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한 유택지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홍유한 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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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설명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의 수덕생활에 정진하며
 지번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322-5 
 도로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로 239-6
 전화번호 (054)636-9100
 팩스번호 (054)636-9103
 홈페이지
 관련기관 하망동 성당    (054)636-9102
 관련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로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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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한 선생 유택지의 한국 천주교회 최초 수덕자 풍산 홍유한 선생 유적비.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1784년, 이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한 선각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농은 홍유한(隴隱 洪儒漢, 1726-1785년)이다. 비록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는 바로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하고 바로 이곳에서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간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했다.
 
본래 구구리는 순흥부 동원면(順興府 東園面) 지역으로 마을 뒷산에 무학봉이 있는데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전(詩傳)에 있는 옛 뜻을 따라 ‘구고’라 하였다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현리, 이목리와 등영리, 상암리 각 일부를 병합해 ‘구구리’라 하여 영주군 단산면에 편입되었다.
 
홍유한은 본관이 안동현의 풍기(豊基)인 풍산 홍씨(豊山 洪氏) 명문가의 16대손으로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8세경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한 신동으로 전해진다. 그의 조부모는 손자의 장래를 위해 고향인 충청도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고 16세 때인 1742년 그는 당시 유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녹암 권일신, 복암 이기양 등과 함께 수학했다.
 
홍유한 선생 유택지 대문 가운데에는 그의 조부가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걸려 있다.1750년경 성호 이익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그의 제자들도 이 신학문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게 됐고 이때 그는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성호 이익은 서학을 받아들임에 있어 피상적인 보유론적 입장에 머물렀고 함께 수학하던 순암 안정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고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홍유한은 유교와 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여기에서 발견하고 1757년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775년까지 18년간 홀로 신앙을 연마했다. 그러던 중 다시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고을 구고리(현재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로 옮겨 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냈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처음 깨달은 후부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해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나아가 욕정을 금하여 30세 이후는 정절(貞節)의 덕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천진암 강학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는 서학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최초의 수덕자로 기록되었다.
 
유택지의 유적비와 대문.홍유한의 신앙은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져 13명이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하였다. 그 중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고, 홍낙민 루카 · 강완숙 골룸바 · 홍필주 필립보 · 홍재영 프로타시오 · 심조이 바르바라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현재 구구리의 하이목 마을에 있는 홍유한 유택지에는 당시 그가 사용하던 대문이 남아 있는데, 그 위에 경종 4년(1724년)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洪重明)이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순교자 권일신과 서신 왕래하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현재는 천진암의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동교구는 홍유한 선생의 신앙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 27일 교구 설정 25주년과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맞아 효자문 안마당에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유적비 앞면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풍산 홍공 유한 선생 유적지’(韓國天主敎會最初修德者 豊山洪公儒漢先生遺跡址)라 기록하고, 옆과 뒷면에는 그의 생애를 상술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21일)]

유택지의 유적비와 대문.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1784년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수덕생활을 한 선각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농은 홍유한입니다.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힙니다.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한 그는 이곳 구구리에서 1775년부터 10년간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서학을 연구하던 중 진리를 발견한 홍유한은 1757년 서울을 떠나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8년간 홀로 신앙을 연마했습니다. 그러던 중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고을 구고리(현 구구리)로 옮겨 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냈습니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습니다.

홍유한의 유택지에는 경종 4년(1724년) 그의 조부인 홍중명이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안동교구는 홍유한 선생의 신앙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 27일 교구 설정 25주년과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맞아 효자문 안마당에 유적비를 건립했습니다. 유적비 앞면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풍산 홍공 유한 선생 유적지’라 기록하고, 옆과 뒷면에는 그의 생애를 상술했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10:30  교중미사, 미사 일정은 하망동 성당 것입니다.
20:00  동절기 19:30
평일미사 06:20  
20:00  동절기 19:30
10:00  
20:00  동절기 19:30
10:00  
15:00  어린이미사
19:30  학생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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