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금광리 공소
관리자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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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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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대원군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 지는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교우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광리 공소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고 있는 김중철(필립보)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 증조모가 교우들과 함께 경주에서 금광리로 박해를 피해 왔다고 하며, 이영녀 씨도 그의 시아버지인 조중서(趙仲署) 씨가 소년시절에 경기도
여주에서 금광리로 피난해 왔다고 한다. 또한 현북면 명지리 공소의 김정옥 씨도 그의 증조분인 김 요한이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금광리에 정착했다고
한다(노암동 본당 13년사).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응만 신부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하며,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주 신부, 표 신부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강릉 노암동 성당에 속한 공소이다. 현재의 공소는 약 50년 전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금광리 공소였으며 표지판도 그렇게 되어 있으나 현재 지명은 어단리이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라고도 한다. 공소 바로 옆에 김중철(필립보) 공소회장의 집이 있다.
영동 지역의 최초의 공소는 원산교구 소속인 구정면 금광리 공소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뮈텔주교일기"를 자세히
분석한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현재 없어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삼정평 공소로 하여야 한다는 설이 있다.
금광리 공소가 본당이었던
과정 원산본당에 소속되었던 영동 지방에 1921년 가을 판공 때 금광리
신자들은 최문식 양양 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수도
많았으며, 상도문(양양) 본당과의 거리도 멀었다. 이에 최 신부는 보좌 이철연 신부를 그해 12월에 그곳으로 보내 금광리 본당(주문진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이처럼 영동 지역에는 1921년에 두 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곳 신자들이 열심이기는 하나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은데다가 발전 가능성도 적었으므로 당시 경성교구 부주교이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유(Devred) 주교의 지시로 1923년 주문진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당시 신리면 橋項里 133)으로 이전하였으며, 이때부터 주문진 본당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
금광리 공소는 1887년 설립되어 영동
지역 천주교의 모태와도 같은 곳입니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계기는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박해(1866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 지는 시기는 19세기 말경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과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합니다.
공소 초기 원산 본당 관할이었으나 현재는 노암동 성당 관할 공소입니다. 1921년 한때 금광리 공소는 양양 본당 보좌신부의 파견으로 본당이
되기도 했지만 지역적인 이유로 1923년 주문진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이전함으로써 주문진 본당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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