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남이
관리자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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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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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는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 동정부부로 유명한 유항검의 맏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마태오 등 유항검 일가가 살았던 생가터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항검 일가가 모두
순교하자 유항검의 생가는 ‘파가저택’(破家瀦宅)형을 받아 저수지로 변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들 순교자 중에서 유항검과 그의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주교구는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 교리당터, 가매장터를 확인하여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987년 성지 축복에 이어 2000년 생가터를 새단장하고, 2002년 한옥 형태의 교리당과 ‘정지샴’(샘물)을 복원했으며, 2005년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했습니다. 2006년에는 파가저택지 옆에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현재 성체조배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복식을 준비하면서 생가터에 경당을 마련하고, 교리당터 입구 조경공사 등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1:00 | 미사 시간은 단체 순례객의 요청시 조절할 수 있습니다. |
| 평일미사 | 화 | 11:00 | |
| 수 | 11:00 | ||
| 목 | 11:00 | ||
| 금 | 11:00 | ||
| 토 | 11:00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호남
고속도로와 전주, 익산이 갈라지는 곳에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1756-1801년)의 생가터가 자리한 곳이다.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또 이승훈 베드로와 정약전 등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9일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은 바우백이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치명자산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 치명자산의 묘소를 개장하여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 생가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1987년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작업이 진행하였다. 유항검 생가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여 동안 동정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인근의 교리당터는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9월 23일 생가터에 피정의 집과 새 제단 및 각종 성인상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2년
6월 23일 교리당터에 종탑과 한옥 형태의 교리당(유항검 사랑채), 당시 사용했던 샘물인 ‘정지샴’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류항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전주 일대에 널리 신앙을 전함으로써 '호남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마련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교회일을 열심히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로 이종 사촌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다음해에는 감영에
자수하여 신앙을 벌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류항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한국 천주교회의 반석이 무너지면서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먼저 류항검의
아우인 류관검과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이 체포되었고, 이어 류항검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가산은 적몰되고 초남리의
집에는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순교로 전주 남문 밖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 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동안 류중성(마태오)은 매우 열렬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순이(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