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진쟈샹(김가항.金家巷)성당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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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11:05
[성 김대건 신부 서품 170주년 특집] 상하이 진쟈샹(金家巷)성당의 어제와 오늘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한국인 첫 사제 탄생’의 자취
파괴·철거 등 아픈 역사 반복
2004년 자리 옮겨 새성당 봉헌
성인 유해 안치한 기념 경당 마련
한문·한글·영문 성인 생애 소개
발행일 2015-08-23 [제2958호, 10면]
▲ 2001년 3월 철거되기 전 진쟈샹(金家巷)성당 모습.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곳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주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진쟈샹(金家巷)성당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모태와도 같은 기념비적 사적지다. 김대건 신부 사제서품 170주년을 맞아 8월 15일 오후 5시 상하이 포동신구 진쟈샹성당에서 열린 가톨릭남성합창단 울바우 초청 음악회와 8월 16일 오전 11시 같은 장소에서 봉헌된 기념미사가 감격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이 열렸던 ‘바로 그’ 진쟈샹성당은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진쟈샹성당은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황포강 동쪽인 포동지역에 위치하다 2001년 3월 25일 당시 상하이교구장 김로현(金魯賢) 주교 주례로 마지막 미사 봉헌 후 그해 3월 30일 상하이시가 도시개발계획 명목으로 철거를 단행했다. 2001년까지 진쟈샹성당이 서 있던 자리에는 상하이해사(海事)법원 부속건물(상하이시 포동신구 민생로(民生路) 1288)이 들어서 옛 자리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법원 부속건물 경비의 감시와 제재가 심해 진쟈샹성당 옛 자리를 답사하거나 촬영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옛 진쟈샹성당 주변 건물들도 함께 헐리면서 그 자리를 최신식 관공서들이 대신하고 있다.
진쟈샹성당 철거 당시 상하이 천주교 한인공동체에서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장소임을 표시하는 표석을 세워달라고 상하이시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쟈샹성당은 철거된 자리에서 1㎞ 남짓 떨어진 상하이시 포동신구 다무즈(大拇指)광장 옆에 2004년 6월 기존 성당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봉헌됐다. 진쟈샹성당이 새롭게 자리한 곳은 서울로 치면 강남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성당 주변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 상가들이 즐비하다.
비록 김대건 신부가 서품된 정확한 장소는 아닐지라도 기존 성당에 모셨던 김대건 신부의 유해(척추뼈)를 안치해 2005년 4월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도 마련했다. 이 경당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1845년 8월 31일 상하이에서 강경으로 출발한 라파엘호를 본떠 배 모양으로 건축돼 순교지로 떠나던 김대건 신부의 뜨거운 신심을 묵상하게 한다. 상하이교구 소속인 진쟈샹본당은 건물 입구 벽에 한문과 한글, 영어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과 순교, 시성 등 약사를 청동판에 기록해 부착했고 본당 마당 게시판에도 한문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적어 진쟈샹성당을 찾는 모든 이에게 김대건 신부를 알리고 있다.
이처럼 2000년대 들어 철거와 재건축이라는 파란만장한 시기를 보낸 진쟈샹성당은 17세기 중국 명나라 숙종(1628~1643) 대에 건립된 중국 화동지역 최초의 성당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숙종 대에 건립’의 의미에 대해 당대에는 신자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고 일반적 의미의 성당이 실제로 건립된 것은 후대의 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1841년에는 남경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되면서 4년 뒤 김대건 신부가 진쟈샹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탄생되는 역사적 장소가 됐다. 교회 건축 전문가 단국대 김정신(스테파노) 교수는 진쟈샹성당이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 장소로 선택된 배경에 대해 “진쟈샹성당은 크기가 60평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당시 상하이 인근에서는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주교좌성당의 지위를 누렸고 사제서품식이 그곳에서 열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상하이교구에서 발행된 교회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진쟈샹성당은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1872년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성당’을 건축해 양자강 이남 지역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22년에는 다시 이 성당을 확장, 수리해 성당의 모양이 장관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새 성당은 1937년 일본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1949년 4월 1000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고딕양식의 성당을 준공하지만 한 달 만에 국민당 군대에 의해 파괴됐다. 이어 1958년 대약진 운동 때는 제대, 성모상 등이 뜯기거나 불태워졌으며 철공소로 사용됐다. 최초의 진쟈샹성당은 새 성당이 건립되면서 소성당으로 보존되다 새 성당이 파괴된 후 기능을 회복해 1987년 12월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진쟈샹성당은 최초의 성당 신축, 새 성당 건축과 파괴, 재건축 등의 복잡한 역사를 이어가면서 과연 김대건 신부의 서품장소가 2001년에 철거된 진쟈샹성당인지, 파괴돼 대지에 남아 있지 않은 다른 건물이었는지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진쟈샹성당의 철거 부재를 상하이 당묘교성당으로 직접 옮긴 상하이한인성당 강병조(안드레아)씨도 이에 대해 “김대건 신부님 서품 장소가 2001년 철거된 진쟈샹성당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4년 진쟈샹성당 내 ‘성 김대건 신부 기념경당’을 설계한 최부득(바오로) 상하이한인성당 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건축학 박사)은 “건축 양식으로 볼 때 2001년 철거된 진쟈샹성당에서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현대 중국어로 ‘진쟈샹’으로 발음되는 김가항(金家巷)은 ‘김씨들이 사는 골목’이라는 뜻으로 실제 진쟈샹성당 주변에는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한국에서 ‘금가항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진쟈샹성당의 잘못된 표기라는 견해가 대체적이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맺어지기 전까지는 한국인의 중국 왕래가 제한돼 오랜 세월 한국 신자들에게 잊힌 존재였다. 한중 수교 후에야 진쟈샹성당은 중국을 찾는 한국 신자들의 필수 순례코스가 됐다.
안타깝게도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이 열렸던 ‘바로 그’ 진쟈샹성당은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진쟈샹성당은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황포강 동쪽인 포동지역에 위치하다 2001년 3월 25일 당시 상하이교구장 김로현(金魯賢) 주교 주례로 마지막 미사 봉헌 후 그해 3월 30일 상하이시가 도시개발계획 명목으로 철거를 단행했다. 2001년까지 진쟈샹성당이 서 있던 자리에는 상하이해사(海事)법원 부속건물(상하이시 포동신구 민생로(民生路) 1288)이 들어서 옛 자리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법원 부속건물 경비의 감시와 제재가 심해 진쟈샹성당 옛 자리를 답사하거나 촬영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옛 진쟈샹성당 주변 건물들도 함께 헐리면서 그 자리를 최신식 관공서들이 대신하고 있다.
진쟈샹성당 철거 당시 상하이 천주교 한인공동체에서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장소임을 표시하는 표석을 세워달라고 상하이시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쟈샹성당은 철거된 자리에서 1㎞ 남짓 떨어진 상하이시 포동신구 다무즈(大拇指)광장 옆에 2004년 6월 기존 성당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봉헌됐다. 진쟈샹성당이 새롭게 자리한 곳은 서울로 치면 강남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성당 주변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 상가들이 즐비하다.
비록 김대건 신부가 서품된 정확한 장소는 아닐지라도 기존 성당에 모셨던 김대건 신부의 유해(척추뼈)를 안치해 2005년 4월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도 마련했다. 이 경당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1845년 8월 31일 상하이에서 강경으로 출발한 라파엘호를 본떠 배 모양으로 건축돼 순교지로 떠나던 김대건 신부의 뜨거운 신심을 묵상하게 한다. 상하이교구 소속인 진쟈샹본당은 건물 입구 벽에 한문과 한글, 영어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과 순교, 시성 등 약사를 청동판에 기록해 부착했고 본당 마당 게시판에도 한문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적어 진쟈샹성당을 찾는 모든 이에게 김대건 신부를 알리고 있다.
이처럼 2000년대 들어 철거와 재건축이라는 파란만장한 시기를 보낸 진쟈샹성당은 17세기 중국 명나라 숙종(1628~1643) 대에 건립된 중국 화동지역 최초의 성당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숙종 대에 건립’의 의미에 대해 당대에는 신자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고 일반적 의미의 성당이 실제로 건립된 것은 후대의 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1841년에는 남경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되면서 4년 뒤 김대건 신부가 진쟈샹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탄생되는 역사적 장소가 됐다. 교회 건축 전문가 단국대 김정신(스테파노) 교수는 진쟈샹성당이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 장소로 선택된 배경에 대해 “진쟈샹성당은 크기가 60평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당시 상하이 인근에서는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주교좌성당의 지위를 누렸고 사제서품식이 그곳에서 열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상하이교구에서 발행된 교회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진쟈샹성당은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1872년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성당’을 건축해 양자강 이남 지역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22년에는 다시 이 성당을 확장, 수리해 성당의 모양이 장관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새 성당은 1937년 일본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1949년 4월 1000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고딕양식의 성당을 준공하지만 한 달 만에 국민당 군대에 의해 파괴됐다. 이어 1958년 대약진 운동 때는 제대, 성모상 등이 뜯기거나 불태워졌으며 철공소로 사용됐다. 최초의 진쟈샹성당은 새 성당이 건립되면서 소성당으로 보존되다 새 성당이 파괴된 후 기능을 회복해 1987년 12월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진쟈샹성당은 최초의 성당 신축, 새 성당 건축과 파괴, 재건축 등의 복잡한 역사를 이어가면서 과연 김대건 신부의 서품장소가 2001년에 철거된 진쟈샹성당인지, 파괴돼 대지에 남아 있지 않은 다른 건물이었는지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진쟈샹성당의 철거 부재를 상하이 당묘교성당으로 직접 옮긴 상하이한인성당 강병조(안드레아)씨도 이에 대해 “김대건 신부님 서품 장소가 2001년 철거된 진쟈샹성당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4년 진쟈샹성당 내 ‘성 김대건 신부 기념경당’을 설계한 최부득(바오로) 상하이한인성당 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건축학 박사)은 “건축 양식으로 볼 때 2001년 철거된 진쟈샹성당에서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현대 중국어로 ‘진쟈샹’으로 발음되는 김가항(金家巷)은 ‘김씨들이 사는 골목’이라는 뜻으로 실제 진쟈샹성당 주변에는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한국에서 ‘금가항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진쟈샹성당의 잘못된 표기라는 견해가 대체적이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맺어지기 전까지는 한국인의 중국 왕래가 제한돼 오랜 세월 한국 신자들에게 잊힌 존재였다. 한중 수교 후에야 진쟈샹성당은 중국을 찾는 한국 신자들의 필수 순례코스가 됐다.
▲ 2004년 건축된 진쟈샹성당 현재 모습.
▲ 상하이 진쟈샹성당 내 위치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경당’. 김대건 신부가 탔던 라파엘호 모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