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차 순례 - 단내, 어농, 죽산, 안성, 배티, 백곡
201705011 목요일 05:00 아침에 눈을 뜨면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 오늘은 경강선 이천역으로 가는 날!
축복 받은 살레시안 스승 마신부님(아르키메데 마루텔리), 원선오신부님(빈첸시오 도나티), 노숭피신부님(노베르토)의 제자가 된 덕분에 졸업 후에야 1981년 성인 이름을 덤으로 하나 받았다. 안셀모! 나의 본명이다.
이순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매일 같이 기발함이 넘치고 사랑으로 행하는 인생으로 초대받고 있음을 깨닫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결혼 40주년 축복장도 받았다.
매주 내가 받은 초대장은 봉투에 담겨 오지 않는다.
아침 햇살에 실려오는 새소리와 상큼한 공기에 실려오는 커피 향, 때론 24시해장국에 묻어 온다.
인생을 인생답게 살라는 선조 성인들의 초대~
카미노 드 산티에고로 떠나기 전에 우리의 위대한 선조 성인들의 신앙의 길을 알고나서야 비로소 야곱 성인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이고 도리가 아닐까 싶어 버킷리스트에 넣고 시작한게 오늘로 21차 순례, 특별한 방해가 없는 한 매주 두 번씩 떠나는 성지 순례길,
오늘은 단내~어농~죽산~안성~배티~백곡에서 선조들의 믿음과 ♡을 만난다. 안셀모의 초대가 화려하다!
회차가 거듭 될수록 새로 맞이하는 순례 길은 한걸음씩 더 경이롭고, 남은 여생에 온전히 몰입하라는 초대임을 느낀다.
백악관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라는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많다는 알퐁소의 조언데로 ...
배교냐, 목숨부지냐!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꺼이 죽음의 형벌과 믿음을 선택한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이 경이로울 뿐이다.
첫번째로 찾아갈 곳은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357에 있는 단내 성가정 성지다. 남한산성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안식처다.
다행히 단천리로 가는 길목에 아침식사 할 곳이 있어서 설렁탕으로 아침을 먹는다.
단내성지 앞으로는 단천이 흐르고 뒤에 숲이 울창한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성지는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성직자를 조선 땅에 영입한 주역 가운데 하나인 순교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의 묘가 있는 어농 성지와도 지척이고, 단천리는 또한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한 달여를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해 12월8일(음력)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덮어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정은 바오로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던 검은 바위 앞에 성모상이 세워져 있다.
성당은 의자가 없다. 비닐 장판 바닥에 앉아서 미사를 드리는 성전이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하여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년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 해 6월 28일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14처가 있는 십자가의 강을 따라 내려와 소형주차장과 대형주차장 사이의 십자가동산을 지나 성당으로 올라간다.

죽상성지로 달리는 길은 중간에 일반도로 좌측 갓길을 따라 200m 정도를 역주행도 해야 하고, 서동대로4거리에서는 가드레일도 넘어야 한다.
가능하면 차도를 피해서 가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두 팔을 벌리고 우릴 반기시는 예수성심상이 보이는 사무실 옆으로 들어간다.

소성당으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에 있는 석문판

또한 초대 주임인 공 안토니오 신부 흉상 제막식, 로고스(Logos) 탑과 미래를 준비하는 십자가 축복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11m 높이의 로고스 탑은 안성 지역에 하느님의 ‘말씀’이 뿌리내린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으로 관련 자료들을 탑 속에 넣어 100년 타임캡슐 봉안식도 가졌다. 100주년 기념성당 옆에 설치되어 본당 설립 200주년을 준비하는 ‘미래의 십자가’는 총길이 18m에 무게만도 13t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며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두 칸짜리 옛 초가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성지 안내 표석 앞에서 개인별로 기념 사진을 한 컷씩 한다. 이곳 배티성지는 바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자 순교자들의 본향이다.
2012년 4월 15일 축복식을 가진 고딕 양식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성당 현관 좌측 벽면에 있는최양업 신부님의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는다.
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성당으로 들어가 성체 조배를 한다.
성당 현관을 나오니 우측에 새로 건립된 성모상이 철쭉에 둘어쌓여 우리를 반겨주신다.
성당 맞은편 오솔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성지 입구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순교현양비가 먼저 순례자들을 맞는다.
윗성전과 소성당 앞에 있는 매괴의 성모님상
100m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1997년 6월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있고, 그곳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 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순교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동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조금전에 우리가 둘러보고 내려왔던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초가집 사제관과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900m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14인 순교자 묘역 입구’라는 푯말이 서 있는데 우리는 빠르게 다운힐을 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이 외에도 배티 성재골에 6인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있다.
맞은편에는 최양업신부 동상과 안내판이 있다.
유난히 마음에 와서 닿는 알퐁소 성인의 말씀이 휴게소 앞에 세워져 있다.
순례온 형제님께 부탁하여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2014년 축복식을 갖고 개관한 최양업 신부 박물관으로 내려간다.
기념관 현관 앞에는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양희진 도미니카의 이콘 전시회 안내가 되어 있다.
전시관을 둘러 보면서 이콘도 멋지지만 전시관 규모나 데코레이션이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보다 더 화려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벽과 천정이 하얗게 디자인되어 사진과 영상으로 3층까지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한 눈에 한국의 천주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의자들도 백옥처럼 하얀 돌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뜻일까?
제천으로 가는 길몫, 오늘의 마지막 순례처 백곡공소를 찾았다.
조그마한 공소가 있는 곳이지만 길가에서 만난 예수성심상이 백곡 공소 입구에서 마을 쪽을 바라보며 설치되어 있다
배티 성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백곡 공소는 예로부터 깊숙한 산골로, 찾는 사람이 적었고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히 포장된 지금도 그리 인적이 흔치 않은 곳이다.
이 지방은 천혜의 피난처로 박해 시대 때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됐던 곳, 충북 진천군과 충남 천안시 그리고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삼각점에 위치한 이 지역은 우선 그 지세가 험해 비교적 박해의 찬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각 지방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 교통이 편리했기에 박해 시기 은밀한 연락이나 밤을 틈탄 도주가 용이했던 것이 교우촌이 형성되기에 아주 적합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공소 제대 뒷벽에는 가운데 십자가를 중심으로 왼쪽에 성 김대건 신부상, 오른쪽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공소는 문이 잠겨져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고, 순례확인 스탬프도 찾지는 못하였다.
다만 교육관 뒤 공소 건물과 종탑 사이에 순교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공소 앞마당에 안치된 병인박해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윤 바르바라의 묘.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 박씨 성을 가진 바르바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시누이와 올케간이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순교일은 1866년 10월 20일이다.
남원 윤씨 집안은 본래 홍주에서 살다가 21세 손인 윤행윤 때에 박해를 피해 배티 골짜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배티 뒷산 성재골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되어 있던 이들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 초 후손들이 다시 찾았다. 1977년 평택에 사는 순교자의 후손들이 묘를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배티를 찾았을 때 배티와 백곡 공소의 신자들은 후손들을 만나 교회에서 대대로 잘 돌보며 기도드릴 수 있도록 설득하여 두 순교자들의 유해를 백곡 공소 경내로 이장한 뒤 깨끗하게 단장했다.
배티성지에서부터 계속되는 내리막 길과 평지를 따라 달려 잠시 백곡공소를 둘러본 후 진천읍에 도착하여 추어탕으로 저녁을 먹고 동서울행 버스에 올라 오늘 순례도 무사히 89km를 잘 마무리 하였다. 함께한 친구들과 안전하게 동행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버스 트렁크 한 칸에 접이식 자전거 두 대를 접어서 넣은 모양, 너희들도 오늘 탈 없이 수고 해줘서 고맙다.
참고로 진천에서 서울행 버스는 20~30분 간격으로 막차가 20:45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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