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교회가 간다Ⅱ] 22.중국 (1)낙관론과 비관론의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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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교회가 간다Ⅱ] 22.중국 (1)낙관론과 비관론의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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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교회가 간다Ⅱ] 22.중국 (1)낙관론과 비관론의 교차

발행일2006-11-12 [제25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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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청년 신자들이 북부 허베이성에 위치한 스자좡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지상-지하교회’ 이분법적 인식이 걸림돌 

교황청과 관계 끊고 ‘애국회’ 세워 독자적 길 걸어

이웃교회 뿐 아니라 중국 내 상호교류 안돼 단절도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 그 변화를 수식하는 ‘무섭다’는 말은 이제 단지 느낌이 아닌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에서 교회는 여전히 죽의 장막 뒤에 놓여있는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중국교회에 대한 전망은 맹목적 낙관론부터 과장된 비관론까지 광범위한 게 현실이다. 미국 타임지 기자로 일한 바 있는 저명한 언론인인 데이비드 에이크만은 자신의 저서 ‘베이징의 예수’에서 중국 그리스도교를 강렬하면서도 힘차게 약동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에이크만은 종교가 이미 중국 정치는 물론 경제와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본다. 나아가 중국이 앞으로 30년 안에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스도교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그는 이런 변화가 새 그리스도교 종파를 만들어내고 종파간 변동을 촉진하면서 전체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분석은 하나의 보편된 교회인 가톨릭교회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로 들린다. 중국 내 가톨릭 신자수만 하더라도 13억 인구의 1%에도 못 미칠 뿐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가난하고 교육 혜택에서 소외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교회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한다. 가까운 이웃이자 형제인 한국교회의 몫을 발견하는 일도 여기서 시작할 수 있다. 

이해의 첫걸음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 세상에 나온 것이라면 이튿날 똑같은 것을 선보인다는 중국에 없는 게 있다. 바로 ‘통계’가 그것이다. 

2005년 1월로 13억명을 돌파한 중국의 인구통계는 말 그대로 ‘공식적’인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들 스스로도 한 2, 3억명은 더 숨어있을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전 세계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중국 인구는 여기에 더해 매년 1천만명씩 늘어나고 있다. 

중국 사회에 존재하는 이런 각종 통계의 부재는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낳는다. 단적으로 중국천주교 주교회의가 1998년 국가의 행정구역에 따라 전체 교구를 115개 교구로 재설정했지만 실제 10년 넘게 교구장 주교는 물론 사목자 없이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는 교구도 적지 않다. 

더구나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이웃 교회와는 물론 중국교회 내부간의 상호 교류도 그리 활발하지 않아 어떻게 만남을 갖고 어디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지 가늠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아 교회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통계의 부족은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이어져 보편교회 안에서 한 형제임을 지향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서로가 다른 길을 걸어가게 하는 소통의 부재를 확대재생산해내고 있다. 

따라서 중국교회에 다가서는 일은 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국 사회와 그 안에서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는 신자들의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일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교회 약사 

중국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소개된 것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던 네스토리우스주의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635년 처음 중국에 전해져 ‘경교(景敎)’ 또는 ‘대진(大秦) 경교(景敎)’로 불리며 200여년간 교세를 유지했다. 경교가 종교 탄압 등으로 소멸된 후 1289년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Johannes de Monte Corvino)이 파견된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선교 활동이 본격화됐으나 원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들의 선교 활동도 막을 내렸다. 

이후 명나라 말기인 1582년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 신부가 마카오를 통해 중국에 들어오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리치는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적응주의’ 노선의 선교로 중국교회의 기반을 성공적으로 구축해 나가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먼저 중국인들의 문화생활 속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 중국의 생활 습관을 따르고 이교적 우상숭배의 혐의가 없는 한 공자 숭배와 조상 숭배 등을 중국식 전통 계승 방법으로 인정했다. 

또 영향력있는 문인이나 관리 등과도 널리 교제하며 스콜라철학적인 신개념으로써 그들의 ‘상제’(上帝)가 바로 천주(天主)임을 가르쳤다. 그의 이 같은 보유론적(補儒論的) 선교방식은 성공을 거두어 선종 당시 2000명이 넘는 개종자가 나타났다. 이런 그의 활동이 밑거름이 돼 1700년까지 가톨릭신자 수는 30만명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회에 뒤이어 중국에 진출한 도미니코회(1631)와 프란치스코 수도회(1633)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침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거진 100여년(1634∼1742)에 걸친 중국의 의례 논쟁에 대해 바티칸이 부정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보편교회의 중국 선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후 중국 왕조의 변화에 따라 수차례의 박해가 발생하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나면서 중국교회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9세기 들어 유럽 열강들의 본격적인 중국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선교사들의 활동도 개항장을 중심으로 내륙 지역에서도 재개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이 1844년 프랑스와 황푸조약을 맺어 천주교 금교령을 해제하고 1858년 톈진(天津)조약으로 중국 내지에 교회와 학교 설립이 가능해지자 신자수가 1870년까지 37만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도약기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의 힘을 업은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선교 활동은 1900년 북경에서 일어난 반외세운동인 의화단 사건으로 4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면서 가톨릭을 비롯한 중국 내 모든 종교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외국인 선교사의 중국 내 선교 활동이 금지되면서 1950년 2274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나야 했다. 

또 방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종교 활동이 금지되고 교회에서 운영해오던 학교 3932개, 병원 216개를 비롯해 약국, 고아원, 출판사는 물론 정기 간행물 55개가 폐쇄 또는 폐간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교황청은 1946년 11월 4일 중국에 20개의 대교구, 79개의 교구, 38개의 감목구로 교계 제도를 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1957년 7월 교황청과 독립적으로 중국 천주교 애국회(Patriotic Association of Chines Catholics)를 설립해 독자적인 종교 노선을 가시화한다. 특히 중국 정부가 사도좌의 승인없이 1958년 26명의 주교를 ‘선출’함으로써 중국 교회는 깊은 질곡의 길을 걷게 된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역사를 통해 볼 때 중국교회는 고비마다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며 더디지만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중국교회 전문가들은 이런 가운데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 도정에 놓인 시대의 징표를 찾아 따라가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몫임을 역설한다. 

대중국 관계 연구에 있어 남다른 노하우를 축적해오고 있는 홍콩교구 성신연구센터 사무총장 람써이케이(林瑞琪.안토니오) 박사는 “중국교회가 놓인 외부와의 관계 단절 자체가 중국 교회 신자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며 질곡”이라고 강조하고 “중국 신자들의 입장이 돼 그들의 시각에서 보편교회와 중국교회를 바라볼 것”을 당부한다. 

람박사의 이런 지적은 여전히 중국교회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에서 거두어내지 못하고 있는 ‘지상교회·지하교회’식의 이분법적 구분이 오히려 중국교회에 다가서려는 노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현실 분석에서 나온 통찰을 담고 있다. 

그는 “중국교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부가 승인한 ‘공식교회(official church)’와 그렇지 못한 ‘비공식교회’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면서 “실제 공식·비공식 교회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으며 단지 지역별로 공식교회가 우세한 곳이 있고 비공식교회가 우세한 곳이 있을 따름”이라고 밝혔다. 

또한 독립성이 인정되는 자치지역 교구의 경우 거의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교구 행정을 유지해오고 있다고 전한다.

“공식교회에 속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안팎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미국, 독일 등지에서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중국교회를 위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서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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