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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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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39-09-12관련성지: 옥사최경환은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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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라우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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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제2대조선교구장주교순교일: 1839-09-21관련성지: 새남터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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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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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39-09-21관련성지: 새남터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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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탕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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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39-09-21관련성지: 새남터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가 된 정(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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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길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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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 역관순교일: 1839-09-22관련성지: 서소문 밖순교 당시 정3품 당상 역관(當上譯官)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10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하였으나 진리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구해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천주교 진리를 터득하고 곧 입교하였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유진길은 북경 교회와 연락을 담당하며 8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 조신철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였고 그 결과 유방제(劉方濟) 신부, 나(모방) 신부, 정(샤스탕)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이 입국하게 되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9월 22일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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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계임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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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부인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은 시누이 이매임(李梅任)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남명혁(南明赫)과 이광헌(李光獻)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金成任),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허계임은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여러 차례의 형문을 당하였으나 다 이겨 내고, 9월 26일 67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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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관 세바스티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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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趙曾伊)와 혼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그는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갔다가 30년 만인 1832년에 풀려 나와 이천(利川)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다. 그 뒤 상경하여 처가의 인척인 정하상(丁夏祥)의 신부 영입 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입국시키고, 그에게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뒤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처가가 있는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으나 9월 16일에 체포되었다. 김제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유진길(劉進吉), 정하상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6일 남이관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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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율리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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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궁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동정 순교자인 김 율리에타는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하였으나,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 동안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어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품삯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기해박해가 있던 1839년 7월에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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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협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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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궁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동정 순교자인 전경협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 뒤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朴喜順)을 따라 입교하였으며, 박희순이 신앙 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오게 되자 그도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의 습격으로 숨어 있던 박희순, 박 큰아기 등과 함께 체포된 전경협은 궁녀였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참아 냈다. 이 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오빠는 관리를 매수하여 누이를 독살시키려 하였으나 전경협은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5개월의 옥살이를 한 뒤,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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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철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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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마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은 강원도 회양(淮陽)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출가하여 한때 스님이 되었으나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으며, 30세 쯤에 유진길(劉進吉), 정하상(丁夏祥) 등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북경에서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키는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은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6월 어느날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가 자수하였다. 신문 중 그는 처가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고, 형리들은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그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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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준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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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아버지로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으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하여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 베드로(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순성(金順性) 일당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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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손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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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과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서울에서 태어난 박봉손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에는 여러 교우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하였으나 박봉손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초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박봉손은 형관에게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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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금주 페르페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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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과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홍금주는 10세 때 입교하였고, 15세 때 외교인과 혼인한 뒤 냉담하였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뒤 교우들의 권면으로 신앙을 다시 찾고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 하고 또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홍금주는 최 필립보라는 교우의 집에 있다가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살이 중 서너 차례 염병에 걸려 고생하였으나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어 갇힌 교우들은 홍금주를 친누이처럼 생각하였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던 홍금주는 옥살이 6개월 만인 9월 26일 36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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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임 골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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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동정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동정 순교자 김효임은 서울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뒤 전 가족이 입교하고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김효임은 두 여동생과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1839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자매는 포청에서 이른바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 벗긴 채 남자 죄수 방에 넣어졌으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남자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김효임은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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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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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과부순교일: 1839-07-20관련성지: 옥사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구였다. 그래서 ‘꼽추 루치아’로 불렸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병자들을 돌보며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나이가 많아(71세) 형벌은 받지 않았으나 온갖 교활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 루치아는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마침내 9월 어느 날 포도청에서 기력이 다해 옥에서 죽음으로써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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