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70. “이 무덤 위에 교회가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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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70. “이 무덤 위에 교회가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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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유해 3위 교리당에 안치… 주문모 신부 예언 마침내 실현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0. “이 무덤 위에 교회가 서리라”

2021.10.10발행 [16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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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 복자 윤지충 바오로 묘에서 출토된 백자 사발 지석.



무덤에서 출토된 사발

2021년 3월 11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성역화 작업 도중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무덤과 유해가 발견되었다. 반 년간의 검증 과정을 거쳐 지난 9월 24일 전주교구의 공식 학술 보고회가 있었다. 출토된 유골에는 목과 팔 등에 난 칼자욱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에서는 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직경 15㎝ 크기의 사발이 묘광의 중간 부분에서 수습되었다. 윤지충의 묘에서 나온 사발에는 “성균생원(成均生員) 윤공지묘(尹公之墓). 속명지충(俗名持忠), 성명보록(聖名保祿), 자우용(字禹庸), 기묘생(己卯生), 본해남(本海南)”이란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특별히 세례명을 성명(聖名)이라 표기하고 바오로(保祿)라 적어 놓았다. 측면에 “권공묘재좌(權公墓在坐)”라 하여 바로 왼편의 무덤이 권상연의 묘임을 밝힌 것도 인상적이다. 반대쪽 하단 측면에는 돌아가며 “건륭(乾隆) 오십칠년(五十七年) 임자(壬子) 십월십이일(十月十二日)”이란 묻은 날짜를 적어 놓았다. 임자년은 179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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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 복자 권상연 야고보의 백자 사발 지석.


권상연의 사발에 적힌 글은 이렇다. “학생(學生) 권공지묘(權公之墓). 휘상연(諱尙然), 자경삼(字景參), 신미생(辛未生), 본안동(本安東).” 윤지충과 달리 야고보(雅各伯)란 세례명은 쓰지 않았다. 역시 측면에 “윤공묘재우(尹公墓在右)”라고 쓴 것은 훗날 두 무덤 중 어느 하나가 발견되었을 때 두 사람이 나란히 묻혀 있음을 알려주려 한 표지로 보인다. 또 이곳이 유항검 집안 선산이었기에 후대에 무덤이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별히 세례명을 성명(聖名)으로 표기한 것도 달리 용례를 찾을 수 없다. 관변 기록은 모두 사호(邪號) 또는 별호(別號)라 했지, 성명이란 표기는 처음 본다.

필자는 사발을 처음 보고 글씨가 다산의 필체와 흡사해 깜짝 놀랐다. 중간중간 운필의 습관에서 다산의 필획이 보여주는 특성과 일치하는 점이 대단히 많았다. 윤지충과 다산은 고종사촌 간이었고, 무엇보다 윤지충을 천주교로 이끈 것이 바로 다산 형제였다. 두 사람은 봉은사에서 보름간 합숙하며 과거 시험 공부를 함께한 인연도 있었다.

진산 사건 당시의 공초에서 윤지충은 누구에게 사서를 받았는지 자백하라는 문초에 처음엔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알아도 댈 수 없다고 버텼다. 고문을 심하게 당한 뒤에는 이미 죽은 김범우의 이름을 댔다. 김범우에게서 「칠극」과 「천주실의」를 받아와 베꼈노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김범우의 이름을 대지 않은 것을 보면 이는 다산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 진술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다산은 겉으로는 배교를 공표했지만 교회 활동에 손을 뗀 상태가 아니었다. 평소 두 사람의 관계로 보나 자신으로 인해 사촌 윤지충이 죽게 되었다는 다산의 부채감으로 보더라도 사발의 글씨를 다산이 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석에 쓴 글씨는 또박또박 해서로 단정하게 썼다. 다산이 해서로 쓴 다른 친필 글자와 하나하나 필적을 대조해 보았다. 전체적으로 필체의 유사도가 상당하다. 이것만으로 다산 친필이라 단정할 수 없겠지만, 하나의 유력한 가능성으로 제시해둔다.



유골이 전하는 진실

사발에 적힌 매장 일시는 1792년 10월 12일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1월 12일에 처형되었다. 사발에는 정확하게 사망 후 11개월이 지난 날짜를 적어놓았다. 형장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가매장 한 뒤 1주기를 한 달 앞두고 시신을 이장하여 모시면서 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사발을 함께 묻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두 사람의 1주기를 맞아, 교중이 뜻을 함께 모으고 집행부의 상의를 거쳐 당시 전주 지역 교회 지도자였던 유항검 형제의 주도로 면례(緬禮)를 치렀음을 알려준다. 사발의 글씨가 다산 것이 맞다면, 1주기 행사를 지역을 넘어 전체 교계 차원에서 마련했다는 뜻이 된다. 유항검은 자신 소유의 땅이었던 바우배기 언덕에 두 사람의 유해를 모셨다. 여기에는 두 사람에 대한 교계의 존숭(尊崇)과 흠모가 반영되었다. 유항검 형제와 윤지충도 사촌간이었다. 당시 교회에서 두 사람의 위상은 「사학징의」 속 1801년 3월 28일의 윤지헌의 공초에서 심문관이 “네 형 윤지충이 사형을 당해 죽은 뒤에, 무릇 사학하는 자들이 모두 네 형을 절의에 죽었다고 하면서 주교처럼 높이자, 네 집은 사학하는 집의 주인이 되었다”고 추궁한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은 처형 뒤에 순교의 아이콘이 되어, 주교의 예우에 해당하는 존경과 흠숭을 받고 있었다.

시신에는 처형의 자취가 또렷이 남아 당시의 정황을 가늠케 한다. 전주교구의 발굴보고서에 실린 전북대 의대 해부학교실 송창호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 윤지충의 경우 5번째 경추가 칼날에 날카롭게 절단되었고, 권상연의 경우 잘린 머리뼈 일부분과 목뼈 및 견갑골이 없는 상태였다. 능지처사에 처해진 윤지헌의 유해는 두 번째 경추가 잘렸고, 양쪽 상완골과 왼쪽 대퇴골에도 절단의 흔적이 남았다. 팔꿈치와 무릎 아래로는 뼈가 아예 남아 있지 않아, 사지가 잘린 채로 시신이 훼손되었고, 매장 당시 흩어진 팔다리를 수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팔다리의 관절 아래가 없는 몸체만의 시신을 관에 넣고, 떨어진 머리를 제 자리에 놓을 때의 정경을 생각하면 그 잔혹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한편 23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세 사람의 유해 소식은 「사학징의」에 실린 유관검의 공초를 새삼 생각나게 한다. 1795년 4월, 전주의 유관검은 내포의 이존창과 함께 상경했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계동 최인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방 교회 교인들의 갈급한 심정을 헤아려 신부가 한 차례 남행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이존창의 속내는 이참에 아예 주 신부를 고산으로 모셔갈 작정이었다. 실제로 신부를 중국에서 모셔오는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이존창과 유관검이었다. 이렇게 해서 주 신부는 이존창과 유관검의 안내를 받아 초여름의 신록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남녘 사목 여행을 떠났다. 「사학징의」 중 권상문의 공초 기록을 보면 이때 최인길과 최창현, 최필공, 최인철, 윤유일 등이 주 신부의 남행에 동행했다. 교회의 집행부가 총출동한 모양새였다. 신부는 이때의 나들이를 오래도록 잊지 못했을 것이다.

신부를 모시고 가던 일행의 발걸음이 전주에 이르러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 아래를 지나게 되었을 때였다.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에게 말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교우 중에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4년 전에 순교한 두 사람의 무덤이 바우배기 언덕에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주 신부가 대답했다. “우리 성교(聖敎)의 공부는 성인품에 이르면 마땅히 그 사람의 무덤 위에다 천주당을 세웁니다. 훗날 동방에 성교가 크게 행해지면 이 두 사람의 무덤 또한 마땅히 천주당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오.”

주문모 신부의 이 예언은 발굴된 세 분의 유해가 지난 9월 초남이성지 교리당에 안치되면서 마침내 실현되었다. 스쳐 지나간 기록 속의 장면을 이렇게 현실에서 조우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엄동에도 굳지 않은 신선한 피

윤지충과 권상연이 교회 내에서 이같은 존숭을 받게 된 것은 체포 이후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결같고 의연한 태도 때문이었다.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윤지충은 의젓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잔치에 나아가는 듯한 즐거운 표정이었다고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기술했다. 그는 커다란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얹으면서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다. 망나니는 시신에 남은 간명한 절단의 흔적처럼 단칼에 그의 머리를 베었다.

혹독한 심문 도중에도 윤지충은 조금도 자신의 신앙을 흐트러뜨림이 없었다. 오히려 틈만 나면 관장들에게까지 천주교의 신앙을 이해시키려 애썼다. 그 자신이 직접 쓴 「죄인지충일기」에 그 경과가 자세하게 남아있다. 이같은 신앙의 자랑스러운 모범을 통해 그는 그 육신 자체로 교회가 되었다.

처형 후 두 사람의 장례는 9일이 지나서야 겨우 허락이 떨어졌다. 달려가서 시신을 본 사람들이 술렁댔다. 죽은 지 9일이 지났는데도 시신은 조금도 부패되지 않았다. 살결은 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머리를 자른 나무토막과 결안이 적힌 명패 위에는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묽고 신선한 피가 흥건했다. 음력 11월 21일은 겨울이라 물이 얼 만큼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그들은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손수건으로 두 사람의 피를 적셨다. 이후 다 죽어가던 환자가 피에 젖은 명패를 담갔던 물을 마시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복하는 이적이 일어났다. 피 묻은 수건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은사를 입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두 사람은 그 보혈로 천주의 임재하심을 증명했다. 이에 고무된 조선 신자들은 1792년 윤유일이 세 번째로 북경에 밀사가 되어 갔을 때, 두 사람의 피에 적신 손수건 몇 조각을 순교 사실을 적은 기록과 함께 이적의 징표로 북경 주교에게 보냈다.

「사학징의」 중 정섭의 공초에 1794년 12월, 아들이 복학증(腹症)으로 위독할 때 윤유일이 왔다가 품속에서 머리카락과 소소한 나무 조각으로 채워진 주머니를 끓는 물에 담갔다가 마시게 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는 흑진(黑珍)이라고 부르는 성혈(聖血)도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윤지충과 권상연의 시신을 수습할 때 나온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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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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