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여우목
관리자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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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2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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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목은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예로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충청도 홍주 출신의 이윤일 가정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 서인순 시몬,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습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고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9월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 · 성모상 ·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0:30 | 교중미사, 미사 일정은 문경 성당 것입니다. |
| 평일미사 | 화 | 20:00 | 동절기 19:30 |
| 수 | 10:00 | ||
| 목 | 20:00 | 동절기 19:30 | |
| 금 | 06:00 | 동절기 06:30 | |
| 토 | 15:00 | 어린이미사 | |
| 20:00 | 동절기 19:30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여우목
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또한
1827년 정해박해 때 멍에목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朴~, 1757-1827년)와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1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朴士儀, 1792-1839년) 가정도 고향을 떠나 단양
가마기에서 살다가 여우목과 건학 교우촌과 인접한 멍에목으로 피신 와서 살았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서치보가
선종한 후 장남인 서인순은 어머니와 4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풍기로 이사를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모개골 교우촌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 1868년 4월 29일(음력)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부친 서치보의 묘소가 있는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고,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부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윤일은 마을의
대표자를 묻는 포졸들에게 선뜻 나서 신분을 밝히고 가족 8명을 포함해 모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문경에서 3일 후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 모친과 누이는 풀려났지만 그는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