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1)- 당신 햇살 아래 드리워진 내 그림자에 담긴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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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1)- 당신 햇살 아래 드리워진 내 그림자에 담긴 주님

관리자 0 7206 0

두려움 속에 인내하고 상처안고 간 길에서 만난 주님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

 최근 국내에서도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를 향해 떠나는 순례자들이 부쩍 늘었다.

 이 길은 2000여년 전 야고보가 스승 예수의 뜻에 따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을 안고, 당시 세상 끝이라고 믿었던 이베리아 반도를 향해 걸은 '야고보의 길'이다.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모든 루트의 종착점은 야고보 무덤에 세워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내면 성찰을 위해 홀로 '산티아고 가는 길'에 오른 자유기고가 박현주(엘리사벳, 26)씨가 길 위에서 보내온 도보 순례기를 5회에 걸쳐 싣는다. 박씨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도시 생장피드포르에서 이달 5일 출발,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일명 '프랑스 루트(800㎞)'를 따라 걷고 있다.

 이 순례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불릴 정도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그래서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배낭을 메고 이 길을 걸으며 삶을 되돌아보고, 대자연 속에서 위로를 얻는다.

 순례자들은 대개 하루 평균 25㎞씩 걸어 30여 일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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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자란 말이에요"
    스무 여섯해를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다. 지난 1월, 뜻밖의 부름이 있었다. 바로 800㎞가 넘는 대장정으로의 초대이다. 

 개인적으로 큰 변화와 갈등을 겪으면서 지쳐있던 내게 한 선배가 '자신을 찾는 길'이라며 이 길을 소개해줬다. 4개월 준비 끝에 지금 그 길 위에 서 있다. 아니,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한 4개월 전부터 이미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순례를 준비하면서 4개월 동안 거의 매일 북한산을 올랐고,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 기도했다. 순례의 기도는 고심해서 짧게 만들었다. 긴 기도는 외우기 어렵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주 예수님, 당신 친히 저의 인도자 되소서. 저와 저에게 속한 이들을 한 걸음마다 봉헌합니다.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보호하여 주시고 제가 당신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많은 이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오른 순례길. 첫날부터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출발지 생장피드포르역에 가려고 바이욘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려는데 허기가 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나 다름없는 상태로 고속전철(TGV)를 타고 바이욘역까지 겨우 도착했다.

 나는 불어를 한 마디도 모른다. 영어는 소위 '생존 영어'(Survival English) 수준이다. 긴장감 탓에 기차를 기다리면서 샌드위치 4조각을 꾸역꾸역 삼켰다. 사람들이 동양에서 온 작은 체구 아가씨 식탐(?)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오후 7시 30분 넘어 도착한 생장피드포르. 순례자 무리를 따라 순례협회 사무실에 가서 크레덴시알이라 불리는 순례자 여권(수첩)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의 털털한 성격과 중성적 이미지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크레덴시알을 발급하는 직원이 남/여를 구분하는 란에 F를 체크하는 나에게 "노, 노"를 연발하며 M을 체크하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난 여성이에요. 숙녀란 말이에요."라고 외쳤다.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첫날 밤은 설렘과 두려움에 이리저리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시계가 7시를 가리키는 순간 몸을 일으켜 설레는 마음으로 800㎞ 대장정의 첫발을 뗐다. 첫날이 힘들다는 소문은 괜한 얘기가 아니었다. 꾸물꾸물 심상치 않던 하늘이 비를 퍼붓는가 하면, 피레네 산맥으로 향하는 길은 내 인내와 지구력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순례를 준비하며 읽은 책들에는 예쁜 들판 길만 나오던데, 왜 아무도 이런 험난한 길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원망 아닌 원망이 들었다. 오르고 올라도 자욱한 안개뿐이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안개가 걷힌 주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경치를 인내의 선물로 안겨주었다. 해발 1400m 지점에서 보란듯이 아침 겸 점심으로 빵을 뜯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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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가락에 잡힌 물집이 느긋하게 걸으라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음날 출발하는 발걸음이 조금 무거웠지만, 처음에는 다 그렇겠거니 하고 걸었다. 그런데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가락이 아팠다. 양말을 벗어 보았다. 물집이 터져 피가 흘렀다. 양말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 상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나 자신과 주위의 작은 것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내가 언제 천천히 기어가는 작은 달팽이를 밟을까 두려워 그토록 마음쓴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 답답한 속도에 동감한 적이 있었던가? 내 살이 찢어진 고통을 느꼈기에, 작은 생명이라도 밟히거나 다치는 고통을 겪게 할 수 없었다. 
 피에 젖은 양말을 벗고 한참 길에 주저앉아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느 부부가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도 내 발 상태를 알게 된 캐나다 언니, 스페인 아저씨, 독일 할아버지, 루마니아 군인 아저씨 등이 연거푸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그 상처는 축복이고 은총이었다. 
   그러나 발가락은 쉬이 아물지 않았다. '쉬는 것도 순례'라고 자위하며 하루치 거리를 포기했다. 조급한 마음을 비우니 빨래널기 좋은 햇볕과 스케치하고 싶은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개(犬) 이야기로 시작한 순례
 5일째 여정에서 공원을 지나가다 큰 개를 만났다. 개는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던 모양인데, 이른 새벽에 출발한 나는 앞서는 순례자도, 뒤따라오는 순례자도 없는 텅빈 길에서 그 녀석과 마주쳤다. 

 개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왔다. 개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달려들지 않는다는데, 눈을 아무리 부릅뜨고 쏘아봐도 돌진하는 개는 멈추지 않았다. 

 순간 예전에 읽었던 만화 성인전이 떠올랐다. 어느 성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성모님께 기도했다는 만화책 장면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성모님을 불렀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피를 흘리고 쓰러진 나를 상상했는데, 달려오던 개는 내 주위를 빙빙 돌더니 발에 자신의 발을 살짝 올려보고 떠나는 것이었다. 

 산티아고에 다녀온 사람들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처음부터 개판, 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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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에서 마주치는 조가비 문양과 화살표는 어둠 속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마냥 반갑다. 조가비는어부였던 사도 야고보, 화살표는 산티아고 방향을 가르킨다.

 하지만 마주친 것은 개이지만, 체험한 것은 하느님이다. 그분이 이 여정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신다는 것, 그런 크고 작은 체험의 반복이 바로 이 순례길에서 진정 만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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