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 성지순례 - 신암리성당, 갈곡공소, 양주관아
20170223(목) 동두천중앙역에 10시46분에 집결하여 첫번째로 찾아갈 성지는 신암리성당이다.
역 앞에 내리니 3.1절을 앞두고 바르게살기운동 동두천시 협의회에서 태극기를 나누어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각자의 자전거 또는 백에 태극기를 장착하고 회원들의 요청으로 단체 사진 한 컷을 하고 순례길을 나선다.
남면으로 가는 길은 북서풍 맞바람으로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처음 가는 길이라 네이버지도를 따라 가다가 직진해야 하는데 광적로로 들어서서 약간 돌아가는 알바를 하다가 아직 첫 성지도 도착하지 못하고 점심시간이 되어 남면 면소재지로 진입, 점심을 든든히 하였다. 집에서 일찍 나오느라 아침을 거른 동료가 있어서 지친 가운데 폭풍흡입 ..
시골이라서인지 오리 한 마리가 양이 많아서 5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고, 야채와 반찬도 싱싱하고 건강하다. 더하여 별도로 따끈한 국물을 끓여주니 행복한 밥상이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재촉하여 신암리 성당을 찾았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오늘 함께한 5명 중에 신자는 3명, 두 명은 비신자이지만 1명은 부인이 신자이고, 1명은 93세의 장모님이 신자라서 일요일날은 차량으로 명동성당에를 모셔다드리는 잠재적 예비신자 ???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십자가 아래 성당 표지 글자판을 자세히 처다보니 신암리 공소라는 글짜는 때어낸 자국이 남아있다.
그 아래에 100주년기념성당이 추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5년 3월 박원문 마르코 회장시절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2년 후인 1927년 5월에 가서야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연천, 양주, 파주, 포천, 가평, 고양군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당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열악하여 도저히 사제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3년 뒤인 1930년 4월에 최문식 신부는 미리내로 전임되고 본당은 폐지되어 다시 행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고, 이때 당시 신암리 공소의 회장은 이재현 베네딕토였다.
단체 사진을 찍고 성당에 들어가 성체조배를 한다.
아담하고 정결한 내부 인테리어가 이 성당의 역사를 잘 말해주는 것 같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켜온 옹기장이 선조들 !
성당 현관에 놓여진 여러 개의 스탬프 중 2개를 찍었는데 잉크색만 다를 뿐 동일한 문양이다.
6.25 전쟁 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되고 말았다.
1952년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李啓光) 세례자 요한 신부가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
2005년 3월 30일 본당 승격 80주년을 맞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도시 지역 신자들의 피정 공간으로 공소를 개방하는 등 공소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섰다. 2008년 10월 5일 신암리가 고향인 서울대교구의 이경훈(李庚薰)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과 순교자 박 다미아노의 집(교육관 및 사제관) 건물을 새로 건립하여 이곳 출신 순교자로 전해지는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22일 준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의 성상과 성물 등을 완전히 갖추고 2015년 10월 24일 이경훈 신부 주례로 준공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두번째로 찾아 갈 성지는 갈곡공소!
갈곡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백씨 집성촌의 백수현 전통가옥을 잠시 둘러 본다.
안채인데 그리 크거나 화려 하지는 않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 어려서 시골에서 살 때의 여러 추억들을 담소 하면서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갈곡공소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자동차 통행량도 많고 길이 좁아서 위험하지만 ...
성당 현관 좌측에 게시된 공소 역사기록이다.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6.25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고개를 넘으려면 20여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불렸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지며, 성당 앞마당도 옹기를 굽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아직 스탬프가 비치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험한 첩첩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양주관아, 지쳤지만 바람을 등지고 달리다보니 어느새 가납에 있는 승리 사거리 옆 가래비 3.1운동기념탑이다.
지친 사람들이 많아서 편의점에 들러 빵과 음료수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이 기념탑 아래로 진입하여 내려가면 신천의 자전거도로.도보 겸용도로가 나온다. 방아교 위로 올라가 좌회전 하면 양주관아에 이른다.
양주관아는 지금 대대적으로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공사장 피해 돌아 측면에서 사진 몇 컷을 하고 빠르게 길을 재촉하여 녹양동 의정부종합운동장으로 향한다.
관아 뜰에 세워둔 공적비들이 즐비하다.
양주관아 동쪽에는 관광안내센터가 있고 그 위쪽에 자리한 불곡산 등산로 안내도가 자세하다.
녹양동으로 빠른 페달링으로 재촉한다.
종합운동장 주차장 입구 언덕에 있는 일제 때 싸이클영웅 엄복동 선수 동상에서 단체 사진을 ~~
미사리와 강동으로 가야하는 동료 때문에 늦으면 퇴근 시간과 겹쳐서 전철 복귀가 어려울 것 같아서 의정부주교좌 성당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 순례를 녹양역에서 마무리하고 도봉산역, 창동역 등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환승하여 복귀 하였다.
함께한 친구들께 마음 깊이 감사인사 올립니다.
# 첨부 : 성지순례7차 - 의정부교구(신암리, 갈곡,양주관아)
※ 경로 지도 보기 https://www.komoot.com/tour/283002403?ref=w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