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곡(홍유한 묘)
관리자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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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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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 중턱의 우곡리
골짜기 안에는 한국 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가르침을 고요한 가운데 실천한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1750년경부터 이익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천주실의”와 “칠극” 등 서학을 연구하면서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습니다. 홍유한은 깨달은 바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1757년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에 정진했습니다. 1775년 그는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 밑의 단산면 구구리로 들어갔습니다.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접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으며,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세상을 떠나 우곡리에 안장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은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얻은 진리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한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후손들이 13명이나 됩니다. 이에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했으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다가 안동교구와 협의하여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는 우곡 성지에 13위 순교자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2009년 5월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의 순교 터에서 흙을 담아와 가묘를 조성하고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우곡리의 골짜기는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 순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후배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안동교구는 1993년 우곡리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인 홍유한 선생의 묘를 발견하고 이듬해 성지개발위원회를 발족하여 1995년 묘지 축복식과 유적비를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십자가의 길 등을 조성했으며, 1998년 11월 15일에는 홍유한 피정 집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0년 10월 25일에는 청소년들의 신심 교육과 성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청소년 수련원 겸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5년 9월 25일에는 우곡 성지 성역화 10주년을 맞아 대형 십자가와 홍유한 선생 동상을 세워 축복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15년 9월에는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칠극의 길을 조성하여 비석 제막식을 거행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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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1206m) 중턱의 우곡리(愚谷里) 골짜기 안에는 한국 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가르침을 고요한
가운데 실천한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다.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컸던 홍유한은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의 살림을 정리하여 1757년 충청도 예산 여촌(餘村)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정진하였다. 고요한 가운데 참 진리를 따라 살았던 그는 1775년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1439m) 밑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라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가
만년에 이르러 10년간 살았던 구구리에는 그의 자취가 서려 있는 유택지가 있고, 이곳에는 경종 4년(1724년)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洪重明)이 임금에게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고, 권철신과 주고받았던 홍유한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현재는 천진암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홍낙민의 셋째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洪梓榮, 1780-1840년)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그의 며느리 심조이 바르바라(沈召史,
1813-1839년)와 두 살 난 홍[아기] 베드로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홍재영의 부인 정조이(丁召史)도 이때 순교한 것으로 문중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 베드로(洪秉周, 1798-1840년)와 홍영주 바오로(洪永周, 1801-1840년) 형제가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