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천호성지
관리자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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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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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天呼)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 형성된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병인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12월 13일(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과 같은 해 8월 28일(음)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감춘
채 묻혀 있습니다. 전주교구는 시성식이 끝난 1984년 10월부터 천호 성지 개발에 본격 착수하여 1985년 11월 30일 새롭게 단장한 순교자 묘역을 축성하였습니다.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1987년 피정의 집을 완공했습니다. 2007년 5월 천호 부활성당을 새로 건립했고, 2008년 5월에는 낡고 오래된 천호 공소 경당(현 천호 성당)을 새로 건립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도보 순례길을 개발하면서 2009년에 전북 지역 4대 종교 성지를 걷는 ‘아름다운 순례길’도 함께 마련했습니다. 2013년 12월에는 한국교회 최초로 ‘천호 가톨릭 성물박물관’을 개관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9:30 | 천호성당(옛미사 전례) |
| 11:00 | 부활성당 | ||
| 평일미사 | 화 | 11:00 | 부활성당 |
| 수 | 11:00 | 부활성당 | |
| 19:00 | 천호성당(옛미사 전례) | ||
| 목 | 11:00 | 부활성당 | |
| 금 | 11:00 | 부활성당 | |
| 19:00 | 천호성당(옛미사 전례) | ||
| 토 | 11:00 | 부활성당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호(天呼) 성지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180여 년 동안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천호 성지까지 승용차를 이용하려면 호남 고속도로 익산 나들목에서 천호 성지로 가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이다. 익산
나들목에서 성지까지는 대략 10km 정도로 약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래서
천호 마을은 자녀들에게 박해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조건과 특성을 실제로 보여 주는 교육장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1984년 설립되어 호남 지역 교회사 연구의 산실인 ‘호남 교회사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어 호남 교회의 역사에 관해 상세히 공부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1983년까지만
해도 천호 성지는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으며, 천호 공소와 고산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었다. 게다가 손선지의 묘 외에 다른 순교자들의
묘는 구체적으로 확인도 되지 않았었다. 1983년 5월 호남 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12월 18일 당시 복자였던 정문호
· 한재권 · 손선지와 10명의 무명 순교자 천묘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2006년 5월 20일 기존의 협소한 피정의 집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1년 후인 2007년 5월 19일 천호 부활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했다. 연면적 521평, 지하 1층, 지상 1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하 1층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산 이와
죽은 이들이 통공하는 봉안경당으로 마련했고, 지상 1층은 500여 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다.
그리고
2009년 10월 31일 천주교를 비롯해 불교, 원불교, 개신교 등 전북 지역 4대 종교의 성지를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순례길’도
마련되었다. 천주교의 나바위 성지와 천호 성지, 불교의 송광사와 미륵사지 석탑, 원불교의 만덕산과 원불교 수련원, 개신교의 서문 교회 등 전주와
완주, 익산 지역에 있는 4대 종교의 성지 180km를 연결한 것이다. 아름다운 순례길은 문화재청으로부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길’로
선정되기도 했다.

해발
500m 천호산 아래에 위치한 천호(天呼) 마을(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은 본래 다리실 혹은 용추네로 불리던 전통적인 교우촌이었다. 후대에 그
이름이 '천호'로 바뀐 것은 박해를 받던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조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 산간 지대로 모여들었고, 기해박해를 전후해서는 교우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천호
성지 맞은편에 있는 무능골과 인근의 시목동이 당시의 교우촌들이었다.
그러나
전주의 성인 중에서 막고개에 안장되어 있던 조화서와 정원지 성인의 유해는 훗날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으나 유실되었다. 또 조화서 성인의
아들로 1866년 12월 18일 서천교(전주시 서완산동) 밑에서 매를 맞아 죽은 조윤호(요셉) 성인의 시신도 다리 너머에 있는 요머리 고개에
안장되었으나 끝내 그 곳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성인 부자가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순교한 이유는, 조선의 형률에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고 규정한 때문이었다.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산의 순교자들 23명 중에서 17명은 고산 땅 넓은 바위(廣岩, 완주군 동산면 광암리)에 살던 신자들이었다. 지금은 대아리
저수지에 잠겨 버려 흔적을 찾을 길이 없지만, 그 옛날 이곳은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이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62세
된 김성첨(토마스)의 가족 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 일행은 형장에 이르러서야 목에 쓴 큰 칼을 벗을 수
있었고, 얼마나 굶주렸는지 짐승처럼 형장의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 토마스는 "지금까지 우리가 기다려 온 천당 진복을
받을 때가 왔는데, 이만한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부디 감심하여 고통을 참아 받자."라고 모두를 격려하였다고
한다.
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연풍 성지에 묻혀 있는 황석두(루가)
성인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 없다 해서 얼굴을 지표면에 엎어 놓는 풍습과 같다. 이
순교자들도 그런 상태였다.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니, 죽어선들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였음이 분명한데도(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998년, 32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