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차 순례 - 대산성당, 사봉성지, 문산성당, 옥봉동 성당, 거제 옥포 윤봉문요셉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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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차 순례 - 대산성당, 사봉성지, 문산성당, 옥봉동 성당, 거제 옥포 윤봉문요셉묘

20170824 부산사상(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07:00 대구행 직행버스 첫차를 타고 남지시외버스터미널에 08:00에 하차하여 어제에 이어 원정 2박3일 2일차 43차 순례를 개시한다. 오늘 순례코스는 함안 대산성당-구한선타대오묘, 진주 사봉성지- 문산성당- 옥봉동 성당 그리고 진주성,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거제 고현으로 점프하여 거제 옥포 윤봉문 요셉묘를 둘러보고 장승포에서 숙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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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지로 넘어가기 위해 07:00 버스표를 창구에서 구매하여 자전거를 버스 트렁크에 넣고 08:00에 남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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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코스의 일부, 남지에서 진주까지 개략적인 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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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행 버스표는 휴대폰 앱에서는 예매가 불가하고, 터미널 창구에서만 구매가 가능하며 탑승한 후에 목적지에서 차표를 운전기사에 주고 하차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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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순례지는 대산성당, 남지에서 12.8km로 09:00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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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성당은 2층에 성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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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성당 내부의 모습.

어느 교우 분이 피아노로 성가를 연습 중이다. 성체 조배를 마치고 기도를 올린다. 오늘도 안전하고 즐거운 순례길이 되어 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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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으로 내려와 현관으로 들어가니 강당이 나오고 그 앞에 순례확인 스템프가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구한선타대오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지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여 모셔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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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안으로 들어가니 십자가 아래에 있는 유리가 보이는 흰색 경단이 보이는데 이곳이 구한선 타대오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잠시 참배를 하고 나오는데 유해가 여기에 모셔졌다는 것이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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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를 나누어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다시 묘소를 향하여 2.6km 정도 페달링을 하여 묘지에 도착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모진 매질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젊은 순교자 타대오 묘 안내표석이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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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옆에 세워진 순교자 안내판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가등 마을에 모셔진 순교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1844-1866년)의 묘가 확인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후 너무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23세의 꽃 같은 나이로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청년 구한선 타대오, 혹독한 매질을 당한 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7일 만에 장독(杖毒)으로 선종했고,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 새대[新垈] 마을 입구의 신씨(愼氏)들 묘소 내 구석진 곳에 묻혔다.
그러나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 순교자의 묘는 고이 보전되기 어려웠고 점차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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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하얀 십자가가 보인다. 언덕 길을 올라가다 보니 묘소가 2016년 10월20일 대산성당으로 이장 되었다는 안내판이 있고 밧줄로 길을 가로 막고 있다.
왜 일까? 어떤 이유가 있기에? 그럼 이렇게 잘 단장된 묘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러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대산성당을 둘러보고 왔고, 유해가 1층 강당에 모셔진 것을 확인 했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순교자 묘소를 둘러보기로 하고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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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선 타대오 묘, 봉분 뒤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묘소 뒤에는 대형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인들과 잘 알려진 순교자들은 물론, 천행으로 가족이나 친지의 배려와 증언 등을 통해 유해가 따로 모셔지거나 적어도 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순교자들은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들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려진 순교자들 보다는 오히려 전혀 아무런 기록도 증언도 없이 다만 아침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형장에서 희광이의 칼날아래 스러진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구한선의 유해도 자칫하면 그 행적조차 묘연할 뻔했으나 천행으로 그 묘소가 확인됨으로써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
순교자의 묘는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인 제찬규 신부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찬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묘를 찾던 중 대산 공소회장인 윤성학(尹聖學) 바오로의 증언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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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옆에는 순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윤 바오로 회장은 구한선의 처조카인 최성순을 통해 순교자의 묘가 “신(愼)씨라는 사람의 묘소 안에 있다”는 말과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 증언의 내용은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말, 즉 “신(愼)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 나와 그 장독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는 말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래서 신씨들의 묘소를 살펴본 결과 묘소 한쪽 구석에 봉분이 거의 없어진 묘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고, 발굴 결과 구한선 타대오의 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대산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외교인의 묘소 안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76년 9월 현재 위치인 평림리 가등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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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 언덕에는 성모상이 있고 ~~

구한선은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미나리골은 남강 하류의 늪지대로 낙동강을 만나는 지점과 가까운 곳이라 여름이면 넘치는 물 때문에 살기를 꺼려했고 미나리꽝이 많은 곳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유학 서적과 잡서를 많이 읽고 요술로 신장(神將) 부리는 법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어른이 된 후 소촌[文山] 교우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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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도 구한선 타대오 순교자에 대한 안내판.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후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고,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참아내어 죽음 직전까지 간 그를 포졸들이 거리에 내다 버렸다. 교우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불과 한 주일 만에 장독으로 선종했다. 죽은 뒤 그의 이마 위에는 ‘품’(品)자로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 때 구한선의 나이 22세. 지금 같으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고 바야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려는 젊은이가 눈뜨고 차마 못 볼 그 숱한 매를 한 몸에 받고, 또한 살아서 호강하지도 못하고 죽어서조차 제대로 된 묘석 하나 없는 쓸쓸한 묘소에 묻혔던 것이다.
 
대산 본당은 2002년 5월부터 마산교구의 대표적인 순교자 중 한 명인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그 해 9월 18일 순교자 현양미사와 묘지 축복식을 갖고 인근에 주차장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순교자 묘 주위로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묘 양 옆에는 야외제대와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그리고 뒤에는 대형십자가를 세워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으나 성역화 10여년 만에 묘역 바로 앞에까지 공장이 들어서고 주변에도 또 들어올 예정이라 묘역 이장을 걱정하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임시로 대산성당 1층 강당으로 유해를 이장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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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공장이 들어서는 구한선타대오 묘소를 뒤로 하고 함안-가야- 신음-군북-원북-사군로 고개를 넘어 화광저수지를 지나 반성역 앞을 통과하여 35km를 힘들게 달려서 사봉 정찬문안토니오 성지에 도착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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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도착하여 바라본 공소성당 건물 외부 모습.
 

이곳이 목이 없어 무두묘인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진주 감옥에서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한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복자의 성지.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 복자 정찬문(鄭燦文, 1822-1867년) 안토니오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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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새로 신축해 축복식을 가진 문산 성당 사봉공소 건물 전경
 

정찬문의 묘에서 내려다 보면 중촌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그 옛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그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을 향해 굳은 믿음을 당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묘가 서 있는 허유 고개는 신자들이 수시로 넘나들었던 고개로 사봉 주유소를 끼고 약 600m 남짓 올라가면 이곳 성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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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묘소 입구에 있는 성모상

정찬문은 1822년 10월 13일(음) 진양 정(鄭)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진주 동면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 고려 말 대사헌 정온(鄭溫)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칠원 윤씨와 1841년 이전에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그의 나이 41세에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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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뒤 서쪽의 다용도 건물과 화장실과 잔디 마당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哲宗, 1849-1963년) 재위 기간 14년과 고종(高宗, 1863-1907년 재위) 즉위 직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순교 후 머리 없는 시신을 수습해 고향 인근에 매장된 후 1948년 유해를 발굴하여 입관한 후 이장하였다.
그 후 1975년 현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정찬문도 그 해 가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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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을 좋아했던 신부님의 작품으로 알려진 특이한 십자가상이 남쪽 광장 야외제대 옆에 있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에 끌려 나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과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모진 매를 맞고 감옥으로 끌려들어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이 장사(杖死)로 순교한 진주 감옥은 진주 공설시장 인근 중앙시장과 옥봉동 성당 사이에 있었으며, 거제의 사도 복자 윤봉문 요셉 역시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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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 건물 외부모습, 순례자를 위한 다용도실과 전례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그가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이후 그의 사촌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고복(考覆)에 연관된 시신이었기 때문에 머리는 가져올 수 없었다.
결국 머리 없이 몸체만 수습해 와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촌리의 무두묘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순교자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염했는데, 몸이 굳지 않고 마치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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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가 있는 동쪽 언덕길로 올라갔다. 순교자 안내판이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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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배치되어 있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베르나르도(1899-1964년) 신부는 굼실(隅谷, 사봉면 사곡리) 공소 회장에게서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30일 무촌리에 살고 있던 ‘텃골 마누라’라는 광산 김씨 할머니(당시 94세)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를 발굴해 새로 입관한 후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고 그 앞에 본당에서 준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75년 10월 중순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으로 이장했고, 1978년 1월 28일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그 옆에 순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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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 순교복자 묘역 동산, 십자가의 길 11처 옆에 건립된 대형십자, 그 뒤로 하늘로 오르는 듯한 특이한 성모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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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오른 쪽에 있는 정봉문 안토니오 현양탑, 그 아래에 꽃나무 봉헌 1구좌 5,000원을 받는다는 안내문이 있다. da3f39b9eea9b4cefc71f27cee903d84_1503904755_041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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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아쉬운 것은 남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리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옥바라지를 하던 부인 윤씨가 허유 고개를 떠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이다. 남편의 순교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던 부인은 이웃과 친지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이런 구박과 핍박을 받으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부인은 견디다 못해 남편의 고향인 이곳 허유 고개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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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 안토니오 복자 묘역 뒤쪽으로 신부님이 직접 제작한 폐자재를 이용한 십자가상과 그 뒤로 하늘로 오르는 듯한 성모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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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공소를 돌보는 박해정 마태오님과 통영 북신동성당 박영조 토마스아퀴나스님.
 

묘소 동산 남쪽 언덕에는 순례를 오는 분들을 위한 야외 평상 데크를 만들어 놓았는데 야영을 하는 사람들은 그 위에 텐트를 칠 수 있다고 이곳 공소 봉사자 박해정 마태오님으로부터 들었다. 박마태오님을 비롯 세 분의 봉사자들이 수시로 공소와 묘소 주변의 잡초들을 관리 하기 때문에 깨끗하게 정리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직접 반성역까지 가면 2km 거리에 사봉성지가 있다. 텐트가 없어도 다용도실에 순례자를 위한 침구들이 준비되어 있고 식사도 교우들이 봉사한다고 한다. 찾아가실 분들은 박마태오님 전화 010-팔일팔일구삼일일로 미리 예약하고 가면 된다.     

사봉성지는 문산성당의 관할 공소로서 매월 1회 이곳 사봉공소에서 공소예절을 올리고, 공소예절이 없는 주일은 문산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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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성지를 뒤로 하고, 다시 12km를 페달링 하여 도착한 세번째 순례지 문산성당 주차장에 도착하니 울타리에 빨간 석류가 예쁘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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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마당에는 성모상이 순례자를 반겨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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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에는 인두 그림으로 제작된 독특한 십자가의 길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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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 쪽으로 가까이 가서 예절을 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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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구 옆 어린이집 앞에는 텐트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배치되어 휴게소로 이용되고 있는데 구한옥성당이 한창 리모델링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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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은 옥잠화가 사무실 입구에서 순례자를 반긴다. da3f39b9eea9b4cefc71f27cee903d84_1503923510_8399.JPG

1923년 전통 한옥양식으로 건립된 구 성당
1937년 서양식 새 성당이 건립된 후 유치원으로 이용하다가 현재는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산(文山) 본당은 마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1905년 9월 22일 마산(현 완월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이다.
설립 당시에는 소촌(召村) 본당이었으나, 1913년 무렵부터 현재의 본당명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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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의 새 성당 계단 쪽에서 바라본 구 한옥 성당.
 

지금의 진주 · 함안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였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함께 1865년경 거제도를 방문한 함안(咸安) 출신의 복자 구한선 타대오가 이듬해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면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는데, 진주 문산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바로 박해 전 구 타대오에 의해서였다.
이곳의 신자 집단은 박해 후 다시 교우촌으로 재건되었으며, 1883년에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의 방문으로 소촌(召村, 현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소촌 공소는 그 후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에 부산 절영도(絶影島)에 정착하면서 부산 본당(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899년 6월 부산 본당 3대 주임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진주(晋州) 본당을 설립하면서 이 본당 관할이 되었다.
당시 진주 본당 신자수는 1,054명이었는데, 그중에 소촌 공소 신자수가 156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후 타케 신부는 1900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馬山浦)로 가서 마산 본당을 설립하였고, 소촌 공소는 다시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 타케 신부는 마산에 정착한 지 1년 10개월 만인 1902년 4월 20일에 제주도로 전임되었고, 대신 제주도에 있던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같은 날 마산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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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성당 내부에는 100년 전통의 역사 사진들과 역대 주임 신부님들 사진이 진열되어 있다.
2009년부터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가능한 원형에 가깝게 보수 또는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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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강당으로 개보수하여 사용하고 있는 구 한옥 성당 내부.
 

구성당과 새성당 두 성당은 동서양 건축양식의 조화를 이뤄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1923년에 신축된 한옥성당은 정면 6칸에 우측면 4칸, 좌측면이 3칸으로 된 장축형 평면의 전통 한옥 양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건축용 목재나 기와를 구하기 어려워 경남 고성의 어느 사찰을 헐어내고 나온 자재를 이용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중앙 통로 양쪽으로 건물을 지지하는 13개의 원형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기둥에 사용할 만한 긴 목재가 부족했던 탓인지 어떤 것은 짧은 목재기둥을 장부맞춤으로 연결해 길이를 연장했다.
연결부는 구멍을 파서 나무쐐기를 박아 고정했는데 투박한 모양새와는 다르게 아주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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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 앞의 예수성심상, 고딕 양식의 새 성당은 1937년 축복식을 가졌다

5대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 재임시인 1932년 5월 29일에는 3천여 명이 참가한 진주 지역 최초의 성체 거동을 문산 본당에서 거행하였으며, 교세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1935년 8월 22일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37년 5월 6일 성당과 사제관.수녀원을 건립하고 기존의 한옥 성당은 유치원 강당으로 이용했다. 새 성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과 벽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 서양식 건물로 10m × 37m의 긴 장축형 평면으로 세워졌다.
정면에 뾰족한 종탑을 세운 성당은 19세기 고딕 부활(Gothic Revival)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고 있다. 서양식 건축양식을 당시 여건에 맞춰 재해석해 설계 시공한 점이 돋보인다.
 
그 무렵 김영제 신부는 타본당보다 수도 성소자가 많음을 확인하고 1937년 4월 8일 본당 내에 성모 성심원(聖母聖心院, 1957년경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 합병)을 설립하였다. 이후 김영제 신부가 함안 등 몇몇 본당을 거쳐 밀양 본당에 부임하자, 1951년 회원들도 밀양 본당 내로 본원을 옮겨 사목활동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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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 내부의 모습.

당시로서는 드물게 기둥과 벽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 서양식 건축물이다.
2004년 2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옛 한옥 성당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오랜 세월 풍상에 부식된 일부 목재와 기와를 교체하였다. 이어 2014년 8월 16일 시복된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묘역 단장과 사봉 공소 신축 봉헌(2005년 4월 3일), 유치원을 증축, 100년사 발간 준비 등의 기념사업을 벌여 2005년 5월 5일 서부 경남 복음화의 산실이 되어온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또한 문산 본당은 2009년 12월 27일 성당 내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옛 제대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새 제대는 벽을 향해 미사를 봉헌하던 당시 제대를 본래대로 복구한 것으로 현재 감실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성당 천장과 벽, 바닥 등도 가능한 원자재와 건축 기법을 보존한 상태로 복구하고 성가대석을 대폭 수리하였다. 2011년에는 성당 내부와 외벽보강 등 2차 보수공사를 진행하였고, 옛 한옥 성당은 향후 본당 역사관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1950년부터 10년 간 본당 신부가 일곱 번이나 교체되자 공동체 역시 분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배급받은 전후(戰後) 구호물자의 처리 과정에서 관리 체계의 허술로 본당 내에 불신 풍조가 만연하면서 1957년 3-1959년 3월과 1960년-1964년 1월 사이 신부 부재의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다행히 이 기간 동안 옥봉동(玉峯洞) 본당의 주포니(C. Giupponi, 콘스탄시오) 신부와 사천(泗川) 본당의 라우리올라(G. Lauriola, 굴리엘모) 신부가 격주로 성무를 집행함으로써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64년 1월 본당에 부임한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를 중심으로 본당 내 단체들을 재정비하여 근 15년 만에 본당을 정상화하였다. 이후 문산 본당에서는 1970년대 프로테스탄트와의 교환 순회 집회를 통해 교회 일치 운동에 앞장섰고, 1980년대에는 주일학교에 과감히 투자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사 및 학생 연수, 신용 협동조합 강습 등을 통한 끊임없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1990년에는 성모 동산을 마련하고 요셉상을 안치하는 등 성당 안팎의 조경 사업에 힘썼으며, 1994년 11월 25일에는 소화유치원을 완공하고 옛 유치원 건물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줄고, 신자층도 점차 노령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어 현재 본당 공동체 분위기 쇄신을 위한 사목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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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 내부의 좌측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1904년 무렵 소촌 공소 신자수는 160명에 달하였다.
이에 무세 신부는 본당 분할을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요청하였고, 뮈텔 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 입국한 줄리앙(M. Julien, 權裕良) 마리오 신부를 1905년 9월 22일자로 무세 신부의 보좌로 임명하였다.
그에 앞서 무세 신부는 이미 마산 본당 관할 중에서 소촌 지역을 분리하여 새로 본당을 설립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줄리앙 신부의 임명은 곧 소촌 본당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산에 도착한 줄리앙 신부는 즉시 소촌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1월에 가서야 삼곡리(三谷里)에 초가 세 채를 매입하고 임시 성당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새 성당 부지를 물색한 끝에 1907년 소문리의 현 성당 부지 2,400평과 조선 시대 때 찰방 관서(察訪官署)였던 기와집 10여 채를 매입하고 성당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08년 9월 29일 새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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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 계단에서 내려다 본 앞 마당 모습

그러나 줄리앙 신부는 1909년 봄에 부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부임 이듬해 전교 및 지역 계몽 사업의 일환으로 배명학교(培命學校, 1926년 폐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명성이 널리 알려져 멀리 통영, 거제, 사천, 곤양, 함안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으며, 1915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긍련회(矜憐會)를, 그 이듬해에는 소화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이때까지 성당은 찰방 관서 건물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400여 년 된 노후 건물이라 더 이상의 보수가 어려워짐에 따라 3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 재임시인 1923년 11월 23일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으며, 기존의 배명학교와 유치원, 신자들의 사랑방을 중수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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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성당 동쪽 언덕에 있는 성당 마당과 성모동산. 성모동굴은 자연석굴을 그대로 살린 모습으로 보인다. 

 
1920년대 문산 본당은 경남 및 전남 지역의 관할 공소만 무려 97개소에 달해 공소 순회 기간만 7개월 이상이 소요되었으므로 공소 담당 전교 회장을 따로 임명하여 사목의 효율화를 도모하였고, 무의탁 행려노인들을 위한 고조원(孤助院)을 설립하여 지역 복지 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8년경 본당 단체로는 전교회, 성모 부인회, 공교 소년회(公敎少年會), 호상계(護喪契), 가톨릭 오시(五時) 품꾼회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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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성당 사무실 전경

사무실로 들어가 친절한 여성 사무장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사봉공소 순례확인 스템프는 우편함 속에 있다고 한다.
안내 표지가 없으니 사봉공소 순례확인 스템프는 찍지 못하고 문산 성당으로 달려왔다. 사무장님이 친절하게도 시원한 매실차를 타주어서 목을 축이고 더위에 지친 심신 피로를 풀었다. 많이 고맙다. 마음씨 곱고 친절하신 여사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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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산성당을 뒤로 하고 진주 옥봉동 성당까지 9.6km를 달려서 성당입구에 도착하니 소성당, 사제관, 사무실 건물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라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데 성당 입구의 예수성심상이 순례자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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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에 수령이 많아 보이는 느티나무 뒤쪽으로 대성당 건물이 보인다.
옥봉동(玉峯洞) 본당은 마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1926년 5월 10일 문산(文山) 본당 소속의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그리스도의 도움이신 마리아이다. 설립 당시에는 진주(晋州) 본당이었으나, 1967년 현재의 본당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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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앞에 있는 어린이집 건물

진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경로는 대략 두 갈래이다.
하나는 경북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여 동쪽 사봉면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지리산과 덕유산을 넘어 남강을 따라 내려와 문산에 복음을 전파한 경우이다.
이러한 두 경로를 통해 진주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진주에 사는 양반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과 중인 구한선(타대오)이 순교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문산 지역에는 신자 최(崔) 루도비코가 전라도 달구산에서 그곳으로 이사 와 살면서부터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는 이웃에 살고 있던 강(姜)문주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함안에 살고 있던 강문주의 사위 구(具)필경이 처가에 내왕하는 동안 최 루도비코에게 감화를 받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함안으로 돌아가 본가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교하였는데, 병인박해 때 순교한 그의 아들 구한선이 문산으로 이사 와 활발히 전교하였다. 구한선은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함께 1865년경 거제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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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54호 성당건물 전경,  


성당내부는 잠겨 있어서 둘러보지 못하고 컨테이너 사무실도 잠겨 있어서 순례 스템프도 확인하지 못했다.
옥봉동 성당은 뾰족한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조의 작은 건물은 초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근현대 성당 건축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1997년 부임한 정중규 신부는 대대적인 성당 미화작업을 진행하여 창문 유리화를 교체하고, 마당 조경을 새롭게 하며, 본당 70년사도 간행했습니다. 1933년에 봉헌된 성당이 모태가 되어 몇 차례 보수와 증축을 거친 현 옥봉동 성당은 2005년 4월 등록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문산에 뿌리를 내린 천주교 신앙은 다시 진주의 비라실(현 진주시 장재동) 인동 장씨(仁同張氏) 집안으로 전해졌다.
문산의 교우 제 씨(諸氏)는 1871년 딸을 진주의 비라실에 사는 외인 장익금(張益今)에게 출가시켰다.
삼 형제 중 막내인 장익금이 부인의 권유로 처가에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그의 전교로 두 형제들도 모두 신자가 되었다.
병인박해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진주의 교우촌들은 1880년대에는 이미 다시 안정을 찾았다.
문산 소촌(召村, 현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 교우촌과 진주의 비라실 교우촌은 박해 이후 경상도를 전담하게 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 의해 1883년에 모두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들 진주 지역 공소들은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에 부산 절영도에 정착하면서 부산 본당(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 소속이 되었다.
 
경상도 서부 지역의 신자들은 신자수의 증가로 본당 신설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1895년 진주가 진주부로 승격되어 관찰사가 거주하는 경남의 중심 도시가 되자 기회 있을 때마다 진주에 신부 모시기를 원하였고, 1897년 11월경에는 진주읍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이를 주교에게 보고하였으며, 1898년 7월에는 진주 · 양산 · 삼가 · 곤양 회장들이 연명으로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아울러 1898년 부산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한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는 1899년에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교세가 확대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는 진주에 새 본당을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청원하였다.
1899년 뮈텔 주교는 타케 신부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에게 진주 본당을 창설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부산 본당을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신부에게 맡기고, 그 해 6월 진주 본당을 설립하여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진주 본당이 술집과 접대부와 아전들만이 살고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당 신자들도 별로 없는데다가 아전들이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신자들 가운데 부정을 저지르는 자가 생겨 갈수록 전교 활동이 어렵게 되자, 타케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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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비라실로 거처를 옮겨 일주일가량 머물다가 1900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로 가서 마산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진주 본당은 공소로 전락하였으며, 진주 지역의 여러 공소는 다시 마산 본당 소속이 되었다.
1903년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방문하였을 당시 진주 공소에는 신자가 두 집뿐이었다고 한다.
1905년 문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으로 줄리앙(M. Julien, 權裕良) 신부가 부임함에 따라 진주 공소는 다시 문산 본당에 소속되었다.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리되어 새로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 주교가 부임함에 따라 문산 본당과 그 소속 공소들은 대구 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미국의 한 열심한 신자의 성금으로 진주 읍내의 동북쪽에 위치한 옥봉동 산 밑, 일명 순천당이라고 불리는 곳의 땅 120평을 구입하여 공소를 마련하였다.
이 공소의 초대 회장 이낙종(李樂鍾, 스테파노)은 전교에 모든 힘을 쏟았고, 그의 맏아들 이상석(가브리엘)은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또 이들 부자가 1920년 공소에 ‘해성학원’을 개설하여 육영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교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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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진주에 내려온 김에 잠시 진주성을 둘러보고자 초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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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아래 진주 남강에 있는 의암, 논개가 왜군 적장을 껴안고 투신했다는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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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니, 잠시 그 옛날 왜적이 침입했을 때 가녀린 치마자락을 펼쳐 나라를 지킨 논개의 충절과 목숨을 걸고 진주성을 지킨 충장공 김시민장군과 병사들의 뜨거운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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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 논개지문, 충절 기념비가 의암 위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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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남쪽 언덕에는 의기 논개를 모시는 의기사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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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의 주인공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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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의 역사 안내판, 진주성을 나와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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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여 거제 고현행 버스에 탑승한다.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 16:30에 도착하여 고현로 -신오교- 연하해안로 -거제대로 9.7km를 달려서 옥포 옛윤봉문 요셉묘을 잠시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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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문 요셉묘는 이미 지세포성지로 이장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순례자가 줄었다.
2013년 4월 20일부로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묘가 지세포리로 이장되었다는 안내문이 산길 초입에 설치되었다.

지금은 거대한 공업 단지로 변해 버린 거제도의 장승포와 옥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몸을 누이고 있었던 순교복자 윤봉문(尹鳳文, 1852-1888년) 요셉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지를 후손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옥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와 연결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 우수사 원균이 그해 4월 왜군과의 교전에서 패전해 73척의 배와 군사를 거의 다 잃고 노량으로 도망을 간 후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그 해 5월 7일, 50여 척의 왜선을 포위 공격하여 그 가운데 21척을 불태워 임진왜란 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유명한 옥포 해전의 현장이 바로 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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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문요셉 순교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지세포성지 순례에서 더 알아보기로 하고 14km를 달려서 숙소를 잡기 위해 장승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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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포에 숙소를 정하고 원정순례 이틀째 숙박을 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랜다.
da3f39b9eea9b4cefc71f27cee903d84_1503911803_9581.JPG장승포 야경이 아름답다. 당초 계획은 내일 아침에 지심도를 들어갔다가 나와서 점심을 먹고 지세포성지를 순례 하고 고현 터미널로 돌아가서 서울로 복귀하려 했지만 지심도는 동백꽃이 피는 때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통영의 토마스아퀴나스님과 실바노님의 조언에 따라 다음 기회로 미루고, 최근에 평화방송에서 보았던 유섬이 묘지를 둘러본 이후에 고현터미널로 복귀 하기로 하고 2박3일 원정 순례 이틀 째를 마감한다.

 

※ 상단 첨부 : 43_44차_대산성당_사봉성지_문산성당_옥봉동_거제성지_20170824~25.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79583450?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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