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수분 공소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장수 수분 공소

관리자 0 10714 0
 간략설명 전통 한옥 양식에 서양의 바실리카식 평면을 결합한 성당
 지번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662-1 
 도로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뜬봉샘길 51-3
 전화번호 (063)352-8394
 팩스번호 (063)351-5226
 홈페이지
 관련기관 장수 성당    (063)351-2264
 관련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시장로 4
 문화정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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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수분 공소.전북 장수읍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 쪽으로 10분 남짓 달려 고갯마루를 향하다 보면 오른쪽 산기슭에 마을이 보인다. 물뿌랑구(물뿌리) 마을이라고도 하는 수분리(水分理) 마을이다. 비가 내리면 고갯마루를 경계로 빗물이 갈라져 한 줄기는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른 한 줄기는 금강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2005년 6월 18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장수 본당 수분 공소는 마을 앞쪽 산자락에 붉은 색 함석 슬레이트 지붕을 하고 있다. 공소 뒤뜰에 세워져 있는 대형 예수성심상은 멀리서도 이곳이 천주교 건물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예수성심상은 2003년 공소 신자들이 공소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이다.
 
공소로 들어가니 뜻밖에도 건물이 2동이다. 1920년 초 대구대목구장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가 공소를 신축할 경우 방 2개가 딸린 강당을 더 짓도록 지시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사제 수급이 원활해지면 공소에 사제를 파견해 본당으로 승격시킬 요량으로 사제관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건립된 수분 공소의 내부 모습.수분리가 속한 장수 지역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850년대경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토마스 신부가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시기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이춘경이라는 교우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수분리 북쪽 골짜기인 막골과 남쪽 골짜기인 운학동에도 교우들이 피신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분리에 공소가 지어진 것은 1913-1915년쯤이다. 당시 수분리를 관할하던 함양 본당 초대 주임 이상화(李尙華, 1876-1957년) 바르톨로메오 신부와 진안 어은동 본당 초대 주임 김양홍(金洋洪, 1874-1945년) 스테파노 신부는 두 본당의 인접지인 무주 · 남원 · 임실 등지의 선교를 위하여 중간 지점인 장수면 수분리에 사제가 쉬어갈 강당과 사제관(침실)을 건립하였는데, 이는 이후 본당 설립의 기틀이 되었다.
 
하지만 관리가 부실해서 허물어질 위험에 처하자 1921년 공소 건물을 전면 개축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공소 신자들은 28km 떨어진 함양에서 흙기와를 구해 고개를 세 번이나 넘어가며 지게로 날랐고, 목재는 4km 떨어진 금천 앞산에서 육송을 구해 옮겨왔다.
 
공소 앞마당에는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이 세워져 있다.이렇게 해서 보강된 공소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6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 양식이다. 시멘트로 바닥을 고르게 한 후 주추를 놓고 나무 기둥을 세웠으며, 벽에는 좌우로 밀어서 여닫는 미세기창을 냈다. 정면 가운데와 양 측면에 출입구를 냈으며 주 출입구는 왼쪽 측면으로 냈고, 제대 뒤쪽에는 고해실과 제의실을 두었다.
 
고해실은 창틀을 통해 무릎을 꿇고 고해를 보는 신자석과 사제가 고백을 듣는 사제석이 완전히 구별되어 있고, 사제석 윗벽에는 ‘기렴’이라고 쓴 나무 현판이 걸려 있다. 수분리와 송산리 두 공소 신자들이 힘을 합쳐 성당 침실을 중수한 것을 기념해 1956년 5월 16일에 쓴 현판이다.
 
공소 내부의 마룻바닥은 물론 기둥과 벽, 제대까지 모두 처음 공소를 지었을 때 것 그대로이다. 제대는 원래 벽에 붙여져 있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떼어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면 나무 기둥들을 철근으로 고정시켜 놓은 곳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흙기와로 만든 지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기둥이 무너질 염려가 있어 조치한 것이다. 공소 지붕을 함석 슬레이트로 바꾼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원래는 흙기와였으나 1970년대에 시멘트 기와로 바꿨다가 다시 1980년대에 함석 슬레이트로 교체했다.
 
공소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옛 사제관 건물.1920년대 공소 건물을 중수하고 그 옆에 네 칸짜리 사제관을 마련한 수분리 공소는 1926년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초대 주임 김필곤(金泌坤, 1898-1928년) 바르나바 신부는 3년 동안 신설 본당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힘썼고, 1928년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석종관(石鍾寬, 1899-1974년) 바오로 신부는 문맹퇴치를 위해 창고를 개조해 소화(小花)학원을 세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가난한 어린이들과 글을 알지 못하는 주민들을 교육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1935년경 수분리 본당은 한때 교우 수가 1300명(본당 300명, 공소 1,00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1931년 전라도 감목대리구가 설정된 뒤 사제 부족으로 3년간 공석 중이던 주임신부 자리에 1935년 6월 3대 김동욱(金東旭) 마티아 신부가 부임하여 이듬해 본당을 수분리에서 장수읍으로 이전하였다. 그 뒤 1946년 5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기순(李基順) 도미니코 신부가 다시 본당을 수분리로 옮겼다. 6ㆍ25 전쟁으로 1951년 12월에 8대 주임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신부가 군종신부로 입대하면서 수분리 본당에는 후임신부가 부임하지 못해 남원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본당 설립을 염원한 장수 지역 신자들은 1952년 가을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여 기금을 마련하였고, 이듬해 3월 현 장계 본당 소재지(장수군 계내면 장계리 340-1)에 부지(300평)와 20칸 가옥을 매입하여 1954년 5월 19일 장수군 전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는 장계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수분리 본당은 장계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안내판.장계 본당의 본격적인 성당 건축은 초대 김종택(金鍾擇) 요셉 신부에 이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철연 신부는 1957년 성당 건축에 사용할 시멘트 벽돌 16만 장을 만들었고, 이듬해 3월 성당 공사를 시작해 10월에 성당(132평)과 사제관(37평)을 완공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6대 주임 김병운(金柄韻) 베네딕토 신부는 1973년 2월 장수읍에 있던 장수 공소의 기존 건물과 부지를 매각하여 현 장수 본당 소재지(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454-11)의 부지(500평)를 매입한 뒤,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0평 규모의 장수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장계 본당 주임신부는 매주 공소를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하면서 본당의 분리 신설을 계획하였다. 1977년 6월 30일 장수 공소는 마침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장수 본당 관할이 된 수분 공소에는 2007년 현재 19가구 50여 명의 교우가 살고 있다. 수분리 마을 주민의 70% 정도가 교우로, 공소 운영은 한 달에 두 번은 공소예절을 드리고 한 번은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한 번은 본당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매월 첫째 주 오전 8시에 수분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그런데 공소 경당이 오랜 세월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자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2011년 4월 준비작업을 시작으로 1년 6개월 동안 전반적인 보수공사를 시행하였다. 경당 뒤 기둥 다섯 개는 안전상의 이유로 교체하고 나머지 기둥과 대들보 등은 모두 옛 모습대로 복구했다. 그리고 2013년 4월 13일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평화신문, 2007년 7월 22일, 이창훈 기자의 기사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2004년의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5년 10월 31일)]

수분 공소 입구에서 본 전경. 왼쪽 건물이 성당, 오른쪽 건물이 옛 사제관이다.옛 사제관 앞에서 공소 성당 쪽을 바라본 모습.
수분리가 속한 장수 지역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50년대 최양업 신부가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시기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이춘경이라는 교우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인근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수분리에 공소가 지어진 것은 1913-1915년쯤으로 당시 수분리를 관할하던 함양 본당과 진안 어은동 본당의 인접지인 무주 · 남원 · 임실 등지의 선교를 위하여 중간 지점인 수분리에 사제가 쉬어갈 강당과 침실을 건립했는데, 이는 이후 본당 설립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리가 부실해서 허물어질 위험에 처하자 1921년 공소 건물을 전면 개축하는 공사를 시작해 전통 한옥 양식의 공소와 사제관을 마련했고, 1926년 본당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 후 본당이 장수읍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수분리로 돌아오기도 하고 6ㆍ25 전쟁으로 신부가 부임하지 못해 남원 본당의 관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당 설립을 염원한 장수 지역 신자들은 1952년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해 기금을 마련했고, 이듬해 현 장계 본당 소재지에 부지를 마련해 1954년 장수군 전체를 관할하는 장계 본당을 설립했습니다. 이때부터 수분리 본당은 장계 본당의 공소가 되었습니다. 1977년 장수 공소가 본당으로 설정된 후 수분 공소는 장수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습니다. 2005년 6월 18일 수분 공소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부터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심하게 훼손된 공소 경당을 옛 모습대로 보수하여 2013년 4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10:30  교중미사, 미사 일정은 장수 성당 것입니다.
평일미사 06:30  
20:00  
06:30  
20:00  
10:30  
20:00  특전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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