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한 묘
관리자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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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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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천혜의 관광지로 빼어난 풍광과 온화한 날씨로 찾는 이로 하여금 이국적인 정취마저 느끼게 하는 제주도는 조선 시대에 중죄인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유배지였다.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섬으로 상 · 하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1271년(고려 원종 13년)까지 후풍도(候風島)라고 불렀으며, 그 후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하면서 추자도로 개칭하고 1910년 제주에
속하게 되었다. 바로 이곳 하추자도에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백서(帛書)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해에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인 정난주(丁蘭珠, 본명 命連)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11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후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정난주가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게다가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으면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정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가 호송선의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하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의 황새바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졌다.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다고 한다. 오씨의 집에서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建燮)과 태섭(泰燮)을 낳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하추자도의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성록”(日省錄)이나
“사학징의”(邪學懲義) 등에 의하면 황경한이 추자도로 오게 된 것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는 판결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정난주는 젖먹이 아들이 평생 노비로 사는 것을 피하고자 유배를 가던 도중 추자도 예초리의 바닷가
바위 위에 아들을 남겨 놓았고, 다행히 오씨 집안사람에게 발견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900년에 제주 선교를 위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1909년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 사실을 전교잡지에 소개했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주었다.
1908년
5월부터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한 기록이 남아있는 추자도에는 1956년부터 제주중앙 성당 관할의 공소가 시작되었다. 1988년 추자 공소는 서문
성당 관할로 이관되었고, 상추자도 항구 인근에 위치한 추자 공소 신자들은 황경한 묘소를 돌보아 왔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 600여 평을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다.
추자 공소는 매 주일 오전 공소예절을
하며, 미사는 기후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한 달에 한 번 서문 본당 신부가 방문해 집전하고 있다. 제주교구는 추자도의 전교와 육지에서 방문해오는
신자들을 위해 새 공소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1975년 건립된 낡은 공소 건물이
2001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 그 해 7월 기공식을 갖고 건축을 시작해 2003년 6월 30일 지하 1층 · 지상 2층 규모로 완공된
새 성당의 축복식을 가졌다. 새 공소 성당은 어린이 집과 영안실을 갖추고 있고, 20여 명이 머물 수 있는 방과 식당도 마련되어 육지에서 오는
순례객들을 위한 숙소로 이용하고 있다. [최종수정 2013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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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하추자도에는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습니다.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1790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이 체포되어 순교한 후 부인은 제주도에
관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머니 정난주는 유배 길에 호송선의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하여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갯바위에 내려놓았습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그의 아들로 키워졌습니다.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습니다.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고,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 공소 신자들이 묘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
미사시간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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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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