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병영
관리자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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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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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경신박해 때와 병인박해 중인
1868년, 두 차례의 큰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울산병영 장대에서 순교했습니다. 경신박해 때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오치문, 병인박해 때
경주 감옥에 갇혔던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회장 등이 이곳에서 군문효수를 당했습니다. 이 세 순교자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중의 대재 공소[죽령]로 숨어들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를 거쳐 울산병영 장대로 압송되어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순교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세 순교자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가 수습해 사형장 근처 강둑 아래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1907년 유족들에 의해 연고가 있는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으로 옮겨 합장했습니다. 그러다가 1932년 5월 말 유족들에 의해 대구 월배 천주교회 묘지로 다시 이장하였고, 1962년 10월 월배 교회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했다가 1973년 10월 19일 대구시 동구 신천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복산 성당(전 울산 성당)에서는 1957년에 태화강변의 새치벌에 작은 팻말을 세워 순교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고 하는데, 강변 정비로 지금은 어떤 표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후 순교터를 보존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1977년 동천강변에 순교지 535평을 매입하고, 1979년 9월 본당 사목회가 중심이 되어 개발에 착수해 순교자 현양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그리고 야외 돌제대를 설치하였습니다. 부산교구는 2013년 4월 울산병영 순교성지성당 기공식을 갖고 순교지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 이듬해 3월 2층 규모의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세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평일미사 | 월 | 11:00 | 주일 미사 없음. |
| 화 | 11:00 | ||
| 수 | 11:00 | ||
| 목 | 11:00 | ||
| 금 | 11:00 | ||
| 토 | 11:00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하며,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란 뜻이다.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에 있는 수영
장대골과 마찬가지로 울산시 중구 남외동에 위치한 울산병영 장대 역시 천주교인들이 무참하게 처형된 순교
터이다.
울산병영
장대의 첫 번째 순교자로 알려진 오치문은 언양 사람으로 해주(海州) 오(吳)씨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는 1801년 이곳 언양에 귀양 온 강이문에
의해 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교인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학자이면서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외교인들과도 별로 가까이하지 않던 그는 오로지
산골에서 숯을 굽는 교우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며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가 1860년 체포되어 울산병영 장대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이들은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고 부락으로 내려가 밥을 구걸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밤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포졸들은 이 깊은 산중에까지 들이닥쳐 결국 이들은 경주로 끌려갔다.

그
첫 번째 순교자인 오치문(베드로?)은 언양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오로지 교리만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주변의 유력한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굳은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쓸게 되자, 이름이
알려져 있던 오치문은 곧바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울산 장대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그는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형벌을 받았는데,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어 물 묻은 한지를 뚫자 군사들이 그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고 전한다.
울산
장대의 두 번째 광란은 1868년에 일어났다. 병인박해가 계속되면서 교우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야만 했고, 이때 울산 간월산 아래에
살던 허인백(야고보)도 더 깊은 산중인 대재(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대재 마을에는 이양등(베드로) 가족을 비롯하여
문경 멍에목(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에서 이주해 온 김종륜(루가) 등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순교
직전에 허 야고보가 남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