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성지
관리자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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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2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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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로 박해 시대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했습니다. 성지에는 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과 오솔길을 따라 각각의 맷돌에 새겨진 14처, 그리고 2002년 봉헌된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지에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조금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 겸 성당이 있습니다. 1년 내내 도보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하던 최양업 신부가 장마철에는 이곳에 머물며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를 번역했습니다. 1999년 최양업 신부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의 농가를 헐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가 설립한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됐던 곳입니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14인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습니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8명을 포함해 모두 34명에 이릅니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무명 순교자 묘소들로 산재해 있습니다. 청주교구는 배티 성지의 성역화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12년 4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 2014년 4월 11일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1:00 | |
| 평일미사 | 화 | 11:00 | |
| 수 | 11:00 | ||
| 목 | 11:00 | ||
| 금 | 11:00 | ||
| 토 | 11:00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현재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돼 있고, 좌우의 경부 고속도로와 중부 고속도로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평택 제천 고속도로가 성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 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 잤다는 최양업 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며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두
칸짜리 옛 초가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실제로
최 신부의 사목 순방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을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교우촌을 찾아 수십,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고, 때로는 신자
한 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골짜기를 올라가야만 하였다. 또 어느 해에는 밀고자 때문에 한겨울에 신자 집에서 쫓겨 나와 맨발로 산야를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인 삶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