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57. 명도회의 성격과 설립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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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57. 명도회의 성격과 설립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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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탄압에 맞서 1800년 4월 조직화된 신심 단체 첫 설립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7. 명도회의 성격과 설립 시점

2021.06.27발행 [16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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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한 정약종이 교리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 그림=탁희성 화백



중간 세포 차단책과 플랜 B

1795년 6월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신부는 전면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신부를 잡기 위해 1798년과 1799년 충청도 교회에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고, 밀정 조화진의 암약으로 충청도 교회는 궤멸 직전 상황에 몰렸다. 1800년 4월에는 양근 교회를 표적으로 한 탄압까지 시작되어, 핵심 인물들이 잇달아 검거되자, 1800년 5월에 정약종이 검거를 피해 급거 상경해야 했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1800년 당시의 주문모 신부는 국가의 지속적 탄압으로 와해 상태에 놓인 신자 조직의 재건과 강화가 절박했다. 하지만 신부는 손발이 꽁꽁 묶여, 지방 신자들은 신부의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세례는 어찌 받으며, 고해성사는 또 어찌하나?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 위해 18차례나 상경하고도, 양말 한번 신어보는 것 외에는 끝내 만나지도 못했던 신태보의 예만 보더라도, 당시 일반 신자가 신부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꽉 막힌 상황을 돌파할 타개책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체계적인 신자 관리뿐 아니라 조직 및 재무 관리도 절실했다. 모든 것이 비선(秘線)으로 움직여야 해서 어려움이 더 많았다. 1799년 충청도 교회의 예에서 보듯 그중 하나라도 검거망에 걸려들 경우, 전체 조직이 일거에 붕괴될 위험이 컸다.

감시의 눈길은 어디서고 번득이고 있었다. 신부는 밤중에도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플랜 B가 늘 필요했다. 실제로도 주문모 신부는 수없이 많은 검거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곤 했다. 강완숙의 집에 머무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고, 검거의 눈길이 미치지 않을 곳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떠돌았다. 중간 세포를 차단하는 장치의 마련이 절박했다.

교회는 교회대로 지방 조직의 활성화나, 사목 지침의 하달, 효율적 신자 관리를 위한 교리 교육, 신심 서적 보급 및 재정 확보를 위한 회계 관리 등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박해의 강도가 세질수록 교회는 여기에 맞는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만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명도회(明道會)의 설립은 국가의 탄압에 맞선 조선 교회의 절박한 대응책 중 하나였다. 명도회는 천주교의 도리를 밝히는 모임으로, 주문모 신부가 설립한 조선 교회 최초의 조직을 갖춘 신심 단체였다.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조선으로 건너오기 네 해 전인 1791년에 구베아 주교에 의해 막 도입된 단체였다. 명도회의 활동이 가져온 중국 교회 내부의 급속한 변화를 직접 보았던 주 신부는 이 단체가 중국 교회보다 조선 교회에 더 최적화된 모델임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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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800년 4월에 설립된 명도회

명도회의 설립에 대한 「황사영백서」의 기록은 이렇다. “경신년(1800) 4월에 명회(明會)가 보명(報名)한 뒤에 여러 교우가 신공(神工)을 부지런히 했다. 회 밖의 사람 또한 풍조에 따라 움직이며, 모두 남을 교화시키기에 힘썼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성대하게 교화로 향하여서, 날마다 하루가 달랐다. 부녀자가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어리석은 천한 사람이 3분의 1이었다. 사대부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어 따르는 자가 몹시 적었다.”

위 기록은 명도회의 첫 보명, 즉 최초의 회원 등록이 1800년 4월의 일이었다고 명시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비망기」에도 “주 신부는 1800년 음력 4월에 명도회를 설립하였다”고 분명하게 적어 놓았다. 이 최초의 보명 이후 신자들이 신공과 교화에 힘쓰게 되어, 1800년 가을과 겨울이 되었을 때는 그 성과가 자못 놀라웠다. 심지어 명도회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조차 이 흐름에 동조하여 일제히 기도 생활과 전교 활동에 열성을 띠게 되는 시너지 효과를 불러왔다. 당시 명도회 주요 회원의 3분의 2가 여성, 나머지 3분의 1은 신분이 낮은 일반 백성이었다고 한 점은 주목할만하다.

특별히 그해 가을과 겨울의 상황을 강조한 것은 1800년 6월 28일 정조의 돌연한 서거 이후, 반년에 걸친 국상(國喪) 중에 포교들의 기찰이 일체 중단되면서, 신앙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벽위편」에는 “1800년 6월, 임금께서 돌아가시자 옥사도 마침내 풀렸다. 새 임금이 어리신지라 정순대비께서 수렴청정을 하시는 반년 동안 다시 신칙하여 금함이 없자, 천주교도들은 마침내 아무 두려워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가을과 겨울 이후로는 기세가 배나 성해져서 곳곳에서 설법을 하고, 심지어 부녀자들이 새벽이고 저녁이고 등불을 밝힌 채 거리를 왕래하며 서로 잇달아 자취가 끊이지 않았다”고 적은 그 상황과 정확하게 맞물린다. 이렇게 보아 명도회는 1800년 4월에 처음 설립되어, 같은 해 7월에서 12월 사이에는 이미 자신들도 놀랄 만큼 예상외의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충훈부 후동으로 이사한 강완숙

명도회의 설립 시점이 1800년 4월임을 가늠케 하는 다른 정황도 있다. 「추안급국안」 1801년 3월 15일 자, 주문모 1차 심문 당시, 주 신부의 공초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기미년(1799) 겨울 또 충청도에서 교난이 있음을 만나, 이로 인해 피하느라 나가 다닌 것이 대략 몇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인의 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또 사동(寺洞) 홍문갑의 집은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감을 금지하는 법 때문에, 다시 그 집을 내다 팔고 훈동(勳洞) 집을 샀는데, 이때가 경신년(1800) 3월이었습니다.(己未冬, 又値湖中有難, 因避而出遊者, 約數月. 然不到敎中人家. 又寺洞洪家, 因閭家奪入之禁, 變賣其家, 而買勳洞家, 時在庚申三月也)”

1799년 충청도 지역의 교난 이후 주문모 신부는 서울의 비선 조직이 불시에 노출될 것에 대비하여 강완숙의 집을 떠나 경기도 양근과 이천 지역에서 거처를 옮겨 다니며 지냈던 듯하다. 그러니까 1799년 10월에서 1800년 3월까지 주문모 신부는 서울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던 처지였으므로 명도회 같은 조직을 가동시킬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었다.

원래 1792년 이후 충청도 별라산에서 상경하여 남대문 밖 창동에 살았던 강완숙은 1799년에 규모를 키워 도심 속 대사동으로 집을 옮겼다. 이사하면서 집회와 거주 공간의 확충을 위해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어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신축 과정에서 여가탈입률(閭家奪入律)에 저촉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일이 그만 꼬였다. 여가탈입률이란 「대전회통(大典會通)」 「형전(刑典) 금제(禁制)」에 “여염집을 빼앗아 차지한 자는 도(徒) 3년으로 정배한다. 월세로 빌렸다고 칭탁하거나 전세를 내었다고 칭탁하는 경우도 형률이 같다(閭家奪入者, 徒三年定配. 其稱借貰者, 同律)”고 한 조항이다. 대사동 집과 둘레에 세를 얻은 집을 터서 새집을 지어 공간을 확장하려다가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던 듯하다.

결국 강완숙은 대사동 집의 신축 입주를 포기하고, 1800년 3월에 서둘러 충훈부 후동(지금의 종로구 관훈동)에 새로 다른 집을 구해 이사했다. 주문모 신부는 4월에야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 여주에서 교난이 다시 발생했고, 신부는 이에 황사영과 현계흠의 집으로 급히 피신했다가, 5월 이후 정약종과 정광수의 집, 그리고 광통교 김이우의 집 등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 내용은 주문모 신부의 공초 기록 속에 자세하다.

명도회의 출범은 1800년 3월 강완숙이 충훈부 후동으로 입주한 뒤, 주거가 정돈된 시점에 바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공간에서 침체된 교회에 새 기운을 불어넣기 위한 모종의 조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특히 신부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은 평신도 간의 학습과 지도를 통한 교리 지식의 확산 방식에 당위성을 더해 주었다.



정약종의 갑작스런 상경

한편 초대 명도회장으로 임명된 정약종의 상경도 이 시점에 이루어졌다. 「추안급국안」 중 1801년 2월 13일, 정약용의 공초에, “제 형 정약종은 작년(1800) 여름 대계(臺啓)가 나온 뒤 양근으로부터 도피하여 올라와 배를 타고 서울에 이르러 전동(典洞)의 청석동(靑石洞) 오른편 서너 번째 집에 머물러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들을 보내 형을 모시고 와서 남대문 안에 집을 사서 그로 하여금 옮겨 지내게 했습니다”라는 진술이 보인다.

정약종의 상경 시점은 「황사영백서」 제26행에 “명도회 회장 정 아우구스티노는 정약용의 셋째 형이다. 앞서 양근에 살다가 경신년(1800) 5월에 교난으로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였다”고 한 기록에 명확하다. 그의 상경은 명도회가 설립된 4월에서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정약종의 상경 이유는 1800년 4월 이중배 마르티노 등이 양근에서 체포되고, 이어 5월에 권상문마저 붙잡히면서 양근 교회에 위기가 닥쳤고, 지평 신귀조(申龜朝)와 장령 권한위(權漢緯)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리면서 여주와 양근 지역을 특정해 사학의 박멸을 주장하여, 더 이상 양근 지역에서의 종교 활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갓 출범한 명도회 조직의 리더로서, 주문모 신부를 대신해 가까운 거리에서 조직을 통할케 하려 한 교중의 뜻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했다. 다만 정약종의 회장 임명이 4월 출범과 동시에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5월 상경과 함께 결정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당시 정약종 일가는 청석동에 있던 궁녀 문영인의 집에 세 들어 들어갔고, 이 집은 한해 전인 1799년에 정약종이 교회 일로 서울에 두 달간 체류할 때 강완숙의 주선으로 빌려서 묵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 후 한 달 만에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고, 온 나라가 국상을 만나 애도 기간에 들어가면서 일체의 천주교 탄압과 검거 활동이 중단되자, 갓 출범한 명도회로서는 생각지 않게 최적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도회의 설립 목적과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계속 이어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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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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