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여산 동헌(백지사터)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익산 여산 동헌(백지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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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설명 창호지에 달라붙은 숨결
 지번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445-2(동헌) 
 도로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동헌)
 전화번호 (063)838-8761
 팩스번호 (063)838-8764
 홈페이지
 관련기관 여산 성당    
 관련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영전길 14
 문화정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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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된 여산 동헌.전주 교구의 ‘제2 성지’라 불리는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해가 한창이던 조선 교구가 독립을 한 것은 1831년 9월 9일, 그 안에서도 조선인에 의한 자치가 최초로 실시된 곳은 1931년 전주 교구였다. 조선 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맞아 전주 교구를 방인 자치 교구로 선물 받았던 것이다. 이는 전주 지방의 신앙이 지닌 깊은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호남 최대의 신앙 산맥을 이루는 것은 대둔산과 천호산을 기점으로 한다. 일찍이 복음은 이 두 산의 줄기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에 전해져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골짜기마다 형성됐다.
 
백지사형을 당하는 순교자의 얼굴 모습이 화강암으로 조각되어 있다.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일기”(致命日記) 등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5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백지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지금도 동헌 앞마당에 백지사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처형장에서는 얼굴에 달라붙은 백지로 인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천국 영복을 그리며 천주 신앙을 고백한 선조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여산이 품고 있는 성지는 동헌과 옥터, 여산 숲정이와 배다리, 뒷말 치명터 등 곳곳에 널려 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지사 터 순교성지 전경. 십자가와 백지사형 조각 주위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바로 뒤에 여산 동헌이 자리하고 있다.그중에서도 동헌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최근까지 마을 경로당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헌 자리 주위에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 있어 유적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비(不忘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조선 말기의 건조물로 추정되는 여산 동헌은 1980년 3월 8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고, 맞은편 여산 초등학교 종합 학습장으로 변해 버린 여산 옥터는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장날이 되면 공개 처형장으로 변했던 ‘배다리’와 ‘뒷말 치명터’는 하사관 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버려졌고 뒷말 치명터에서는 신자들을 정자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다.
 
여산 동헌과 여산 숲정이 사이에 위치한 여산 성당은 동헌 바로 아래 부지를 매입하여 백지사터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백지사터에는 순교성지 기념비와 백지사형 당하는 얼굴 모습이 화강암으로 조각되어 있고, 예수성심상과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되어 박해 당시의 처절함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다.

예수성심상 쪽에서 바라본 순교성지 백지사 터 전경. 
하지만 여산을 찾는 순례자들은 숲정이만 잠시 순례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동헌은 평소에 문화재 관리를 위해 문이 잠겨 있고, 옥터는 안내판이나 표지석 하나 없어 누가 직접 설명해 주지 않으면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산 성당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순례자를 위한 성지 안내와 편의시설 확충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8월 7일)]
 
 
여산이 품고 있는 순교 성지들
 
여산 숲정이 성지 중앙광장의 피에타상.여산 숲정이 성지  여산 숲정이는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전주교구 제2의 성지입니다. 지금은 논과 밭 가장자리가 되었습니다만 박해 당시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숲정이 성지로 유래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10분의 시신은 지금 고산 천호 성지에 묻혀 계십니다.
 
이곳 숲정이터에서 우리 순교 조상들이 순교하기 전에 옥중에 갇혀 있는 동안 모진 형벌과 혹독한 굶주림의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사형이 집행된 때는 늦가을이었는데,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칼을 쓴 죄인들은 형장인 숲정이 풀밭에 와서야 칼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칼을 풀어놓자마자 옥중에서 얼마나 굶주렸던지 이곳 숲정이 풀밭의 풀을 짐승처럼 뜯어먹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렇게 풀을 뜯어먹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굶주림이었습니다.
 
순교자 김성첨은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기를 "우리가 이때를 기다려왔으니 천당진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 하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순교성지 백지사터 표지석.동헌 백지사터 성지  동헌은 부사의 행정 집무실이고 백지사터는 부사의 집터. 현재 동헌은 경로당으로 쓰고 있고, 백지사터는 우리 교회에서 매입하여 순교성지로 보존해 오고 있습니다.
 
동헌 아래 마당에서는 백지사형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백지사형이란 "동헌 마당에 나무 말뚝을 박고 교우를 평좌시킨 다음 말뚝에 묶은 후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품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키는 사형 방법이었습니다"(일명 도모지사형이라고도 함).
 
백지사형은 얼굴에 종이를 여러겹 바르니 죽고 사는 것이 캄캄하다는 뜻의 도모지사형(途貌紙死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대 표기 도무지도 여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렇게 동헌 아랫마당 백지사 터에서는 신도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발라서 질식시키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전하는 목격담에 의하면 교우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으니 질식하여 죽는데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기금터(연못과 누각이 있어 원님이 놀이하던 곳, 지금은 연못자리에 집이 있음, 현재 : 주차장 옆)
 
이곳에서는 화살로 쏘아 맞히는 사형법을 썼으며 여자들은 연못에 넣어서 죽였다고 합니다.
 
옥터(현재 여산초등학교)  이곳에서 옥사를 했고, 옥에서도 신덕 높은 교우들은 배교하려는 교우들을 권면하여 참회시키는 기도장소였다고 합니다.
 
배다리 및 뒷말 치명터(우시장, 현재 군인 아파트 앞 정자나무 있는 곳과 시장 안)
 
배다리와 미나리꽝 터.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신도들이 야음을 틈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건져내어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보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배가 하도 고파서 솜을 다 뽑아 먹었던 것입니다.
 
뒷말 치명터에서는 장날을(현 1, 6일장) 골라 신자들을 정자나무 가지를 늘어 뜨려 목에 건 다음 가지를 놓아서 교우들을 목졸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그 당시 신도들의 처형 일을 장날로 삼은 것은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것을 장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곳 여산 숲정이에서 치명한 이들 가운데 10명의 시신은 신도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자루에 담아서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안장시켰다고 합니다. 천호 성지에 가보시면 성인들 묘소 아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이곳 여산에서 순교한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곳 여산 성지와 천호 성지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이와 같이 여산의 성지는 숲정이, 동헌과 기금터. 옥터. 뒷말 치명터와 배다리 등 곳곳에 널려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곳 여산 성당은 이들 순교자를 기념하여 그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 1959년 1월 17일에 세워졌습니다. [출처 : 한기호 신부, 여산 성당 홈페이지]
 
여산 숲정이 성지 전경. 광장을 중심으로 왼쪽에 피에타상, 오른쪽에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유곡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고,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습니다.

“치명일기” 등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5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백지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조선 말기의 건조물로 추정되는 여산 동헌은 1980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고, 맞은편 여산 초등학교 내에 있던 감옥은 흔적도 없습니다. 여산 동헌과 여산 숲정이 사이에 위치한 여산 성당은 동헌 바로 아래 부지를 매입하여 백지사터 성지를 조성했습니다. 백지사터 성지에는 순교성지 기념비와 십자가의 길, 백지사형 당하는 얼굴 조각 등이 있어 박해 당시의 처절함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10:30  교중미사, 미사 일정은 여산 성당 것입니다.
평일미사 06:00  
19:30  19:00(동절기)
10:00  
19:30  19:00(동절기)
10:00  
19:30  19:00(동절기)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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