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차 순례(1) - 나주무학당, 나주순교자기념성당, 노안성당, 함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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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차 순례(1) - 나주무학당, 나주순교자기념성당, 노안성당, 함평성당

170907(목) 06:20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전라남도 나주역으로 출발한다.
45차 순례길은 총 86km 중 나주 무학당, 나주(순교자 기념)성당, 노안성당, 함평성당, 나비엑스포공원, 함평역에서 기차를 이용 목포역으로 이동(29.4km)하여 목포 산정동성당, 레지오마리애기념관 등을 둘러보고, 내일 09시 시작되는 "싸이클링신안2017" 행사 참석을 위해 목포북항까지 가서 1박을 하는 라이딩거리 56.6k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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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노안-함평 순계길 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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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용산역에서 05:50 KTX로 내려온 정글레고리오와 계인, 그리고 06:20 서울역에서 함께 출발한 정발레티노 등 4명이 합류하여 나주역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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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나주로를 달려 나주초등학교 정문 앞 화단에 있는 나주무학당 순교터 안내판을 살펴본다. 옛 무학당 터로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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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 위치조차 희미한 나주 무학당은 광주대교구 내에서는 유일하게 순교 터가 있었던 곳이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나주 초등학교 정문의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 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나마 주춧돌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무상한 세월과 함께 후손들의 못난 신앙을 돌이켜보게 한다. 

 

나주는 전라남도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번창한 고장이었다.
여기에 본당이 설정된 것은 1935년 5월, 하지만 나주 본당의 뿌리는 1866년 병인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학당에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는지 그 정확한 수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나마 "치명일기"에 이곳에서 치명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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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을 나와 우회전 하여 10여m를 가다보면 길 건너편에 천주교순교,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의병 수성군 대장(도총장) 정석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와 함께 단발령이 내려지자 나주 의병이 일어났다. 그들은 단발령을 찬성하고 친일발언을 일삼던 안종수와 부패관리들을 처단했지만, 관군에 의해 의병 주동자인 정석진과 김창곤 등이 1년 전 농민군이 처형된 전라우영 무학당 뜰에서 참수되었기에 순교자들과 더불어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록에 의할 때 나주 순교자 한 분은 전라북도 용담에서 태어나 신앙생활 중에 정읍에서 체포되어 이곳으로 압송된 것으로 알려진 강영원 바오로이다.
그는 천주학을 버리라는 강요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마침내 1872년 3월 9일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치명했다.
물에 적신 얇은 창호지를 여러 겹 얼굴에 발라 질식케 하는 백지사형은 그 사형 방법이 간편한 반면에 극심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 박해 시대에 여러 곳에서 사용되던 사형 방법이었다.

두번째는 전라북도 무장, 암틔라는 곳에서 살던 유치성 안드레아가 강영원과 함께 붙잡혀 나주읍으로 압송됐는데 그 역시 같은 날 처형됐다.  

하지만 그는 강영원과는 달리 쏟아지는 돌더미 속에서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세번째로 기록에 남아 있는 마지막 순교자인 유문보 바오로는 다른 두 치명자보다 먼저 순교한 것은 확실하며, 대략 2월 12일에서 3월 9일 사이에 나주에서 옥사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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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사람 소중하지 않다 할 수 없는 이들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나주 지역의 천주교는 그 터를 닦았다 하겠다.
비록 그 순교 터의 위치는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하는 이도 없이 잊혀졌다 할지라도 그곳 땅과 하늘에 서려 있는 확고한 믿음은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믿음의 터를 닦은 나주에는 1933년에 와서 임시 공소가 설립되고 이듬해에는 대지 3천 평을 확보,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했으며 1935년에 들어서 비로소 본당이 설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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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나주 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흔적조차 희미해진 무학당 순교터에 남아 있던 주춧돌 12개 중 10개를 지난 2001년 나주 성당으로 옮겨와 8개는 기념 조형물의 주춧돌로 사용하고, 2개는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는 곳에 놓아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주춧돌이 있는 나주 초등학교 화단에는 순교터 안내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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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초등학교 담벼락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 하여 골목을 빠져 나가면 사적 제377호 남고문이 나온다.

남고문은 도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서울의 숭례문을 떠올리게 한다. 옛날처럼 지금도 나주읍성의 4대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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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순례지 나주성당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교육관/사무실 건물의 지붕 위에 예수성심상이 우릴 반겨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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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무학당 순교터 인근에 1935년 설립된 나주 본당 안내판.

 

1872년 나주 무학당(武學堂)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안드레아) 등 세 사람의 순교로 나주와 천주교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순교는 이웃에의 전교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 후 나주에서 첫 세례를 받은 사람은 유학자였던 손정우(孫禎佑, 베드로)였다.
어느 날 친척집에서 한문으로 된 성서를 보게 된 손정우는 3-4년 동안 홀로 성서를 연구하다가 계량 본당(현 나주군 노안 본당)의 카닥스(Cadars, 姜達淳) 신부와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1927년 영세하였다. 그는 계량 본당의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계량 본당의 신자들과 교리 토론회를 갖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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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 마당의 나주성당 주보 로사리오의 성모자상

 

나주 지역의 본격적인 전교는 1933년 5월 나주에 설립된 십팔은행(十八銀行)의 지점장 임태길(任太吉, 마태오)의 부인 이 루시아와 계량(노안) 본당의 복사 이응범(李應範,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였다. 이 루시아의 공소 설립 제안에 이응범이 계량 본당의 박재수 신부와 나주 공소 설립을 의논, 1933년 9월 임태길의 사택에 나주 공소를 개설하였다. 그 후 열심한 전교활동으로 공소 시작 당시 17명이었던 신자수가 2년 후 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1935년 골롬반 외방전교회에서 나주읍 박정리(현 성당 자리)에 3,0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50평 규모의 성당과 사제관, 35평의 교사를 신축하였다. 이로써 나주 성당은 골롬반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성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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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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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신자수의 증가로 성당 부지 500여 평을 추가 매입하여 80평의 콘크리트 성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 340번지에 500평의 교회 부지를 마련, 1938년 함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분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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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개설된 까리따스 수녀회 분원 건물
 

1958년 2월 12일 산포면 덕례리에 공소 건물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으며, 이듬해 7월 13일 나주시 청동 81번지에 3,120평의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61년 3월 성당을 증축하였고, 1970년 5월 헨리 대주교의 후원으로 ‘현해 도서관’을 개관하였으며, 1971년 5월 강당을 신축하고 성당 조경 공사를 하였다. 또한 가톨릭 구제회의 원조로 공동 하수도 공사를 하고, 가난한 교우 12세대에 돈사(豚舍) 12동을 만들어 주었으며, 농수로 공사를 보조하였다.
그 해 12월 5일 남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고, 1974년 5월 사제관을 보수하고 성당 앞 보도 블록 공사를 하였으며, 1982년 12월 사제관을 신축하고, 1984년 12월 성당 이층의 칸막이 공사를 하였다. 이천수(李淺水) 신부 재임 중 무학당 성지 개발을 추진하였고, 1994년 말부터 계획된 교육관(무학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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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경당 앞마당, 나주 초등학교 내에서 발굴된 무학당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을 나주 성당으로 옮겨와 만든 순교터 무학당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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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구내에 빈무덤 형태로 건립한 나주 무학당 순교자 기념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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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 입구에 서 있는 60톤의 거석은 '석침사'(石針死)를 당한 무학당 순교자들의 용맹을, 사방이 막혀 캄캄한 경당 내부는 순교자들의 고난을, 관 모양의 제대는 순교자들의 장엄한 죽음을, 경당 안쪽 천장이 없는 회랑은 순교자들의 부활과 영광을 상징한다. 또 나주 초등학교에서 무학당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 중 10개의 돌을 2001년 성당으로 옮겨와 그 위에다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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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통 가운데서도 오로지 천주님과 천상의 삶만을 너무나 그리워했기에 천신과 성인들이 순교자들을 모시러 오는 꿈을 죽음 직전에 세 분이 함께 꾸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다른 순교자들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점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세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최성화(안드레아)와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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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 언덕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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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휴전 후 유치원을 설립하고, 이듬해 4월에는 영산포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다.
그리고 김창현(金昌鉉) 신부 재임 중 남평에 공소 건물과 부지 1,000평을 매입하고 전교사를 파견하였으며, 나주읍 대호리에 665평의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56년 까리따스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고, 1958년 2월 12일 산포면 덕례리에 공소 건물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으며, 이듬해 7월 13일 나주시 청동 81번지에 3,120평의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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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왼쪽 언덕 위에는 고풍스런 단층 적벽돌 건물 하나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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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7월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인 사제관을 수리해 현 대주교 기념관으로 개관.

 

바로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은 이른시간이라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어서 유품들은 둘러보지 못했다.

1934년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로 원래 사제관이었으나 2002년부터 대대적으로 수리해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는 본당은 전국에서 서울 중림동약현 본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 성당, 원주 용소막 성당 등 몇 안 된다.
이처럼 나주 본당이 초대 주임신부 기념관을 운영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곳에 전시된 수십 점의 하롤드 대주교 유품들 또한 예사롭게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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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앞의 현 하놀드 대주교 흉상
 

일제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1935년, 나주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미국인 하롤드 대주교는 이곳에서 7년간 사목하면서 선교는 물론 성당 안에 해성학교를 설립,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우리말,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에는 대주교가 본당 초대주임 시절에 쓰던 타자기를 비롯해 기도서, 십자가, 성합, 제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쏟았던 하롤드 대주교의 땀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유품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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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롤드 대주교 기념관 ㅈ너경과 흉상만 둘러본 후 맞은편에 있는 2011년 나주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한 순교자 묘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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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1839년)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베드로)와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 유치성(안드레아) · 유문보(바오로) 순교자들의 묘원이다. 묘원 가까이 세 분을 현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당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무덤' 형태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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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성당(나주 순교자 기념경당)을 순례를 마치고, 사무실앞 벽에 있는 순례확인 스템프를 찍고 세번째 순례지 노안성당으로 페달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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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량마을에 도착하니 대동계 100년사지발행기념비가 나타난다. 이 기념비를 보면 이 동네가 예사동네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전인 기축옥사로 인해 1589년(선조 22) 정여립이 만든 단체가 대동계이다. 정여립은 선조(宣祖)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쫓겨난 뒤 용감하고 힘이 있는 자들과 노비를 모아 계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대동계이다. 매월 15일 계원들이 모여 무술을 연마하고 술과 음식을 들었다. 1587년 전주부윤(全州府尹)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명성을 높였으며, 이를 계기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확대하였으나 1589년 대동계가 모반을 계획했다는 한응인(韓應寅, 1554~1614)·박충간(朴忠侃, ?~1601) 등의 고변이 조정에 접수되어, 정여립은 도망하다가 자살하였으며, 나머지 일당들도 잡혀 죽었다. 이후 400년이상을 맥을 이어온 대동계가 이 마을에서는 100여년 이상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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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면 양천리(老安面 良川里) 계량마을은 마을 입구에 성모상이 서 있고, 동산에는 성가정 동상이 있어 ‘성모고을’로도 불리는 천주교 교우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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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구성된 종탑 부분이 이채로운 노안 성당. 1908년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1894년 서울에 거주하던 정락(鄭洛, 요한)이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다가 함평군 나산면에 정착하여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나산면과 금성산(錦城山)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주민들이 이 한약방을 왕래하면서 양천리에 천주교가 알려지게 되었다.
정락은 약 봉지에 ‘천주경’과 성모경‘을 써 주며 약을 복용할 때마다 외우라 하였고, 그 약을 복용하여 병을 고친 몇 사람이 정락에게서 교리 서적을 얻어 공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양천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이진서(李震緖)가 정락을 만나본 후 친척인 이민숙(李珉淑), 이화서(李化緖)와 함께 교리를 공부하여 1900년 무안 우적동 사내에서 요양 중이던 이내수(李?秀,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계량(桂良) 공소가 시작되었고, 1903년부터는 목포(현 목포 산정동) 본당의 드예(A. Deshayes, 曺有道) 신부가 왕래하며 전교하였다. 1904년 4월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우적동에 부임한 투르뇌(V. Tourneux) 빅톨 신부는 우적동이 외교인 마을에 위치하여 본당 설립지로는 알맞지 않다고 여겨 계량의 신자들을 나주로 이주시켜 나주읍에 본당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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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계량 본당으로 설립된 나주 지역 최초의 성당,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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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 성당은 1927년 지어진 건물을 토대로 여러 차례 증개축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계량의 신자들은 이주를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나주읍에는 신자가 전혀 없었으므로 나주읍과 계량에서 각 7km 거리인 노안면 용산리 남산에 성당 부지를 마련하였다. 남산을 본당 설립지로 정한 것은 옥동 · 나리매 · 인용 · 상용 · 탑정리 등 여러 공소와의 거리가 가깝고, 남산을 중심으로 약 450호가 인근 40여 마을에 산재해 있었으므로 전교에 효과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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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 모습, 제대 좌우에는 1957년 증축한 날개 공간이 있어서 십자가형 평면구조다. 일자형 평면에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제대 좌우를 증축해 라틴 십자형으로 변경한 성당 내부.
 

공간 분할이 없던 일자형에서 공간이 나뉜 십자형으로 바뀌었고, 종탑뿐이던 외관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해 아치무늬가 더해졌다. 특히 종탑부, 창틀, 성당 출입문 등 모두 각기 다른 아치무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건축 재료도 자연석과 화강석 등 다양하게 사용했다.

성당 내부는 강당 모양으로 트여 있으며 마룻바닥이다. 벽면은 같은 형태의 창을 규칙적으로 두어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지루함을 해소해 주고 있다. 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참행복 선언’(마태 5장)을 주제로 1985년에 제작 · 설치된 유리화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마당에는 성모 동굴과 특이한 모습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각상이 있고, 아름드리 사철나무와 은행나무, 벚나무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1906년 8월 남산에 4,545평의 부지를 매입한 투르뇌 신부는 이듬해 6월 사내에서 남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매매 계약이 끝난 후 토지의 전 소유주가 묘를 이장하기 위해 무덤을 팠는데 140여 구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자 그 땅을 명당이라 생각하고 교회와의 계약을 파기하였다. 게다가 부락의 유림들이 남산에 천주교가 정착되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므로 투르뇌 신부는 남산을 포기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 무렵 영광 법성에서 한 부자가 교회를 위해 큰 집을 한 채 희사하여 투르뇌 신부는 법성으로 숙소를 옮기고 본당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희사 받은 집이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다시 계량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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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마당에 설치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각상.

 

사내와 법성에 본당을 설립하지 못한 투르뇌 신부는 1908년 계량 공소를 ‘계량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1910년 9월 카닥스(J. Cadars, 姜達淳) 요셉 신부는 3,000평의 성당 부지와 수천 평의 임야를 매입하고 40평 규모의 십자형 초가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어 벽돌을 직접 찍어 2층 양옥의 사제관을 신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소집 명령을 받아 1914년 프랑스로 귀국하고 말았다. 1919년 카닥스 신부가 돌아올 때까지 목포 본당의 타케(E. Taquet, 嚴宅基) 에밀 신부가 사목을 맡아보았다.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 재임 중인 1927년 성탄 때 벽돌조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 · 준공하였다.
1933년 광주 북동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고, 1935년 5월 나주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키면서 본당 명칭을 ‘계량 본당’에서 ‘노안 본당’으로 변경하였다. 1936년 6월에 부임한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는 수천 평의 논밭을 매입하고 학교 건물 두 동을 신축하여 4년제 보통학교인 ‘신성 학술 강습원’을 개설, 지방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4년 이민두(李敏斗) 타대오 신부는 농촌 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유치원을 설립하여 어린이 조기 교육에도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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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부터 일기 시작한 공업화로 이농 현상이 촉진되자 한때 4,000여 명을 헤아리던 노안 본당의 신자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교적은 노안 본당에 있었지만 고향을 떠난 수많은 신자들로 1981년 6월 모리세이(Michael Morrissey, 모) 미카엘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노안 본당은 8개월 동안 본당 신부 공석 본당으로 남게 되었다. 1982년 2월, 20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길웅(姜吉雄) 요한 신부는 그 해 부활 축일을 기해 본당 및 공소의 신자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운동회를 개최하여 본당 활성화에 주력하였다.

 

성당 아래 성 골롬반 중학교가 있었으나 이농현상으로 1984년 폐교된 후 이듬해부터 청소년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984년 3월 까리따스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고, 4월에는 현애원 공소에 성모 영보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였으며, 1985년 5월에는 폐교된 골롬반 중학교의 건물과 대지를 활용하여 ‘청소년 교육장’을 개장하였다.
교회 단체뿐만 아니라 일반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이 교육장의 1994년 한 해 동안의 활용 현황을 살펴보면 유치부, 초등부, 중고등부, 대학부, 일반부 등 모두 179팀(14,523명)이었고, 그중 54개 천주교 단체(5,274)가 이곳을 이용하였다.
본당 자체 피정이나 교육 프로그램이 없고 시설이 빈약하여, 활용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본당의 인적 · 재정적 형편으로는 교육장의 시설 보완이나 개발이 어려운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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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마당에 건립된 사제관 겸 사무실 건물.

성당의 붉은색 때문에 생긴 6.25 전쟁 관련 일화가 있다.
영광 불갑사에 본부를 두고 있던 빨치산들이 노안 성당을 불 지르려고 계량마을로 들어섰는데 언덕 위에 있는 성당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병력들이 먼저와 성당에 불을 질렀구나.’ 생각하고 되돌아갔다.
놀랍게도 이런 일이 세 차례나 있었다. 건물 전체가 붉은 노안 성당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빨치산들이 멀리서 성당이 불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제5대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대주교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기고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08년 나주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된 노안 성당은 1927년에 지어진 건물을 토대로 계속해서 증 · 개축되어 왔다. 초대 주임인 카닥스 신부는 40평 규모의 십자형 초가 성당을 마련하고 직접 벽돌을 찍어 2층 양옥 사제관 건축을 시작했다. 교세가 급속히 성장하자 1926년 부임한 박재수 신부는 벽돌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해 이듬해 완공했다. 이때 완공된 성당은 ‘일자 강당형(마루형)’ 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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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 성당은 나주 지역 및 광주대교구 복음화의 모태라는 역사적 의의와 함께 시대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 양식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9월 13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노안 성당은 화려하기보다는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 지역적 여건에 따라 최소 공간에 최대 기능을 부여하며 변화를 거듭해온 교회 건축물이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노안 성당은 2008년 11월 19일 감사미사와 기념식을 갖고, 나주 지역 복음화의 산실로 거듭날 것을 다짐하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당 보수 작업 등을 진행했다. 2009년 10월 10일에는 성 골롬반 중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골사모’(골롬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성당 입구에 봉헌한 성가정상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11년 4월 25일 성당 옆에 은퇴 주교를 위한 새 주교관인 ‘베타니아의 집’을 지어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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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깊은 노안 성당을 나와 스산한 청소년 수련장을 뒤로 하고 우리나라의 농촌의 현실을 세삼 실감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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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줄달음쳐서 함평 나산면에 이르러 하나로마트에 들러 가볍게 김밥과 순대 등으로 이른 점심을 대용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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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성당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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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통행이 별로 없어서 당초 계획했던 제방뚝길을 이용하지 않고 825번 도로를 이용 빠르게 함평읍내로 들어가 함평성당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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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2년 완공된 현대 성당 건축의 시초 함평성당,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7호(구 성당) 건물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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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내판 옆에는 함평 천주교회 역사가 사진과 함께 자세히 안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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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8일 나주 본당에서 분리 ·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성모 승천.

 

1930년 이계윤(바오로)과 최말녀(마르타) 부부가 목포에서 함평으로 이주해 오자, 계량(현 노안) 본당의 5대 주임인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는 이들을 위해 1931년 판공 때 함평의 기산 회관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후 내교리에 사는 조 마리오 집에서 주일 미사를 가끔 봉헌하였다.
이어 1936년경부터는 나주 본당의 헨리(H. Henry, 玄海) 신부와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가 번갈아 와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1940년경부터는 신자들이 나주 본당이나 인근 공소의 미사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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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국 선교 200주년 기념성당으로 건립된 새 성당 외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에 있던 외국인 신부들이 일제에 의해 감금 내지는 추방을 당하자, 나주 본당의 김재석 신부가 함평을 포함하여 목포와 영광 등지를 관리하게 되었다. 1943년 삼거리터를 매입하여 함평에 성당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병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영광으로 이임되자, 이후 함평 공소 신자들은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제2대 광주교구장인 와키다 아사고로(脇田淺五郞) 토마스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5년 12월 8일에 함평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창현 신부는 1949년 여름에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950년 5월 7일에 상량식을 거행한 뒤 8월 15일에 봉헌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성당은 10월에 후퇴하던 공산군이 불을 지르면서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951년 12월에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개축을 위한 지원을 약속하여 1952년 4월에 개축 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 13일에 헨리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성당을 마련한 후 본당에서 1953년에 영광 · 법성포 · 나산 · 학다리 · 염산 · 기동 · 무안 공소를 설립하는 등 공소 사목에 진력하였고, 1954년 4월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분원을 설치하였으며, 8월에는 성모유치원을 개원하여 지역 사회의 아동 교육에도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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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 오른쪽 잔디광장에는 성모자상과 야외제대가 설치되어 있다.
 

2대 주임 모란(T. Moran, 안) 토마스 신부는 1954년 11월 4일에 본당 관할의 무안 공소를 본당으로 분리시켰으며, 장년(1956. 2) · 문장(1957. 4) · 신광(1957. 5) · 손불(1957. 7) 공소를 새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3대 주임 로한(P. Lohan, 한) 파트리치오 신부는 1963년에 성체회와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본당에 설립하였고, 4대 주임 카터(J. Cotter, 주) 예레미야 신부는 1964년 5월 20일부터 1965년 8월 28일까지 가톨릭 구제회 함평 본당 노동자 식당을 운영하여 1일 평균 700여 명에게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였으며, 1965년 12월 15일에는 영광 공소를 본당으로 분리시켰다(법성포 · 염산 공소 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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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주임 강길웅(姜吉雄) 요한 신부는 1990년 8월과 9월에 성당과 사제관의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으며, 1993년 2월 7일에는 나산 공소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2대 주임 정병옥(鄭炳玉) 바오로 신부는 부임과 동시에 학다리 공소를 준본당으로 승격시켰고(신계 공소 이관), 1997년 6월 28일에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당은 1998년 4월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IMF의 여파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999년 4월 20일에 교육관 · 사제관 · 수녀원의 축복식을 먼저 거행하고 이어 2000년 4월 19일에야 비로소 공사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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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 앞에 세워진 예수성심상

 

한편 2000년 2월 광주대교구에서는 공소 사목과 농민 사목 활성화를 위해 ‘공소 공동 사목’이라는 새로운 사목 형태를 도입하여 우선 함평 본당 관할인 나산 · 문장 · 손불 · 신광 · 기동 5개 공소를 공소 사목 특구로 정하고, 3명의 신부를 파견하여 공소 실정에 맞는 사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대 주임 박길년(朴吉年) 마르코 신부 재임기인 2004년 12월 31일에는 옛날 성당이 문화재청으로부터 한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등록되었고, 2005년 6월 15일에는 함평군 3개 본당(함평 · 하상 · 학다리)이 제1회 합동 야외 미사를 거행하여 지역 본당 신자들과의 친교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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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국 선교 200주년 기념성당으로 건립된 새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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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당 현관 앞 계단 우측에 세워진 성 김대건 신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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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성당 마당에서 본 옛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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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성당을 뒤로하고 이 고장에 온김에 나비엑스포공원을 잠시 둘러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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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인공구조물로 제작된 나무에 작은 화분들을 엮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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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곤충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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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이면 나비를 보기 위해 자연생태관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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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변공원길로 진입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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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천 나비의 꿈 다리를 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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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천 자전거길을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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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꾸어진 꽃길을 달리면서 힐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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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역에 일찍 도착하여 예매했던 17:20 무궁화호 표를 반납하고 16:37분 무궁화호에 접이식 자전거를 휴대하고 탑승하여 목포역으로 출발한다.

 

<45차 순례 후기 2편이 다음 페이지에서 계속 ...>

 

※ 상단 첨부 : 45차_나주무학당_나주_노안_함평_산정동_레지오마리애_170907.gpx

※ 경로 지도 보기 : https://www.komoot.com/tour/279581112?ref=w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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