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산성당
관리자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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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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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대구대목구의 신설과 함께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박해의 여파로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 박해 이후 죽밭골로 옮겼고, 1891년 대구 교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으로
대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해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임시 성당을 구했고, 이어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습니다. 1899년 전통 한식의 목조 성당을 완공해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식을 거행했으나 1901년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재차 성당 건립을 시작해 1902년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식 벽돌조 성당을 준공했습니다. 두 번의 성당 내부 공사에 이어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재차 축성식을 갔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고,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1986년 성당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 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2006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문화관 2층에 유물 전시관을 마련하였고, 2009년에는 대구시에서 추진 중인 근대문화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성당 외벽 조명을 설치하고 성당 마당을 공원으로 조성해 열린 공간으로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6:00 | 동절기에는 06:30 |
| 09:00 | 청소년미사 | ||
| 10:00 | |||
| 11:00 | 교중미사 | ||
| 17:00 | 청년미사 | ||
| 18:00 | |||
| 20:00 | |||
| 21:30 | |||
| 평일미사 | 월 | 06:00 | 동절기에는 06:30 |
| 화 | 06:00 | 동절기에는 06:30 | |
| 11:30 | |||
| 19:30 | |||
| 수 | 06:00 | 동절기에는 06:30 | |
| 11:30 | |||
| 19:30 | |||
| 목 | 06:00 | 동절기에는 06:30 | |
| 11:30 | |||
| 19:30 | |||
| 금 | 06:00 | 동절기에는 06:30 | |
| 11:30 | |||
| 19:30 | |||
| 토 | 06:00 | 동절기에는 06:30 | |
| 16:00 | 어린이미사 | ||
| 19:30 | 특전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Blane, 白圭三)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대구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임명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어 달구벌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해왔다.
1890년
말과 1891년 초에는 대구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로베르 신부는 일군의 불량배들로부터 행패를
당하고 경상 감사에게 시정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1891년 4월 말 교안이 마무리되면서 다시 대구에 입성한 로베르 신부는 그
해 말 대어벌(현 대구시 원대동 일대)에 임시 성당을 구해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01년 발생한 지진으로 제대 위의 촛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성당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로베르 신부는 새 성당
건립을 계획했는데, 이때 대구의 신자들 중 서상돈(徐相燉), 김종학(金鍾學), 정규옥(鄭圭鈺) 등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현 계산 성당의 원형인 새 성당은
1903년 11월 1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서 두 개의 종탑에 설치된 두 개의 종을 축성했는데, 이
종들은 기증자인 서상돈과 김절아의 세례명을 따서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부르고 있다.
계산
성당은 건축적으로 고딕식 벽돌조 건물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서쪽 정문에 세운 2개의 종탑부에는 8각형의 높은 첨탑을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 모양의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근대 초기 성당은 대개 박해시대의 순교 터나 높은 지대에 위치해 마을이나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계산 성당은 이와 달리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성당 부지 물망에 올랐던 자리는 현재의 동산동 일대였는데, 황무지인 허허벌판
언덕에 성당 터를 잡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대구 읍내 평지에 세워진 것이다.
이처럼
계산 성당은 1910년대 이후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일제의 책동으로 1942년에는
제2대 교구장 무세(Mousset, 文濟萬)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일본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주교가 제3대 교구장에 착좌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본당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3 · 1 운동에 참여하거나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운동에 가담했고, 1930년대에는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으며, 꾸준히 전교 활동을 펴나갔다.
또한
세파에 시달려 상한 벽돌을 빼내고 대구 남산동에 있는 옛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보수 현장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 복원했다. 1914년 세워진
유스티노 신학교 건축 당시 벽돌이 계산 성당 벽돌과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또
성모상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예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유리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1902년 두 번째 성당이
지어질 당시 프랑스에서 제작해 설치된 것으로 100년 이상 오색 찬연한 빛을 여전히 발하고 있다. 제대 양쪽 측면에 공관복음을 상징하는 네 개의
유리화와 성당 정문 상단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 문양의 대형 창문도 성당 건립 당시 그대로이다. 제대 양측 네 개의 창문 옆에 세워져 있는 성녀
소화 데레사 · 성 안토니오 · 예수성심 · 성 요셉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당
밖 마당을 둘러보아도 유서 깊은 유물이 많다. 성당 정문 앞 마당 한가운데 있는 대형 십자가는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재임
1911-1938)가 교구장 부임 25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교구장 부임 25주년은 곧 교구 설정 25주년이자 계산 성당이 주교좌가 된 지
스물다섯 해 되는 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