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3)-살다가 진흙탕에 빠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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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3)-살다가 진흙탕에 빠지더라도…

관리자 0 549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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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시골길에서 양떼와 목동이 잠시나마 내 길동무가 되어준다.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 길을 걷는 동안 양치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연금술사」를 구상했다고 한다.


 안개가 자욱한 날,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새벽길을 걸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걷는다.

 비가 온다고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순례자 숙소 침대에서 조금 더 누워 있는다고 해서 일정이 미뤄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만 늦어질 뿐이다. 땡볕 아래,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을 묵묵히 걷는다. 걸어도 걸어도 그늘 한 점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이 순례길이 인생길을 닮았다고 말하던데, 그 이유를 알겠다.

 이제 800㎞ 길의 절반을 왔다. 400㎞를 남겨두고 있다. 무슨 일이든 고비는 절반 쯤에 찾아오는 것 같다. 처음 며칠 간은 설레는 마음에 힘든 줄을 몰랐는데, 이제 절반 쯤 걸으니 익숙한 나머지 게으름을 피우고픈 마음이 든다. 삶의 자리에서도 그랬다.

# "인생 고비마다 이 길을 기억하리"
 한낮 태양이 이글거리는 시간이면, 이 곳 온도는 30도를 웃돈다. 모든 게 구워지고 삶아지는 시간이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평야를 지날 때는 쉬고 싶어도 쉴 곳이 없어 계속 걸어야 했다. 물 한 잔 얻어마실 곳이 없었다. 그 땡볕 길을 30㎞ 걸으니 마을이 나왔고, 숙소가 나왔다. 숙소에 들어서면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고비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오늘 걸은 길을 기억하리라' 다짐했다. 

 부르고스(Burgos)라는 큰 도시를 향해 갈 때는 표지판을 놓치는 바람에 한없이 풀밭길을 걸어야 했다. 멀찍이 앞에서 어른거리는 움직이는 물체가 순례자 무리인줄 알고 쫓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사람이 아니고 사슴이었다. 풀밭 언덕에 이르니 돌아가기도 난감했다. 그렇다고 다른 길이 보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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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집 외벽에 카미노 순례자를 코믹하게 묘사한 그림을 그려놨다.


 순례준비 중에 직접 만든 기도문만 되뇌었다. "주 예수님, 당신 친히 저의 인도자 되소서." 서쪽으로 가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해를 등에 업고 걸었다. 정말 그분이 인도해 주셨다. 눈짐작으로 대충 방향을 잡았는데도 운좋게 노란색 표지판을 찾아냈다.

 순례자들은 각자 자기 등에 자기 짐을 지고 걷는다. 배낭 무게와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예외없이 짐 진 것을 보면서 순례가 정말 우리네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이 크든 작든 모두 힘겹게 하루를 걷고 쉰다. 내 짐이 가장 무거운 것 같은데, 사실 다른 사람들 짐을 들어보면 무게가 만만찮다. 단지 누가 그 무게에 눌리지 않고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즐기며 길을 걷느냐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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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들의 배낭 크기는 제각각이다. 무겁든 가볍든 다들 힘들게 하루를 걷고 쉴 곳을 찾는다.


 길을 걷다 보면 며칠씩 함께 걷는 사람도 생기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도 생긴
다. 하지만, 만남이 내 계획이 아니고 생각이 아니었던 것처럼 언제 헤어지는지 모르게 또 헤어진다. 길이 주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만났을 때 최선을 다해 대하는 것, 그것이 만남을 아쉬워하지 않는 지혜다. 

 스페인어를 전혀 몰라 숙소에서 접수를 못하고 있던 내게 통역을 해준 고마운 오스트리아 순례자에게 마음의 표시로 요구르트를 준 일이 있다. 그 친구에게 그게 따뜻한 경험이었던지, 다음 마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내게 시원한 음료수를 건넸다. 그리고 내게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함께 있는 순간, 마음과 마음이 충분히 만났다면 아쉬움이 아닌 고마움과 따스함이 남는가보다.

 발이 초장부터 고생을 톡톡히 해서인지 오히려 지금은 몸 상태가 좋다. 매일 걸을 수 있다는 것, 그저 목적지를 향해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발을 절룩거리며 걷는 순례자를 만날 때면, 내가 그 고통을 알기에, 그저 앞서가기가 미안해서 괜찮냐는 인사라도 건넨다. 짧은 축복이나마 속으로 빈다. 그러고 보면 발이 아파서 질질끌며 걸었던 시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내 것으로 다시 바라보는 공감의 마음을 갖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비가 쏟아지던 날, 땅은 진흙창이 되어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그 더딘 걸음을 재촉하다가 진흙탕에 나자빠졌다. 그런데 넘어져 버둥대는 내 모습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진흙을 뒤집어 쓰고 웃는 내게 지나가던 독일 부부는 웃을 수 있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위로해 주었다. 사실, 진흙을 뒤집어 쓰고 뭐가 좋겠는가? 빨래만 더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넘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터진 웃음은 기왕 벌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털고 일어나 기쁘게 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살다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더라도 오늘처럼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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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표를 들고 길을 안내하는 길가의 순례자 청동상.


 레옹(Leon)에서는 길을 잃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같아서 따라간 길은 전혀 다른 곳으로 나 있었다. 무려 5㎞를 걸어왔는데 되돌아 나가야 할 판이었다. 계속가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걷기를 고집하려다가 행인들에게 물으니 전혀 갈 수 없는 길이란다. 

 발길을 돌리려는데, 걸어온 길이 너무도 허무하고 또 허무했다. 5㎞를 걷느라 쏟은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아까워 화가 났다. 그때 문득 '이 길을 걷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와 경쟁하려고 이 길에 오른 것도 아니고,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서두르는가? 그리고 왜 꼭 바로바로 길을 찾아야 하는가? 때론 길을 잃을 수도, 길을 잘못 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 길을 되돌아나와 순례자들이 이미 제 길을 찾아 떠난 길을 홀로 걸었다. 서둘러 가야한다는 조급한 마음을 버렸다. 그랬더니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가 밀려왔다. 다시 시작하는 길에서 나의 삶도 볼 수 있었다. 삶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걷고 또 매일 걷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다시 걷기 위해서는 자신을 추스르고 위로하고 격려할 에너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순례 중 어떤 깨달음 하나가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나에게 닥쳐올 일들을 미리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것에 다 대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집 떠난 순례자'는 그렇다. 그래서 순례자는 충분한 돈을 지니지 못해도, 지팡이가 없어도, 옷이 넉넉지 않아도 괜찮다. 말을 잘 하지 못해도, 몸이 성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순례자는 믿음 없이 순례길에 오를 수 없다. 순례자는 자신을 이끄는 손, 무언(無言)의 손을 믿어야 하며, 그 손에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다고 길에 오르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순례 여정이 온전한 의탁과 신뢰로 이끌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박현주(엘리사벳)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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