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신석복 마르코 묘
관리자
마산
0
11248
0
2017.02.02 20:59
|
|
|
순교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나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낙동강을 건너는 명례 나루터에는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정착했고,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듯합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사하러 갔다 오던 중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를 안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한 푼도 주지 말라.”며 대구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형을 받으면서도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습니다. 결국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왔지만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고, 1975년 12월 진영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을 성역화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명례는 오래된 교우촌으로 1897년 현 마산교구 관내에 처음 설립된 본당입니다. 한국의 세 번째 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부임해서 사목하다가 1903년 명례에서 선종했습니다. 현 성당은 강성삼 신부가 1898년에 처음 지은 후 1928년 권영조 신부 때 기와로 다시 지어 축복식을 가진 성당이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된 후 1938년에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입니다. 명례 성지는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2010년 생가 터와 성당 주변을 매입하여 돌제대를 설치했고, 그 해 12월 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등록되었습니다. 2011년 1월부터 성지 담당신부가 부임하여 신석복 순교자 생가 터의 축사를 이전 철거한 뒤 6월에 사제관과 생가 터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향후 생가 터에 순교자 신석복 기념성당을 건립할 예정입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6:30 | 미사 일정은 진영 성당 것입니다. |
| 10:30 | 교중미사 | ||
| 평일미사 | 화 | 19:30 | |
| 수 | 10:00 | ||
| 목 | 19:30 | ||
| 금 | 10:00 | ||
| 토 | 16:00 | 어린이미사 | |
| 19:30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경남
김해군 진영읍의 진영 성당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는 순교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묘소에는 1976년부터 매년 9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마산 지구의 신자들이 모여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은 그가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했다. 그리고 그가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돌아오는 길목에서 며칠을 기다려 김해 한림면 가산리 길에서 체포하여 즉시 밀양으로 압송했다.
이때가 신석복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했다.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을 성역화하기 위해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명례는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살던 교우촌으로 1897년
경상도에서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1866-1903년)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이어 1896년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 번째
사제로, 줄곧 이곳에서 사목하다가 1903년 명례에서 선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