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답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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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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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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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으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습니다.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대지를 물색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는 페낭 신학교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을 맡겼고, 빌렘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제물포에 진출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9년 7월 1일이었습니다.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이듬해 3천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축을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고, 이어 부임한 르비엘 신부가 추가로 부지를 매입하여 1891년 임시 성당 겸 경리부를 건축했습니다. 1893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에게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부원이 설립되어 보육과 무료진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정초식, 1897년 7월 4일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췄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박문소학교’(현 박문 초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부터 답동 본당에 큰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1961년 6월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나길모)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습니다. 2001년 9월 박문 초등학교를 연수구로 이전하고 이를 리모델링하여 2002년 1월 새 교구청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9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성당 성역화 작업을 전개하여 성당 마당을 공원화하고, 정부 지원을 받아 성당 보수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2010년 8월에는 인천시 중구와 함께 답동 성당 일대에 대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통해 성지를 보존하고 지역주민들과 역사 ·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6:00 | |
| 09:00 | |||
| 11:00 | 교중미사 | ||
| 16:00 | 영어미사 | ||
| 19:00 | 청년미사 | ||
| 21:00 | |||
| 평일미사 | 월 | 06:00 | |
| 화 | 06:00 | ||
| 19:00 | |||
| 수 | 06:00 | ||
| 10:00 | |||
| 목 | 06:00 | ||
| 19:00 | |||
| 금 | 06:00 | ||
| 19:00 | |||
| 토 | 06:00 | ||
| 10:00 | 매월 첫 토요일 성모신심미사 | ||
| 16:30 | 어린이미사 | ||
| 19:00 | 중고등부/특전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 본당. 인천시 중구 답동 3 소재. 설립 당시의 이름은 ‘제물포(濟物浦) 본당’이었는데, 그 후 ‘인천 본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889년 7월 1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오로.
이렇게 하여 제물포 본당의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우선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1889년 7월 8일 첫미사를 집전하였다. 당시 미사에 모인 신자수는 85명이었는데, 새 신자들로 인해 신자수는 곧 112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다음해 어렵게 대지 3,212평을 매입한 빌렘 신부는 여기에 성당과 교리실을 건축하려고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다. 그 뒤를 이어 부임한 르비엘(E. Le Viel, 申三德) 에밀 신부는 이웃의 야산을 추가로 매입하고, 임시 성당 겸 경리부(經理部) 건축을 시작하여 1891년 7월에 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유럽으로부터 성당 건립 기금을 모금하는 한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고 교세 확대에 노력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홍콩 요양소로 휴양을 가면서 1893년에는 임시로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한편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11일에는 정초식이 거행되었고, 1897년 7월 4일 마침내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성당의 건평은 396평이었고, 형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춘 형태였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1일 ‘박문소학교’(博文小學校, 현 박문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또 1901년 영종(永宗) 공소(현 옹진군 영종도의 돌팍재)와 대골 공소(현 시흥군 소래읍 富谷里)의 신설 등으로 본당의 교세가 크게 확대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나, 1895년 1월에 일어난 신부 구타 사건, 같은 해 7월의 콜레라 발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수녀원의 불화에 연루되어 1904년에 성직 정지 처분을 받고 영종도로 들어가게 되었다.
1909년부터는 박문학교 교장을 겸임하여 직접 학교를 운영해 나갔고 이듬해에는 여자부를 신설하였으며, 1914년에는 교사를 신축 확대하였다. 1917년 4월 2일에는 남 · 여부를 통합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함과 동시에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다. 이밖에도 그는 1925년에 박문학교 남학교 교사를 2층으로 신축하였으며, 1937년 3월 1일에는 성당 구내에 ‘박문유치원’을 설립 개원하였고, 1935년에 성당의 외벽을 새로 쌓는 개축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6월 30일 제7대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해방이 되자 본당 신자들은 가장 먼저 탈취된 종을 찾아왔고, 새로 복사단과 사목회를 구성하였으며, 가톨릭 청년회와 성모회, 학생회인 용심회(勇心會) 등을 중심으로 갖가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동시에 임 신부는 1945년 ‘소화(昭和)고등여학교’를 인수하여 ‘박문여자중학교’로 개편하였는데, 이 학교는 전쟁 후인 1951년에 ‘박문여자고등학교’를 병설하여 중학교 6학급, 고등학교 6학급으로 운영하다가 1954년 12월에 송림동에 새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버크 신부는 본당 부임 후 우선 도서 지역의 전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1959년에 영흥(靈興) 공소(옹진군 영흥면), 선재(仙才) 공소(옹진군 영흥면), 운서리(雲西里) 공소(옹진군 영종면)를 설립하고, 이웃의 송림동 본당과 협의하여 1960년 7월 17일에 ‘도화동(道禾洞) 본당’을, 1962년 9월 18일에 ‘화수동(花水洞) 본당’을 분리 신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낡은 성당을 수리하였고, 1961년 3월에는 박문국민학교의 운영권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부터 인계받아 제6대 교장을 겸직하였으며, 1962년 3월 25일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설하였다. 그러는 동안 1961년 6월 6일, 인천 감목 대리구가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W. J. McNaughton, 羅吉模)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이어 10대 주임 김병상(金秉相) 필립보 신부 때부터는 평신도 활동의 학대, 시국 기도회와 민주화 운동, 이웃돕기 활동 등을 통해 본당의 활성화와 사회와의 일체감 마련에 노력해 오고 있다. 아울러 11대 주임 김상용(金相勇) 힐라리오 신부는 1982년에 교육관을 완공하였고, 13대 주임 강용운(康龍雲) 시몬 신부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답동 대성당 100년사”를 간행하였으며,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1992년 10월 ‘대부도(大阜島) 본당’을 분리 신설함과 동시에 영흥 공소와 선재 공소를 새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1996년]
답동 성당 건축미의 절정은 정면을 장식하는 3개의 종탑이다.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듯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8각형의 중앙 종탑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안정적인 형태미를 더한다. 양끝에는 작은 8각탑 2개를 두어 20세기 초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건축 양식을 그대로 반영했다. 중앙 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탑 꼭대기에 얹혀있는 북 모양의 작은 탑은 처마 밑 돌림띠의 석재 양식과 함께 정면 외관을 정중하고 화려하게 수놓았다. 성당 정면에서 눈에 띄는 장식은 한 가운데 형식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장미 문양의 장미창뿐이다. 또 성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문들은 종래의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교한 장식 대신 화강석으로 단순하게 처리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