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27. 초기 천주교인의 제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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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27. 초기 천주교인의 제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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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천주교인, 구베아 주교 제사 금지령 이전부터 제사에 거부감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7. 초기 천주교인의 제사관

2020.11.22발행 [15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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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상의 신주를 태워 없애고 제사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사진은 첫 순교터 전주교구 전동성당에 설립된 두 순교자 기념 동상.



권철신 집안의 희한한 상례(喪禮)

1790년 구베아 주교가 일체의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목교서를 윤유일 편에 보내오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일시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양반 계층 지도급 신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이 와중에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태워 없애고 제사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1791년 진산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는 순식간에 패륜 집단으로 내몰렸다.

그렇다면 진산 사건 이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정약용도 이승훈도 진산 사건 이후 완전히 천주교에서 손을 뗐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 이전에는 정말 천주교가 제사를 금지하는 줄 몰랐고, 알고 난 뒤 천주교를 떠났을까? 정말 그랬을까?

여기에는 살펴야 할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먼저 「송담유록」에 묘한 기록이 나온다. “권철신이 그 부친의 장례를 치를 때, 아녀자들이 모두 성장(盛粧)을 하고 화려한 복장을 입은 채로 면화솜으로 망자의 코를 막을 때에 나와 영결하였다. 손님들이 가서 조문하자, 맏아들만 홀로 조문을 받고 그 나머지 형제는 조문을 받지 않았다. 손님을 접대하면서 권철신이 말했다. ‘우리 집안의 상례(喪禮)가 어떠하오?’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권철신의 부친 권암(權巖, 1716∼1780)이 세상을 떴을 때, 권철신 집안의 이상한 장례 예법에 대한 기술이다. 권암의 몰년은 족보에 나오지 않고, 위 기록에도 연대가 없다. 다만 1781년 12월 3일에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간찰에 “하생고자(下生孤子)인 아우 권제신”이라고 한 표현이 있다. 1781년 당시 이미 권암이 사망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자료는 신택권(申宅權, 1722∼1801)의 「저암만고(樗庵漫稿)」 상권에 실린 「권맹용시암만(權孟容尸庵挽)」이란 시이다. 1780년 9월에 지은 이 시의 7, 8구에 “9월이라 된서리에 지기(知己)들 눈물지니, 이승에서 어이해 시암 다시 만나볼꼬(九月嚴霜知己淚, 此生那復遇尸庵)”라 한 것이 그의 사망 시기에 대한 가장 분명한 기술이다. 그는 1780년 9월에 세상을 떴다.

이때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로 인해 조상의 제사 금지 소식이 조선에 처음 전해진 1790년보다 10년 전이고, 명례방 집회 사건이 있기 5년 전이다. 권철신 집안의 상례가 이때 이미 이와 같았다는 것은 대단히 놀랍다. 부친상에 여자들은 소복을 입지 않고 오히려 단장을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차려입고 있었다. 문상도 5형제 중 장남인 권철신만 조문을 받았다. 이같은 해괴한 장례를 진행하면서 정작 그가 우리 집안의 상례가 어떠냐고 자랑하듯 말한 것은 말 그대로 괴이한 일이었다.

이 말은 척사파들이 권철신을 천주교 신자로 몰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1780년, 조선 교회의 공식 출범 훨씬 전에 그가 이미 상례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는 1791년 진산 사건 당시 윤지충이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좋은 곳에 가서 기쁜데 왜 곡을 하느냐고 되물어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는 일화와 맞물려 있다.

「송담유록」에서는 이때 일을 “경술년(1790) 여름에 윤지충이 그 어머니 권씨의 상을 만났는데, 효건(孝巾)만 쓰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게다가 조문조차 받지 않았다. 친척과 벗 중에 성복(成服)을 하고 가는 자를 보고도 일체 조문을 받지 않았고, 장례도 예법대로 하지 않았다. 우제(虞祭)도 행하지 않고 궤연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한다.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상서로운 기운이 허공에 뻗고,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그는 서학을 하여 도를 닦은 징험으로 여겼다. 그 전에 또 신주를 태워 없앴으니, 그 말이 이로 인해 크게 퍼졌다”고 적고 있다. 앞서 본 권철신 집안의 상례와 분위기가 사뭇 비슷하다.



백지 답안지 제출 소동


「송담유록」의 기록을 좀더 따라가 보자. “이승훈과 정약용의 무리가 감제(柑製)에 들어가니, 임금께서 내리신 제목에 제사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 둘 다 백지를 내고 보이지 않았다. 이 또한 제사는 마귀가 먹는 것이고 제사가 무익하기 때문이었다.” 강세정은 글 끝에 강이원에게서 이 말을 들었다고 적었다. 강이원이 누구인가? 1787년 정미반회사건 당시 김석태의 집에서 정약용과 이승훈이 서학 공부를 할 당시 함께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일은 1787년 11월 17일에 제주에서 진상한 귤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눠주면서 치른 황감제(黃柑製)가 있던 날의 이야기다. 이날의 시험 제목은 ‘한나라 분유사(楡社)’에 관한 것이었다. 한고조는 분유(楡), 즉 느릅나무를 한나라 사직단의 신주목으로 정한 뒤, 해마다 봄 2월과 납월에 양과 돼지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시험은 이 고사를 가지고, 국가의 제사 전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문제였다. 문제를 받아든 이승훈과 정약용은 끝까지 한 자도 쓰지 않은 채 버티다가 백지 답안을 제출하고 나갔다. 제사란 마귀가 먹는 것이어서, 아무 쓸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일에 대해서는 1790년 11월 13일에 쓴 이기경의 「초토신 이기경 상소(草土臣李基慶上疏)」에 더 자세한 진술이 있다. “이때 마침 감제를 만나 시험장에 들어가니 함께 앉은 사람이 또 우리 셋이었습니다. 제목이 내걸렸는데 「한분유사」였습니다. 지금은 다 외울 수가 없지만 대개 제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승훈은 팔짱을 끼고는 묵묵히 앉아 한 구절도 짓지 않고 일부러 백지를 제출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괴이하게 여겨 묻자, 천주학에서는 천주 외에는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글을 짓기만 해도 또한 큰 죄가 된다고 하더군요. 하도 놀라고 당황해서 바로 그날 밤에 승훈과 함께 자면서 되풀이해 토론하여 배척했지만 끝내 돌이켜 깨닫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정약용을 경계시키려고 두 차례나 그의 집에 갔지만 모두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앞서 강세정은 강이원의 전언으로 이승훈과 정약용이 동시에 백지를 제출했다고 했고, 이기경은 정약용의 백지 답안에 대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기경은 정약용을 감싸 줄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제사에 관한 글이 시험 문제로 나왔다고 해서, 수험생이 아예 백지 답안을 내고 나왔다. 이것은 진산 사건이 일어나기 네 해 전의 일이었다.



이승훈의 공자묘 배알 거부

다시 두 해 뒤인 1789년, 이승훈이 평택 현감으로 내려가 공자의 사당에 배알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벌어진 소동을 살펴보겠다. 이 일이 공론화된 것은 1792년이지만, 이 일 자체가 일어난 것은 진산 사건 이전이다. 「송담유록」은 이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평택 고을 사람은 무릇 관장이 임지에 도착한 뒤 사흘 안에 몸소 성묘(聖廟)를 배알하는 것을 법례로 여겼다. 하지만 이승훈은 벼슬에 오른 뒤 10여 일이 지나도록 병을 핑계 대고 배알하지 않다가, 비가 새는 곳을 살펴보겠다며 나가서는 성인에게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도 않고, 그저 비 새는 곳만 살펴보고 돌아왔다. 고을에서 말이 시끄럽게 돈 뒤에도 성묘에 배알하지 않다가, 발송한 통문이 태학에 이르니, 태학의 전례가 봉심할 때에는 배알하는 예가 없었기에, 전례를 끌어와 초기(草記)함으로써 아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봉심할 때에 비록 배알을 하지 않더라도, 새로 출발해서 도임한 사흘 안에는 전례에 따라 배알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승훈은 도임한 뒤에도 애초부터 공경하여 배알한 일이 없었다.”

이승훈은 왜 평택 현감으로 내려가서 관례를 굳이 무시하고 공자의 사당에 예를 올리지 않았을까? 이를 우상 숭배로 여겨, 앞서 제사에 대한 글쓰기를 거부했던 것과 연장선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로 보아, 천주교 내부에서는 진산 사건 이전부터 제사에 대한 거부감이 공공연하게 있어 왔다.

안정복이 1785년에 쓴 「천학문답」 중 제30번째 질문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근래에 한 상사생(上舍生)이 석전(釋奠)에 참석하려 하자, 천주학을 하는 그의 벗이 말리면서 말했다. ‘무릇 형상을 꾸며놓고 제사를 올리는 것은 모두 마귀가 와서 먹는다. 어찌 공자의 귀신이 와서 흠향함이 있겠는가? 인가에서 제사 지내는 것도 또한 한가지다. 나의 경우 비록 풍속에 따라 이를 행함을 면치 못하나, 마음으로 그것이 망령된 줄을 아는지라,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묵묵히 천주께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뜻을 아뢴 뒤에야 이를 행하곤 한다. 예법에 어긋나고 가르침을 허무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올리는 절은 허배(虛拜)이다. 도덕률과 부딪치기 싫어서 하늘에 기도하여 양해를 구한 뒤에 절 올리는 시늉만 한다는 것이다. 안정복의 이 글은 이승훈이 평택에 내려가기 두 해 전에 쓴 글이다. 글 속에 나오는 상사생 또한 이승훈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1780년 권철신의 상례, 1787년 이승훈 정약용의 백지 답안 제출, 그리고 1789년의 공자 사당 배알 거부 등 세 사례를 살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1790년 이후 북경에서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사목 지침이 내려오고, 이후 진산 사건이 터지고 나서 제사 문제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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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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