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성지
관리자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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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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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서울에서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가 일죽 나들목에서 돌아 들어가면 죽산 성당이 나온다.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교우들이 살육됐던 처형지와 교우들을 끌어다 심문과 고문을 하던 관아 터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 죽산에는 그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부터 일찍이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인근의 교우들이 붙잡혀 오면 지금은 죽산면 사무소가 되어 버린 이곳에서 참담한 고문 끝에 처형되곤 했다.
여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5명에 이른다. 하지만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 무차별적으로 교우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의 몸서리쳐지는 박해의 서슬을 생각해 볼 때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셀 수조차 없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죽산의 순교 사화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들뿐이다.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김 도미니코의 가족이 교우인 사실을 안 마을사람 십여 명이 작당을 하고 찾아와 열일곱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들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기어이 딸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자리에서 순교했다. 또 여정문은 그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일지라도 부자를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죽산에서는 부자와 부부를 함께 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이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순교한 처형 장소가 '잊은 터'이다. 지금은 굴착기로 깎아 냈고 목장의 한 귀퉁이로 변해 버렸지만 목장이 되기 전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夷陳) 터'이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이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려 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 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지도 한 번 끌려가면 영영 볼 수 없는 곳, 그 참담한 비극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죽산에는 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그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이 있다. 지형이 조금 도드라져 이렇게 불렸다고도 하고 땅이 진흙이어서 신을 땅에 두드려 패지 않으면 신 바닥에 붙은 진흙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두들기는 병인박해 때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한 많은 땅으로 변한다.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 길에 이 주막거리는 잠시 쉬어 가는 곳이 되곤 했다. 포졸들은 줄줄이 묶어 둔 교우들을 툭하면 갖은 트집을 잡아 두들겨 패곤 했다. 또 뒤쫓아 온 가족들은 잡혀 온 교우들이 맞는 것을 보고 땅을 두드리며 원통해 했다. 이래저래 '두들기'는 두들겨 맞는 곳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기록에만 25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곳으로 전해지는 순교의 터는 오늘도 그 옛날 굳건한 신앙을 지켜 갔던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지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제대로 세울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그동안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원래의 장소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순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땅을 확보하여 개발을 시작하였다.
죽산 성지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계획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신심 가운데 기복적 요소가 없는 성체 신심, 성모 신심,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풍스러운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성지를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커다란 돌 묵주알들이 놓여 있다. 이 묵주기도 길은 바로 성모 신심을 통해 '땀의 순교'를 체험하는 순례 길이다.
성지 중앙에는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 모양으로 순교자 현양탑과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가 좌우 12기씩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들 순교자들은 모두 죽산으로 끌려와 순교한 이들로 한치수 프란치스코, 김 도미니코, 여정문 일가 등 25명만 "병인박해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행적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 100여명의 순교자들은 이름조차 알 길이 없다. 순교자 묘역은 순교자 신심을 통해 '피의 순교'를 체험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년)와 오 마르가리타(?-1868년)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순교자 묘역 바로 위에는 십자가상이 조성되어 있고, 십자가상 위에는 '예수 부활상'(예수성심상)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후광 모양처럼 예수 부활상을 감싸 안듯 꾸며져 있다. 그리고 성지 맨 위편에는 성체조배를 할 수 있는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고, 대성당은 순교자 묘역 옆 돌담 건너편에 건립되었다. 바로 땀과 피가 한 덩어리가 된 순교의 결정체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기쁨과 은총을 만끽하고 정화되는 거룩한 장소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22일)]
순교의 처절함이 서린 "잊은터"
죽산마을은 조선시대에는 도호부로, 뒷산 비봉산 동북쪽에는 고려 때 몽고군과 임란 때 왜적을 물리친 죽주산성(竹州山城)이 있습니다. 이 죽산마을에서, 천주교의 4대 박해의 하나인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쳤습니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하여도 25분이나 됩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피를 흘리면서 현 "죽산 순교성지"인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과연 죽산 순교성지에서는 어떠한 분들이 어떻게 순교하였으며, 죽산 순교성지란 어떠한 곳인가?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는 물론, 이름이 밝혀진 25분의 순교자에 관해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 '여기중', '여정문' 이야기는 참으로 애절합니다.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 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힘이 센 김 도미니코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 도미니코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다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 날, 한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산 순교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습니다.
이분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처형된 장소가 죽산 순교성지입니다. 지금은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습니다. 이 골짜기는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 장군이 지키고 있는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진(夷陣)터"라고 불렀습니다. "이진터"에 진을 친 몽고군은 송문주 장군에게 패하여 "사리티 고개" 쪽으로 패주해 달아났습니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터"가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터'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교우들 사이에서는 순교의 처절함이 서린 "잊은터"로 가슴에 아로 새겨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 성지를 되돌아보면, 순교의 사형장으로서의 성지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는 두들겨 때려 반쯤 죽인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순교성지는 죽산 순교성지가 유일한 곳입니다.
또한 죽산 순교성지 주변에는 "두둘기"라는 곳이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명칭으로는 삼죽면 덕산리인데,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지금은 삼죽면 면 소재지로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입니다만, 옛날에는 3, 4호밖에 안 되는 작은 주막거리였습니다. 두둘기는 지형이 조금 두둑하다하여 '두둘기'라고 불렸다고도 하며, 이곳이 진흙땅이어서 신바닥에 진흙이 떨어지지 않아 두들겨 털었다 하여 '두들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두둘기는 병인박해(1866년) 때,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이 서린 한 많은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용인, 안성, 원삼, 가칠암이 등에서 숨어살던 교우들을 포졸들이 잡아 가지고 돌아오다가 이곳에 오면 술을 마시고 쉬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포졸이나 포졸 수하들의 집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포졸들이 이곳에 당도하면, 잡혀온 교우들에게 "돈을 내라", "이제 너희들은 저 달거리 잔등만 넘으면 죽는다. 돈을 내면 풀어 주마" 하며 두들겨 때렸던 것입니다. 또한 뒤쫓아 온 가족들은 잡혀온 교우들이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땅을 두드리며 원통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둘기는 이래저래 두들겨 맞던 곳으로, 교우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산 순교성지는 순교를 향한 "두들기"와 "잊은터"로 알려짐은 순교자들의 주님을 향한 '아픈 사랑'을 잘 대변해 줍니다. 이처럼 주님의 아픈 사랑의 형장인 죽산 순교성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 교우들에게 주님을 향한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교훈을 주며, 앞으로의 후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리라 믿습니다. [출처 : 죽산 순교성지 리플렛]
따라서 죽산 순교성지는 순교를 향한 "두들기"와 "잊은터"로 알려짐은 순교자들의 주님을 향한 '아픈 사랑'을 잘 대변해 줍니다. 이처럼 주님의 아픈 사랑의 형장인 죽산 순교성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 교우들에게 주님을 향한 십자가의 어리석음의 교훈을 주며, 앞으로의 후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리라 믿습니다. [출처 : 죽산 순교성지 리플렛]
죽산 마을은 조선시대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곳입니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5명이나 됩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이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병인박해 이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없었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지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원래의 장소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순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부지를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죽산 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풍스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가장자리로 묵주기도 길이 있고, 묘역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와 순교자 현양탑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묘역 뒤로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소성당 그리고 옆에 대성당을 마련하여 2000년 9월 3일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지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원래의 장소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순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부지를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죽산 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풍스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가장자리로 묵주기도 길이 있고, 묘역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와 순교자 현양탑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묘역 뒤로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소성당 그리고 옆에 대성당을 마련하여 2000년 9월 3일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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