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65. 배론의 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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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65. 배론의 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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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촌 토굴에서 기도와 강학·일기 쓰며 절망의 시간을 보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5. 배론의 토굴

2021.08.29발행 [16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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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구찌의 「조선서교사」에 수록된 1936년 8월 당시 배론 토굴의 입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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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 토굴의 현재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배론 가는 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황사영이 2월 15일쯤 서울을 떠나 경상도 예천에 머물다가 강원도 접경으로 옮겼고, 이후 제천 배론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사학징의」 중 장덕유(張德裕)의 공초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 누각동에 사는 신자 김국빈(金國彬)이 3월 20일쯤 장덕유를 찾아왔는데, 자신이 2월 중순경 여주에서 김한빈과 우연히 만났더니, 그가 상복 입은 사람을 데리고 예천으로 내려간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또 배론 옹기점 주인 김귀동(金貴同)이 자신의 공초에서, 2월 그믐께 김한빈이 이상인(李喪人)을 데리고 왔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2월 15일께 도성을 벗어난 황사영은 김한빈과 함께 예천 등지를 거치며 은신처를 찾다가 근 보름 후에 배론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안급국안」의 10월 9일 자 황사영의 공초는 이것과 조금 다르다. 평구에 도착해서 김한빈과 다시 만나니, 청양 사람 김귀동이 사학으로 제천 땅에 피해 들어갔으니 함께 그리로 가자고 해서, 제천 읍내에서 30리 거리의 근우면(近右面) 배론리(排論里)로 들어가게 되었노라고 했다. 예천 간 일에 대한 언급은 빠지고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 경우 서울서 배론까지 가는데 근 보름 가까이 걸린 것이어서 날짜가 잘 맞지 않는다.

「추안급국안」 10월 10일 자 공초에서 김한빈은 또 송재기의 집에서 황사영과 동행해 팔송정(八松亭) 도점촌(陶店村) 김귀동의 집에 도착했노라고 했다. 팔송정은 오늘날 배론 성지 인근 제천 10경 중 제9경으로 일컬어지는 탁사정(濯斯亭)의 옛 이름이다.

김귀동은 고산(高山) 백성인데, 그 또한 2월 초에 배론 산중으로 막 옮겨온 터였다. 그 이웃에 살던 청양 사람 김세귀(金世貴)와 김세봉(金世奉) 형제도 김귀동보다 고작 한 달 먼저 이곳에 들어왔다. 당시는 교회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터전을 모두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충청도와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속속 숨어들거나, 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었다.

위 김국빈의 진술에는 내포에서 사학을 하다가 달아난 여러 남녀를 여주에서 만나 가평 읍내에서 동쪽으로 10리 남짓 되는 땅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당시 천주교도들이 산속에 숨어 들어갈 때도 천주교 조직 내에서 암묵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한빈 또한 그 같은 연락망을 타고 황사영을 배론에 갓 내려온 김귀동의 집으로 안내했고, 그곳은 김세귀ㆍ김세봉 형제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해, 그 앞서 정착한 사람들과 함께 작은 산골 마을을 이뤄가던 시점이었다.



교우촌에 마련한 토굴

배론은 교우촌으로, 치악산 동남편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으로 둘러싸인 험준한 산악지대라 외부와 절연된 곳이었다. 집주인 김귀동은 김한빈과 함께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거기에 황사영을 숨겼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 깊이 숨어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한마을 사람들조차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달레는 “일종의 지하실을 만들고, 그리로 통하는 길은 그 옹기점에서 만드는 큰 옹기그릇으로 덮어놓았다”고 썼다. 황사영의 존재는 김귀동과 그의 아내, 그리고 한(韓) 그레고리오의 어머니만 알고 있었고, 한 그레고리오의 모친이 자주 와서 수발을 들었다고 했다. 한 그레고리오는 다른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불빛조차 새 나가지 않는 좁은 토굴은 어떤 크기였을까? 1929년 4월호 경향잡지에 정규량 신부가 배론 일대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굴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이 실려있다. 그는 배론 점촌(店村)의 지굴(地窟), 즉 땅굴이라고 이 공간을 설명했다. 일본인 학자 야마구찌(山口正之)는 자신의 저서 「황사영 백서의 연구(黃嗣永帛書の硏究)」(全國書房, 1941)와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雄山閣, 1967)에 각각 1936년 8월 25일에 배론을 답사하고 나서 쓴 「주론토굴답사기(舟論土窟踏査記)」를 수록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제천에서 9㎞의 봉양면 주포(周浦)에 이르러 여기서 8㎞, 도보로 약 2시간의 거리에 있는데 배론 내를 건너 계곡으로 접어든다.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 연봉의 가슴패기를 이루고 있다. 옛 기록에는 ‘토기점촌(土器店村)’이라고 적혀 있다. 계곡은 길이가 4㎞에 이르고, 지형이 배 모양이어서 배론이라 불리운다 한다.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4번지 최재현씨 댁 뒤란에 있다. 토굴의 지름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 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이날은 매몰되어 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한눈에 옹기굴의 요적(窯跡)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이것이 황사영이 숨어지낸 배론 토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 답사 기록이다. 토굴은 입구가 직경 150㎝ 크기였다. 성인이 몸을 숙여야 들어갈 높이다. 깊이는 얼마쯤인지, 내부의 넓이는 어떤지 위 기록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할 때 이곳은 옹기를 굽는 옹기 가마는 아니고 가마에 넣기 전 옹기를 쌓아두던 토굴 형태의 움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입구가 매몰된 상태여서 그는 토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짐작건대 입구는 옹색하고 작아도 안으로 꽤 깊숙이 파 들어가 황사영이 불을 밝혀 글을 쓰고 두세 사람과 함께 공부하거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크기였을 것이다. 입구는 옹기 등으로 막아 뒷공간을 은폐했다.

「사학징의」의 공초 기록을 믿을 경우, 김한빈은 김귀동의 집에 보름쯤 머문 뒤, 생활비 마련을 위해 제천 일대를 한 달 남짓 다니며 사냥을 했고, 황사영은 토굴에 혼자 남았다. 토굴에서도 황사영은 김세귀ㆍ김세봉 형제를 앉혀놓고 천주학을 부지런히 강론했다. 그들에게 십계를 가르쳤고, 그 밖의 교리를 정성을 쏟아 강습했다. 그 일마저 하지 않고는 그 절망적 시간을 감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낙담과 절망


교회와 가족의 소식이 궁금했던 황사영은 3월 말 김한빈을 서울로 보냈다. 이미 정약종과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은 목이 잘려 죽었고, 이가환과 권철신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송재기의 집에 잠깐 들른 김한빈은 황사영 집안의 소식도 물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주문모 신부는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했고, 강완숙도 끌려갔다. 당시는 심문 중이었고, 외교 문제로 말썽이 날까 염려한 조정이 쉬쉬하여 외부로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황사영은 이때 주 신부의 자수 사실까지는 확인했을 것이다.

절망적 상황 속에 기약 없는 시간이 토굴 속에서 흘러갔다. 기도와 강학, 그리고 일기를 쓰면서 황사영은 간절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먼저 세상을 뜬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하나하나 공책에 적어 나갔다. 자신 외에는 증언을 남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선 교회가 실낱같은 빛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6월 2일, 재차 소식을 탐문하기 위해 읍내 장터에 나갔던 김한빈이 그만 서울에서 내려온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다급해진 황사영이 이곳에서 다시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이틀 만에 김한빈이 돌아왔다. 원주 안창까지 끌려갔다가 포교가 술에 취해 조는 틈에 몸을 빼서 도망온 길이었다.

8월 말에는 황심 토마스가 배론 토굴로 찾아왔다. 그는 내포 지방 덕산 용머리 출신으로 1796년과 1797년에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들고 두 차례나 북경에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황사영은 비로소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상세히 접했던 듯하다. 주 신부는 교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대속하고자 자진 출두하여 4월 19일에 효수형에 처해져서 죽었다는 전언이었다. 황심은 주 신부가 세상을 뜰 때의 의연한 모습과 당시 일어났던 여러 이적들에 대해 전해주었고,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절망스러웠다. 조선 교회는 이대로 주저앉고 마는 것인가? 신부의 성사와 세례를 그토록 목이 타게 기다리던 지방의 신자들은 이제 어찌하는가? 구원의 빛은 꺼졌다. 지도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믿었던 강완숙마저도 지난 5월에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다. 지도부 중 남은 것은 혈혈단신 자신 하나뿐이었다. 황심이 황사영을 찾아온 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조선 교회의 현실 타개 방안을 묻고자 함이었다.

깜깜한 토굴 속처럼 길은 보이지 않았다. 빛은 없었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평소 북경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해온 보고와 탄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행상에게서 구입한 반 자짜리 명주천을 꺼내 종이에 쓴 초고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옮겨적기 시작했다.

나중에 의금부에 백서와 함께 압수된 그의 일기장에는 토굴에서 끼적여 둔 시와 서울에 살아남은 교우를 생각하며 쓴 시가 남아 있었다. 제목만 남은 시작품에 ‘가을밤에 마암을 그리며(秋夜懷摩庵)’, ‘암로(巖老)에게 부치다(寄巖老)’, ‘중간(仲簡)에게 부치다(寄仲簡)’, ‘묵옹(翁)을 송별하며(送別翁)’, ‘과회(寡悔)가 죽는 꿈을 꾸고(夢寡悔死)’ 등이 더 있다. 「추안급국안」에 제목만 나온다. 마암은 이국승, 암로는 김경우, 중간은 인언민, 묵옹이 황심이었다. 과회는 이경도로 이윤하의 곱사등이 아들이었다. 화원(花園) 또는 근형(芹兄)으로 불린 외사촌 이학규의 이름도 글 속에서 자주 나왔다. 이국승은 1797년 이래 자기 집에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고, 황사영이 붙잡혔을 때 그는 이미 사형을 당한 뒤였다. 이경도가 죽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 쓴 시는 당시의 불안 심리를 잘 보여주는 슬픈 제목이다. 이렇듯 황사영은 배론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교계의 소식을 탐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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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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