)과 성당을 건립하자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 지역에 한국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현 오륜대 부지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오륜대 성지 순례를 마치고 박물관 관리하는 수녀님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장전역으로 내려와 전철에 다시 오른다. 연산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수영역 4번출구로 나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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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역 4번출구에서 먼저 광안성당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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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성당 내부 모습, 성체조배를 하고 오늘 무사히 마지막 순례길까지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길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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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골순교성지,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한 수영장대 순교성지 입구.


부산시 수영구 광안 4동 546-4번지.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수영 장대골에서는 병인박해 당시 동래의 전교회장이던 이정식 요한(李廷植, 1795-1868년)을 비롯한 8명의 천주교인들이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처형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항구 도시인 부산에는 병인박해 당시 광안동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있어서 붙잡혀 온 천주교인들을 이곳에서 처형하곤 했다.
 
이때 처형된 교인들의 목은 장대 위에 매달아 두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경계심과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많은 천주교인들의 처형장면을 지켜 본 사람들이 경탄하여 구전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형을 하는 수영 장교들과 군졸들은 삼엄한 분위기에 위엄을 갖추었지만 사형수들은 마치 잔칫집에 나가는 기쁜 표정으로 순교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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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순교한 이들로는 이정식 요한과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아내 박조이 마리아 그리고 조카 이삼근 베드로 등 일가족 4명과 이관복 야고보, 차장득 프란치스코, 옥조이 바르바라, 이정식의 대자인 양재현 마르티노(梁在鉉, 1827-1868년) 등 8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에서 이정식과 양재현은 2014년 8월 16일 서올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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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성역화를 마치며 건립한 수영장대 여덟 순교자 기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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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성역화를 마치며 건립한 수영장대 여덟 순교자 기림비 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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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제대와 십자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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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돌과 여덟 순교자 위패.


※ 상단 첨부 : 42차_밀양_명례_진례_옥봉_오륜대_수영장대_20170823.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79586206?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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